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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간만에 무리해서인지 곳곳이 쑤셔대고 몸뚱아리는 젖은 솜마냥 축 늘어진 채 눈만 껌뻑인다. 받들어 모셔야 할 상전이 있으니 달콤한 새벽잠은 사치다. 무거운 삭신을 살살 달래 일으켜 세워 본다. 가뜩이나 아침 잠 많은 아이 누리는 피곤해서인지 작은 움직임도 없이 곤히 잠들어 있다. 텐트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한 번 쭈~욱 펴고선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침 메뉴는 '컵밥'이다. 노량진 고시촌의 포장마차에서 주머니 가벼운 고시생들을 상대로 만들어진 메뉴이자 수험생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길거리 음식이다. 재료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비빔밥 만들 듯 이것저것 고명을 얹으면 되기 때문에 여행 아침메뉴로 선택했다.

컵밥을 만드는 과정은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따뜻하게 지은 새하얀 쌀밥 위에 갖은 반찬으로 장식해나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맛과 멋을 다 갖춘,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특별 메뉴가 완성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따로 준비한 재료가 있는 건 아니다. 전날 먹고 남은 바비큐 재료들을 이용해 만드니 일석이조다. 남겨둔 돼지고기를 미리 준비해놓은 양념장에 재워 제육볶음을 만들고 햄, 소시지, 계란 프라이까지 얹었다. 초딩 입맛에도 잘 들어맞는 최고의 조합이랄까.

코펠에 담았으니 코펠밥인가요?
▲ 컵밥 코펠에 담았으니 코펠밥인가요?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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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서 똥냄새 나"... "구수한데?"

아침 식사가 다 준비될 무렵 눈곱도 안 뗀 얼굴로 느지막히 일어난 나의 상전, '누리'도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니 야심차게 준비한 보람이 느껴진다. 놀지 않고 바지런을 떨었지만 설거지에 짐 정리 그리고 텐트까지 치우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오전 9시. 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져 내린다.

오늘은 오전부터 달리기 시작하니 큰 부담이 없는 일정이다. 하지만 무작정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오후 3시 30분에 곡성기차마을 증기기관차를 예약해놨기 때문이다. 이 열차를 타려면 늦어도 오후 3시에는 도착해야만 한다.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 듯 자외선 차단제를 찍어 바르는 것으로 질주 준비 끝! 내이리 마을에서 벗어나 전날 달렸던 그 길로 돌아와 다시 파란색 선 위에 섰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 선을 따라 나란히 뚝방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코끝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봄을 준비하며 들에 뿌려놓은 거름 냄새였다.

"아빠, 어디서 똥냄새 나."
"어, 이건 거름 냄새인데 동물 똥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거라 그래. 냄새는 나지만 식물들을 잘 자라게 해주는 거야. 심호흡 한번 해봐. 아빠는 구수하니 참 좋다!"

"우엑!"

일제시대, 기차로 이 지역 쌀을 실어나르려고 뚫었다는 향가터널, 섬진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서 있는 횡탄정, 지금은 폐역이 된 가정역 출렁다리와 그 너머 오늘의 야영지인 곡성청소년 수련장.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이정표들이다. 거리로는 전날과 비슷한 40킬로미터 정도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달려 섬진강 줄기와 잠시 헤어져 향가터널을 지났다. 냉장고에 들어선 듯 터널 안은 촉촉하고 시원하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바닥이 투명해 강 아래가 비치는 섬진강 자전거길의 명물, 향가유원지 철교로 연결된다. 이곳 다리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라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인증샷을 찍느라 분주하다. 우리도 인증샷을 찍고서 또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 부근에는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 많고 길도 비포장이라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자전거 쉼터가 있어 잠시 쉬며 지도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순창을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고장 전북 남원이다. 땀을 식히며 바라본 들판 저편, 먼 산 주변으로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황사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보기에는 좋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달리기엔 힘이 곱절로 듭니다.
▲ 송홧가루 보기에는 좋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달리기엔 힘이 곱절로 듭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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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에 들러야 했는데... 이걸 어쩌지

그러고 보니 솔싹이 한창 올라올 때이기도 한 것 같다. 송홧가루는 꿀에 버무려 다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소나무의 어린 싹은 설탕에 재워 발효해 송화차로 먹기도 한다. 송화차를 마시면 머릿속까지 상쾌해진다.

