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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억새꽃이 한창
 억새꽃이 한창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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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을 보는 사람은 아주 드물구나

아이들하고 들길을 걸으면서 억새꽃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이제 한창 노랗게 이삭을 매단 억새꽃을 보고, 이삭이 다 지고 나서 씨앗을 하얗게 맺으려 하는 억새를 본다. 일찍 꽃이 피고 진 아이는 일찍 씨앗을 맺고, 구월이 무르익고서야 꽃을 피우는 아이는 느지막하게 씨앗을 맺는다.

가만히 보면, 나락도 억새도 꽃이 피고 이삭이 패는 때는 아주 짧다. 그러니, 나락꽃(벼꽃)을 보는 사람도 드물고, 억새꽃을 보는 사람도 드물겠구나 싶다. 더더구나 사람들은 억새가 씨앗을 잔뜩 매달아 하얗게 보이면서 한들거릴 적에 '억새 잔치'를 구경하러 나들이를 다닌다. 억새꽃이 필 무렵 억새를 보려고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억새 잔치'나 '억새꽃 잔치'를 하는 지자체가 꽤 많은데, 막상 벌이는 잔치란 '꽃'이 아니라 '씨앗'을 보는 잔치이지 싶다. 억새 잔치에 가는 이들도 억새꽃인지 억새씨인지 헤아릴 생각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억새와 갈대가 어떻게 다른지도 거의 모를 테니, 그저 바람에 한들거리는 하얀 씨앗만 예쁘다고 바라볼 테지.

억새는 살짝 짙붉은 기운이 돌면서 노란 이삭이 팹니다. 이렇게 억새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꽃이 지면 하얗게 씨앗이 맺힙니다.
 억새는 살짝 짙붉은 기운이 돌면서 노란 이삭이 팹니다. 이렇게 억새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꽃이 지면 하얗게 씨앗이 맺힙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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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에 꽃무릇 살짝

마을 할배는 예취기로 논둑에 자라는 풀을 몽땅 민다. 틈틈이 농약을 뿌려서 태워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가을에 논둑에 꽃무릇 두어 송이가 핀다. 어라, 마을 할배가 왜 꽃무릇은 안 베셨지? 다른 풀은 모조리 베고 꽃무릇만 안 벤 티가 아주 또렷하게 난다. 논둑길을 걷다 보니 다른 곳에서도 꽃무릇을 안 벤 자리가 있다.

다른 풀과 들꽃은 모조리 베더라도 차마 꽃무릇까지는 벨 수 없다고 여기셨을까. 그런데, 꽃무릇을 안 벤 때를 헤아리니 아직 꽃무릇에 꽃송이가 터지지 않을 때였다. 다른 풀하고 섞여서 꽃무릇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었을 텐데, 또는 예취기로 밀다가 그냥 슥 밀어서 모조리 잘라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꽃무릇 두어 송이는 논둑으로 퍼져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까지 올린 뒤, 바야흐로 꽃송이를 터뜨렸다. 날마다 더욱 노랗게 무르익는 논배미 사이에서 두어 송이가 앙증맞게 피어나면서 새로운 빛결을 베풀어 준다.

논배미와 논배미 사이 논둑에서 살아남은 꽃무릇
 논배미와 논배미 사이 논둑에서 살아남은 꽃무릇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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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알로 자라려는 조그마한 몸짓

아주 조그마한 호박알을 본다. 노란 호박꽃이 지면서 맺는 알은 푸른 빛이 감돌기도 하지만, 이렇게 샛노란 빛이 감도는 아주 조그마한 알이기도 하다. 대단하네. 멋지네. 요 조그마한 알이, 아이들 손톱만큼 될까 말까 싶도록 조그마한 알이, 아이들 머리통만 하게 굵는단 말이지.

햇볕을 얼마나 먹으면서 자라는 열매일까. 바람을 얼마나 마시면서 자라는 열매일까. 빗물과 흙을 얼마나 받아들이면서 자라는 열매일까. 여기에 저를 귀여워하면서 지켜보는 사람들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길을 받으면서 한결 알차게 맺는 열매가 될 테지.

