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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가 내리면 좋겠다/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고/그 안에 담긴 씨앗들이 무사히 땅을 뚫고 나와/푸르게 이파리를 올리면 좋겠다//

비가 내리면/할머니는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다./집으로 돌아가 마당귀에서 뽀득뽀득 발을 씻고/마루에 올라앉아 하늘을 볼 것이다/집을 떠난 자식들을 생각하고/그들이 공장이나 회사에서/혹은 거리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그리거나/그들이 그 길을 가기 위해 애썼던 날들의/노고를 어루만질 것이다//

훠어이 훠어이/밭 귀퉁이 허수아비 그늘에 앉아/씨앗을 쪼려는 새들과 세상을 향해/땡볕의 검은 얼굴과 손으로/더 이상 손을 흔들지 않을 것이다/비가 내리면//

할머니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축축이 젖은 몸으로/집으로 돌아 갈 것이다/비가 내리면/할머니는 (졸시 <비가 내리면>)

 
뒷산 팽나무가 참 외로워 보입니다.
 뒷산 팽나무가 참 외로워 보입니다.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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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시골에는 제 어머니를 닮은 할머니 몇 분이 계십니다. 그중 한 분이 곧 마을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홀로 사는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신 아드님이 큰 도시로 모시고 가게 됐다는 겁니다. 할머니는 이제 사시던 집을 매물로 내놓고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옮겨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시골과 같지 않을 도시생활에 잘 적응하실 것인지가 염려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노인들이 대도시에 살면서 느껴야만 하는 감정은 특별하게 마련이지요. 그분들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도무지 피하고 싶은, 가능하다면 겪고 싶지 않은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더욱이 떠나신다는 그 할머니는 지난 여름 콩밭의 새를 쫒기 위해 이녁이 만든 허수아비 그늘 밑에서 훠어이 훠어이, 손을 흔들며 한 계절을 보내신 분입니다. 그까짓 콩이 무어 대수냐고, 돈으로 따지면 몇 푼이나 되냐는 제 말에 할머니는 "뭐, 특별히 할 일도 없고이..."라면서 새카매진 얼굴로 웃으셨습니다.

저는 할머니 곁에 앉아 할머니의 삶을 헤아리며 이 시를 썼습니다. 노는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골에 더 어울리는 그 할머니의 감성을 생각하면 제 걱정이 마냥 기우라고만 할 수 없겠지요.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주차장에 차를 대는 저를 보더니 감을 따 주겠노라고 구부정한 허리로 장대를 가져 오셨습니다. 커다란 감나무 밑 공터가 마을 주차장이었습니다. 저는 다음 상황을 예견치 못하고 그대로 차 옆에 서 있었는데 할머니가... 장대를 높이 드시더니 감나무 가지를 치셨습니다. 후두둑, 홍시들이 요란하게 떨어졌습니다.

홍시들은 차창과 차 지붕, 제 머리 위에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란 프라이처럼 넓게 퍼졌습니다. 할머니는 멋쩍은 듯 서 있다가 제 머리를 보더니 크게 웃었습니다. 우하하하. 그리고 "머리에 감이 떨어졌어, 꼭 파마한 것 같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들은 저도 할머니를 따라 박장대소했습니다.

그날 나는 도시를 떠나고 싶었던, 삶이 내게 짐 지워 무겁기만 했던 그때까지의 번민과 회한이 조금은 날아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후에도 할머니는 개울 건너에서 제 집 마당으로 감을 던지셨습니다. 어깨에 힘이 없어 팔꿈치 아래, 손과 팔목만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며 던지시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들이 동화처럼 아련합니다.

할머니는 그처럼 우리의 시골살이를 안착시켜 준 가이드셨네요. 할머니의 이사는 지난해 병환으로 서울 아들집에 가셨다가 주검으로 돌아오신 또 다른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제 마음을 겨울 새벽처럼 침울하게 합니다.

이렇듯 어느 것 하나 단순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이라니.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는 카프카의 말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마음이 저녁놀처럼 이웁니다. 아무쪼록 할머니가 어디서건 오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할머니가 부디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산다는 게 죽음을 향해 스러져 가는 것일지라도 삶이 다할 때까지 건강하다는 건 큰 복일 것입니다. 어디서든 할머니에게 강물 같은 평화가 넘치시기를. 광주일보에도 투고했습니다.


태그:#빈 집,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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