송홧가루 풀풀 날리는 걸 보아 하니 바람이 제법이라 오늘 라이딩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누리는 금세라도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다. 송홧가루 이야기를 해줘도 시큰둥하다.

봄을 준비하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곡성읍 초입에 이르렀다. 제법 폭이 넓어진, 섬진강을 가르는 철교가 보인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횡탄정 인증센터다. 여름날씨처럼 덥고 바람도 많이 부는 데다가 전날 너무 무리한 탓인지, 누리는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슬슬 점심 먹을 곳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오전 내내 달리는 동안 슈퍼마켓이 하나도 없는 바람에 점심식사 메뉴인 라면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게다가 부탄가스는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 누리를 달래서 조금 더 가보고 싶지만, 이대로 간다고 해도 한적한 자전거길 중간에 갑자기 슈퍼마켓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배고프다' '언제 쉬냐'며 툴툴대는 누리를 앞세우고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사잇길을 지나 곡성 읍내로 들어섰다.

양 옆으로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의 환영을 받으며 곡성읍 입성!
▲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양 옆으로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의 환영을 받으며 곡성읍 입성!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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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읍내 큰 도로를 따라 군청근처까지 들어가니 분식집이 눈에 들어온다. 들어서자마자 냉수를 연달아 세 컵을 들이켜도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시원한 쫄면을 주문했다. 뙤약볕 아래서 몇 시간을 달린 터라 온몸이 후끈거릴 텐데 '이열치열이야말로 만고의 진리'라는 듯 누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라면을 외쳐댔다.

주문한 라면이 식탁에 놓였다. 후후 불어가며 식히랴 얼른 입속에 집어넣으랴 누리는 분주하다. 아들 녀석 밥 먹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처럼 좋은 일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술술 잘도 들어갑니다.
▲ 라면 술술 잘도 들어갑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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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엔진은 우리 몸이니 이제 연료를 가득 채운 셈이다. 게다가 보급품까지 사고 보니 예상한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후 3시까지 도착이 여유롭지 않게 돼버렸다.

곡성읍을 뒤로 하고 '농기계 전용'이라고 쓰인 길을 따라 읍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이내 자전거도로와 다시 만나게 된다. 뒤로는 동악산 자락이 길게 병풍처럼 있고 앞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그 사이에 너른 평야가 있는 게 영락없이 배산임수다.

자전거길은 곡성읍에서 보자면 섬진강의 저편에 놓여있다. 곡성읍 쪽 강을 따라 곡성기차마을과 가정역 사이를 오가는 증기기관차(예전 모습대로 외형을 복원한 겉모습만 증기기관차다) 철길이 놓여있는데 강 폭이 그리 넓지 않아 반대편에서도 증기기관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청소년수련장까지의 길은 자전거 여행자라면 피할 수 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구간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얻는 교훈

다가올 인생의 오르막에서도 지금처럼 스스로 잘 이겨나가겠지요?
▲ 오르막 다가올 인생의 오르막에서도 지금처럼 스스로 잘 이겨나가겠지요?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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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되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겪다보면 힘들기도 하지만, 덕분에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소소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내리막이 항상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쓰러질까봐 더 불안할 때도 있다. 내게는 힘들고 싫기만한 오르막이겠지만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사람에겐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길이기도 하다. 지금 또 하나의 오르막을 열심히 올라가는 누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올라가고 있을까?

마침내 수련장에 이르는 마지막 고개를 힘겹게 넘은 뒤 긴 내리막이 나오자마자 막혔던 시야가 뻥 뚫렸다. 오늘의 목적지인 청소년수련장 캠핑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3시를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야영장과 그 주변은 연휴를 맞아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캠핑장은 살던 집을 그대로 옮기기라도 한 듯 으리으리한 텐트가 즐비했다. 그런 멋진 텐트들 사이에 가장 작고 귀여운 한 칸짜리 사랑스러운 오두막을 지었다.