우리 집 뒤꼍에서 무르익는 호박알. 아기 손톱보다 작게 처음 여문 호박알을 한 달 동안 지켜보니 비로소 큼지막한 알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큰 호박알도 이렇게 조그마한 모습에서 거듭나는 셈입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무르익는 호박알. 아기 손톱보다 작게 처음 여문 호박알을 한 달 동안 지켜보니 비로소 큼지막한 알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큰 호박알도 이렇게 조그마한 모습에서 거듭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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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까리꽃, 암꽃이랑 수꽃

아주까리풀에 꽃이 핀다. 한 포기에 암꽃이랑 수꽃이 나란히 있다. 아주까리풀이란 아주 재미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들여다 본다. 한 몸에 있으나 다른 꽃이 두 갈래로 피어나는 아주까리풀. 풀잎은 처음에는 조막만 하게 돋지만 어느새 펑퍼짐하게 커지면서 작은 우산 만큼 커지는 아주까리풀.

그리 굵지 않은 줄기에 아주 넓적한 잎이 돋으니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그만 넘어지고 마는 아주까리풀. 여린 잎은 사람이 먼저 먹느냐 벌레가 먼저 먹느냐 하고 다툼이 붙는 아주까리풀. 한여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피어서 가을에도 새 꽃을 터뜨리는 아주까리풀. 네 꽃가루가 섞인 바람이 마당으로 곱게 퍼지는구나.

아주까리 암꽃이랑 수꽃. 어느 쪽이 암꽃인지 아시는 분은?
 아주까리 암꽃이랑 수꽃. 어느 쪽이 암꽃인지 아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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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무화과알 따기

우리 집 무화과알은 높이 매달린다. 가지치기를 안 하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어른 눈높이에서 많이 열리지만 이듬해에는 어른 눈높이를 훌쩍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어떠랴. 키가 훌쩍훌쩍 크면서 멋진 가지와 그늘을 베풀어야 아이들은 무화과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줄기와 가지가 굵으면 아이들은 나무타기를 하면서 열매를 딸 수 있지 않겠나.

앉은뱅이가 된 나무에서 손쉽게 열매를 딴다면 나무가 너무 괴로우리라. 굵고 튼튼하게 자란 나무를 올라타면서 열매를 딴다면 나무도 아이들이 반가우리라. 아이들더러 빈 그릇을 들고 나무 곁에 서도록 한 다음, 알맞게 익은 열매를 톡톡 딴다. 샛밥으로 먹을 만큼만 딴다. 어른은 한 알씩 먹고 아이는 두 알씩 먹는다. 더 먹고 싶니? 더 먹고 싶으면 무화과나무한테 얘기해. 나 더 먹고 싶으니 열매를 푸짐하게 맺어 주렴 하고.

아주까리 암꽃은 위에 피고, 수꽃은 아래에 핍니다. 그러면 수꽃은 어떤 빛깔일까요?
 아주까리 암꽃은 위에 피고, 수꽃은 아래에 핍니다. 그러면 수꽃은 어떤 빛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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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무화과알이 잘 익는다.
 우리 집 무화과알이 잘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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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파랑줄무늬밤나방 애벌레와 모시풀 (암청색줄무늬밤나방)

한창 모시풀을 베는데 모시꽃이 잔뜩 달린 줄기에서 애벌레 한 마리가 대롱거리는 모습을 본다. 이 아이는 언제부터 우리 집 모시풀을 갉아먹으면서 이만큼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까. 앞으로 어느 만큼 모시잎을 더 갉아먹어야 고치를 틀어 밤나비로 깨어날 수 있을까. 뽑히거나 잘린 풀은 이내 시든다.

애벌레는 시든 풀을 못 먹는다. 못 보았다면 할 수 없지만, 애벌레를 보았기에 풀베기를 멈춘다. 거의 막바지 허물벗기까지 한 듯한 애벌레이니, 곧 새로운 몸으로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모시풀 몇 가닥을 그대로 둔다. 부디 네 가슴속에 품은 꿈대로 새롭게 태어나렴. 푸른 잎사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멋진 삶을 꿈으로 지으렴.

'검파랑줄무늬밤나방(암청색줄무늬밤나방)'이라는 긴 이름이 붙는 애벌레가 모시잎에 붙습니다.
 '검파랑줄무늬밤나방(암청색줄무늬밤나방)'이라는 긴 이름이 붙는 애벌레가 모시잎에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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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삼덩굴꽃에 무당벌레

환삼덩굴꽃에 무당벌레가 앉았네. 환삼덩굴꽃이 곱구나 싶어서 요리조리 들여다보다가 너를 만나는구나. 무화과나무 둘레에서 잘 자란 풀을 베어 뒤꼍에 눕히려고 했는데, 네가 이곳에서 이렇게 노니까 환삼덩굴꽃은 나중에 베기로 한다. 아무리 들꽃이 곱다고 해도 아이들하고 나무 둘레에서 노닐기 어려우면 풀을 벨 수밖에 없다. 어쨌든, 무당벌레 네가 우리 풀밭에서 즐겁게 놀고 네 아이도 낳으면서 이곳을 고운 숲으로 가꾸도록 도와주면 고맙겠어.

