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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면 어떨까요?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 번쯤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면 어떨까요?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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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우리는 이 삶 속의 일상으로부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으며 살아가는 걸까. 나이를 얻는 대신 세월을 잃고, 희망을 잃는 대신 경험을 얻고, 추억을 얻는 대신 사랑을 잃고. 삶에 있어 그저 지나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반드시 받으면 주는 것이 있는 삶.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몇 시간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잃은 것일까.

며칠 전이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게으름을 한껏 피우며 TV를 보고 일어나니 11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탓이다. 잠깐 당황한 나는 허둥지둥, 갑자기 부지런히 움직이며 옷을 꿰차고 가방과 소지품을 건성으로 챙겨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갈 즈음 문득 아픈 후배를 찾아봐야겠다는 병문안 계획이 떠올랐다.

직장에 있을 때 고락을 함께했던 후배가 암에 걸려 입원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새벽에 눈을 떠 오늘은 그를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뿔싸, 봉투를 챙기지 않았다. 자신에게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쩌겠는가. 차를 제자리에 다시 세우고 아파트에 올라가 흰 봉투 하나를 꺼내 호주머니에 담고 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을 반복하고 차에 올랐다.

후배는 그나마 암 치료를 5회나 했음에도 우려한 만큼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10kg이 빠졌다면서도 나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어주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말수가 적었고, 정직했고, 대범했고, 선했었다.

그러나 세상은, (운명을 좌우하는 누군가가 정말로 있다면)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필 그같이 좋은 사람을 아프게 한 것일까. 어서 일어나라고, 그래서 소주 폭탄주나 몇 잔 시원하게 마시자는 시답잖은 소리로 후배를 위무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병문안 다녀왔는데... 휴대전화가 사라졌다

주차장에 나와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비가 흩뿌릴 듯 하늘이 흐렸다가 기어이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산골에 가봤자 밥이 없었다. 밥을 하기에는 배가 고프다, 어떻게 할까. 가만… 배고픔이 머리를 휘젓더니 면 소재지의 시장 추어탕 집이 생각났다. 어차피 가는 길, 한 그릇 맛있게 먹고 가자.

시장에 도착했다. 장이 서지 않는 평일이어서인지 주차된 차가 없었다. 수더분한 아주머니의 추어탕은 역시 기대한 만큼 맛이 좋았다. 몇 가지 밑반찬도 언제나 정갈했다. 처음 찾았을 때, 역시 장소 불문, 가격 불문, 어디서나 전라도의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 준 식당. '함포고복(含哺鼓腹)'의 배부름으로 고맙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산골을 향해 출발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한참이나 강둑으로 덮여 있다.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른다. 아침, 낮, 저녁이 서로 다른 정취를 뿜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저마다의 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강, 강의 두근거림. 그 강둑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늘 그리움이 물결친다.

새삼스럽게 그리움이라니. 사람에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과 그리움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길게 늘어져 흐르는 물을 바라봤다. 6월의 강둑은 푸르다 못해 시퍼렇다. 온갖 것의 생명이 눈부시다. 꼬불꼬불 흐르는 강을 따라 강둑에 심은 벚나무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길. 머리가 맑아진다.

산골에 도착했다. 강아지들이 일어서 두 발로 반긴다. 바삐 강아지들의 식판을 씻어 사료를 주고 목과 등을 긁어준다. 허 이놈들, 아예 드러눕는다. 이제 나름대로 바빴던 일정이 끝났다. 손을 씻고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누웠다. 그리고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 사위가 새들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산의 향기가 머리를 간질인다. 낮잠의 품 안이 아늑하다. 이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늘 하던 대로 세상은 내게 평안하게 다가설 것이다….

아,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잘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1시가 훨씬 넘었다. 어, 지금껏 전화 한 통도 없는 거지? 오늘 비가 얼마나 오지? 잔디를 좀 덮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한꺼번에 질문이 쏟아졌다. 휴대전화를 찾는다. 곁에 없다. 어? 왜 없지? 안방을 들어간다, 책방을 들어간다, 화장실을 뒤진다. 없다. 차에도 없다. 집에 두고 왔나? 가만 생각하니 후배의 병실 번호를 찾기 위해 전화기의 문자를 봤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가족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 번호... 한심해졌다

불안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아내와 아이 둘. 그 외는 누구의 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 무려 1000개가 넘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이를 어쩌나. 당장, 저녁 약속이 있는데 산골에서는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다. 있다 해도 번호를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스트레스로 체온이 올라간다. 이래 놓고 강둑을 쳐다보며 풍경에 정신이 팔렸던 스스로가 가소롭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아내와도 연락이 닿아야 여기서 잘 것인지, 광주로 나갈 것인지 정할 수 있는데.