이곳 캠핑장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가까운 거리에 설거지를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어 수도 꼭지를 돌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물을 쓸 수 있다. 주변에는 편의점과 카페가 갖춰져 있고 밤에는 무료 영화도 상영한다. 또 캄캄해지면 조명이 켜지는 출렁다리의 멋진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짐을 모두 내리고 가벼워진 자진거를 타고 강 건너 가정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열차 출발 시각이 다 돼가는데도 매표소는 굳게 닫혀 있었으며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상하게 여겨 매표소 앞 시간표를 확인해보니…, 아뿔싸! 이번 여행 최대의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착각했어... 큰일이야"

"누리야, 어쩌지? 이 역이 아닌가봐. 아빠가 착각해서 곡성역에서 출발하는 표를 끊었나봐."
"헐~. 그럼 빨리 곡성역으로 가야지!"


내가 예매해 둔 오후 3시 30분 기차는 가정역이 아닌 곡성역에서 출발하는 표였던 것이다. 표가 매진되기 전에 서둘러 예매하는 것에만 신경 쓰다가 출발역과 시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벌써 시각은 오후 3시 25분. 택시를 타고 간다고 해도 절대 도착할 수 없었다. 기차마을에서 증기기관차를 태워주겠노라 꼬여서 누리를 데려와놓고선 떡하니 오리발을 내미는 꼴이 됐으니 누리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누리는 누리대로 잔뜩 실망한 것 같았다.

역에 세워져 있는 전시용 기차와 레일바이크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누리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사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럴 때는 계속 그 상황 속에 빠져있는 것보다 다른 데로 관심을 유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누리야, 기차도 못 타게 됐는데 대신 강가로 내려가서 발 담그고 놀자! 강속에 다슬기가 많이 살 것 같아."
"좋아요. 잡아서 집에 가져갈래!"


물속 돌들에는 이끼가 살짝 끼어 있어 미끄럽긴 해도 물살이 세지 않고 얕았다. 발을 담그고 쉬기에 제격이었다. 돌을 뒤집어 올리니 크고 작은 우렁이들과 이름 모를 벌레들이 많았다.

기차를 놓친 아쉬움은 벌써 잊었는지 누리도 바쁘게 돌아다니며 다슬기 잡이에 여념이 없다. 딱 10마리만 잡겠다는 약속은 벌써 잊었나 보다. 놓친 것은 기차지만 얻은 것은 섬진강변에서의 즐거웠던 30분이었다.

서울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을까요?
▲ 다슬기 서울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을까요?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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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니 출출해진다. 왜 이렇게 끼니 때는 잘 돌아오는지, 돌아서면 금방 밥 지을 시간이다. 둘째날 저녁 메뉴는 참치김치 부침개와 버섯덮밥. 광주서 왔다는 이웃 텐트 사람들에게 식용유를 얻고 답례로 참치김치 부침개를 한 장 드렸더니 다시 시원한 맥주 한 캔과 음료수가 돌아온다. 도시의 편안한 생활을 잠시 잊고 휴식을 위해 찾아온 캠핑장이니 마음에 여유가 넘쳐나서일까? 캠핑장의 인심이 후하다.

밤에는 누리를 위해 준비한 일정으로 섬진강 천문대에 가보기로 했다. 구름이 많아 실제 관측은 못했지만 우주와 달에 관한 영상과 별자리 강의를 들었다. 별과 달을 함께 볼 수 있는 초승달이 뜨는 맑은 날에 오면 관측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 좋다고 한다. 1시간쯤 되는 관람을 마치고 텐트로 돌아와 누우니 어느새 오후 10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걸 보니 내일은 보나마나 비가 올 모양이다. 나는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어쩌나, 아침에는 텐트를 걷을 수 있게끔 비가 그쳐야 할 텐데…'라는 생각뿐인데 누리는 빗속에서 라이딩을 할 생각에 잔뜩 기대에 차 있다. 비가 안 오면 당장이라도 기상청에 항의 전화를 걸 기세다.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뚜뚝~ 뚜뚝~' 텐트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시작됐다.

(* 4편에서 계속)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섬진강 자전거길 여행, #자전거캠핑, #곡성기차마을, #송화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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