모시풀을 베다가 이 애벌레를 보고는 차마 더 베지 못했습니다.
 모시풀을 베다가 이 애벌레를 보고는 차마 더 베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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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삼덩굴에 피어난 작은 꽃에 매달린 더 작은 무당벌레
 환삼덩굴에 피어난 작은 꽃에 매달린 더 작은 무당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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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푸른 밤송이 빛깔

집에 밤나무가 있으면 밤꽃이 피고 진 뒤에 밤알이 맺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볼 수 있다. 집에 논이 있으면 손수 어린 싹을 심은 뒤 천천히 자라는 모습을 날마다 꾸준히 살펴볼 수 있다. 하루아침에 짠 하고 생기는 열매는 없다. 모든 열매는 저마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을 두루 맞아들이면서 익는다. 꽃송이에서 씨앗을 품은 열매가 자라고, 씨앗을 품은 열매는 푸른 빛깔이 가득한 풋알에서 차츰 짙고 알록달록한 새 빛깔로 거듭나는 달콤한 열매가 된다.

가을에 잘 익은 밤알을 떠올린다면 으레 흙빛 닮은 밤송이를 생각할 텐데, 천천히 익는 밤송이는 아직 풋알일 적에 옅푸른 빛깔이 곱다. 어쩜 밤송이 풀가시는 이렇게 고운 풀빛일 수 있을까. 보들보들하면서 싱그러운 숨결이 가득한 밤송이 풀가시는 어떤 열매를 속에 품을까. 저 풀가시 안쪽에 달달하고 아삭아삭한 밤알이 단단히 맺는 줄 누가 알 수 있을까. 참말 어떤 사람이 저 풀가시 안쪽에 깃든 맛난 열매를 맨 먼저 알아보았을까.

두 가지 밤송이. 하나는 흙빛으로 바뀐 밤송이. 하나는 아직 덜 여문 옅푸른 밤송이.
 두 가지 밤송이. 하나는 흙빛으로 바뀐 밤송이. 하나는 아직 덜 여문 옅푸른 밤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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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꽃을 알겠니

도서관 가는 길에 달개비꽃을 본다. 우리 집 뒤꼍에도 달개비꽃이 많이 핀다. 달개비꽃은 꽃이 필 무렵에도 꽃이랑 잎이랑 줄기를 모두 나물로 먹는다. 아주 맛난 나물이다. 환삼덩굴잎에 살몃살몃 가려진 파란 꽃송이를 보고는 아이들을 부른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무렵, 아이들하고 틈틈이 훑어먹는 반가우며 고마운 달개비는 파랗게 꽃을 피웁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무렵, 아이들하고 틈틈이 훑어먹는 반가우며 고마운 달개비는 파랗게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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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여기 꽃 보이니?"
"꽃? 어디?"
"잘 보렴."
"안 보이는데."
"잘 봐 봐. 저기 파란 꽃송이 안 보여?"

"파란 꽃? 음, 아, 저기 있네. 저기도 있다. 여기도 있어."
"무슨 꽃일까?"
"어, 파랑꽃?"
"아니야. 뭐, 파랑꽃이라고 해도 되지. 파랑꽃이 좋으면 파랑꽃이라고 해. 파랑꽃은 드무니까. 이 아이는 달개비꽃이라고 해. 꽃도 먹고 잎도 먹어."
"맛있어?"
"그럼, 해마다 이맘때에 맛나게 먹지. 너희도 지난해에 많이 먹었어."

해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다시 먹고 새로 먹으면서 열 살이 넘고 열다섯 살이 넘으면 아이들이 먼저 달개비꽃을 알아보고는 조용히 달개비나물을 훑어서 헹군 뒤 밥상에 올릴 수 있으려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아이들하고 날마다 무화과를 예닐곱 알씩 따서 낼름낼름 먹습니다.
 아이들하고 날마다 무화과를 예닐곱 알씩 따서 낼름낼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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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꽃노래, #시골에서 꽃노래, #꽃넋, #시골꽃, #시골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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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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