비가 후두두, 소리친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잠시 멍한 상태가 되어 산속의 나무들이 빗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쳐다본다. 빗방울이 물이 되어 흐른다. 마음이 다소 진정된다. 뜬금없이 아이들이 보고 싶다. 아직도 품 안에서 떨어지지 않은 자식들. 그래, 이놈들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번호가 있어야 지금껏 부조한 걸 회수하지. 가슴에서 억, 소리가 난다. 가자. 일단 추어탕 집으로 가보자. 병원에서는 예의상 만지작거리지 않았을 거야.

빗속을 뚫고 자동차를 급히 몰아 시장 귀퉁이에 차를 세웠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게 문을 열었지만 굳게 닫혀 있다.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야속하다 못해 서글프다. 비는 더욱 굵어지고 부연 물안개는 가까이 다가선다.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시장 지붕 귀퉁이 벤치에 드러누웠다. 장도 서지 않는 날에 비까지 내리니 면 소재지 시장 추어탕 집을 찾는 이가 있을 턱이 없다. 누웠다 일어나 앉기를 반복하며 30분을 보냈다.

시간이 너무 더디다는 생각과 고즈넉한 시골의 시장 풍경. 누군가 그 속에 앉아 있는 나를 고요히 어루만지는 듯하다. 혹시나 전화 부스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일어났다. 뒷짐을 지고 시장을 조용히 서성거렸다. 부스는 없고 시장입구 나무의자에 두 노인이 우산을 쓰고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노인들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잃어버린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비가 내리는 적막한 시장이 너무나 쓸쓸하다. 입구를 돌아서 다시 식당으로 향한다. 아직도 사람이 없다. 또 기다려야 하는 게 너무 막막하다. 그때, 평소 다니던 메기탕 집이 떠올랐다. 가자, 그리로. 거기서 주인장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전화기를 빌리자. 추어탕 집에 전화를 걸면 사장님 손전화로 연결될지도 몰라. 그래, 가자….

촌극은 그렇게 끝났다

시동을 걸어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오, 그 댁 사장님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세상에, 반갑기가 비할 바가 없다. 사장님도 반색하며 반겼다. 얼른 오토바이를 세우며 말했다.

"어, 오셨네요. 상인회 회장님께 전화기를 맡겨 놓았어요. 오시면 돌려 드리라고. 모르셨군요."

내가 나가자마자 전화기를 발견했고, 곧바로 뛰쳐나와 나를 찾았지만 그새 나는 사라지고 없었단다. 그 말끝에 "우리 집 양반보다 더 성질이 급하시데요. 그리 빨리 가셨어요?" 오히려 반문이었다. 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촌극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 후 그 촌극에 대해 내가 그리 고생했다고, 받은 스트레스가 컸다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무료로 바꾸어주겠다는 그깟 오래된 전화기 한 대를 두고 무슨 수작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걸 겪고 보니 우리의 일상이 우스워졌다. 휴대전화 한 대로 이 소동이 나다니. 그런데도 그 안에 탑재된 무수한 기능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트릭스' 안의 세상이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제 같지만, 그 안의 '존재'들은 그냥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 보잘것없는 거짓 세상에 불과하다. 나는 문득 기능이 무한한 휴대전화를 통해 혹시 기호와 가면의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늘 과학을 예견하곤 했다. 그렇다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가 지금 어딘가에도 존재하는 건 아닐까? 나는 그 몇 시간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시간을 잃고 성찰을 얻은 것인가? 성찰을 통해 나를 돌아본 것인가? 그러나 그런 이미지나 기호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마땅함에도, 그럼에도 나는 당장 휴대전화를 버릴 수가 없다. 이미 이놈에게 노예가 된 게 분명하니까. 제길!


태그:#산골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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