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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로망. 아들과 여행 떠나기
 아빠의 로망. 아들과 여행 떠나기
ⓒ 백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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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둔 아빠에게는 로망이 있다.

이를테면 아들과 함께 처음으로 목욕탕 가는 날이라거나, 콧수염 거뭍하게 날 무렵 함께 앉아 술 마시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 거기에 또 하나를 보태자면 엄마는 빼놓고 아들과 단 둘이서 멀리 여행을 떠나보는 것!

목욕탕 가는 것은 이미 끝내서 별 감흥이 없고, 아들을 앉혀 놓고 술 한 잔 하려면 10년쯤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이제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이니 엄마 없이 아빠하고만 떠나는 여행은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지난해 여름, 1박 2일로 북한강 자전거길 종주를 다녀왔지만, 늘 여행에 목말라 하는 나는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떠날 생각만 하던 참이었다. 마침 5월 초 단기 방학 소식을 듣자마자 미리 세워둔 여행 계획을 들고 와 아들 누리를 슬슬 꼬드겨 본다.

"누리야, 요번 5월 단기 방학 때 아빠랑 여행갈까? 섬진강 자전거길을 달리는 건데, 중간에 곡성에 가면 증기 기관차도 타볼 수 있는 곳도 있고, 캠핑하면 숯불에 바비큐도 할 건데..."
"증기 기관차에 바비큐까지? 진짜요?"

기차라면 사족을 못쓰는 누리에게 거절할 수 없는 떡밥을 던진 셈인데 예상했던 대로 누리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세 살배기 둘째를 돌보느라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아빠의 로망'을 무기로 내세운 대의 명분에 아내도 '안전 제일'을 조건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 여행 준비하기

가방이 총 여섯 개. 누리도 두 개의 짐을 싣습니다.
 가방이 총 여섯 개. 누리도 두 개의 짐을 싣습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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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갈 사람과 갈 곳이 정해졌으니 이제 여행을 준비할 차례다. 자전거 여행을 가려면 식사와 숙박을 정해야 한다. 내 스타일은 대부분 직접 요리를 하는 편이다. 숙박은 텐트로 해결한다. 그러려면 챙겨야 할 짐이 상당하다.

자전거 여행이기 때문에 앞뒤 짐받이와 자전거 패니어라는 이름의 자전거 가방이 필요하고, 그 가방에 모든 필요한 물건을 다 넣어야 한다. 자전거 여행할 때, 등에 배낭을 매고 가는 방식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왜냐면 자전거를 타는 내내 짐을 지고 가는 셈이 돼 피로감이 훨씬 더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위해 총 여섯 개나 되는 가방을 준비했다. 우선 텐트와 매트를 담은 큰 가방, 뒤쪽 두 개의 패니어에는 캠핑 용품, 자전거 용품 그리고 음식 재료와 조리 도구를 넣는다. 앞쪽 패니어에는 옷과 그 밖의 자잘한 물건이 들어간다. 핸들바 가방에는 지갑, 휴대폰, 카메라를 넣는다.

큰 가방 무게가 대략 개당 8kg, 작은 가방에는 4kg. 짐 무게만 35kg에 이 몸뚱아리까지 합하면 불쌍한 내 자전거는 0.1톤이 넘는 짐을 싣고 나흘을 달려야 한다. 여행 전문가일수록 짐을 단출하게 꾸린다는데 짐 싸놓은 걸 보니 전문가 소리 듣기는 출발 전부터 틀려 먹은 것 같다.

싸고 풀기를 몇 번을 반복하고, 넣을까 말까를 계속 고민해도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행이라는 것이 불확실성의 연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니 실제 여행에 가서 부딪쳐 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여행 전날 밤 새벽 1시가 돼서야 겨우 짐을 모두 싸서 자전거에 실을 수 있었다.

핸들을 이쪽 저쪽 돌려보니 짐이 없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 마치 파워스티어링이 없는 차를 운전하는 느낌이다. '이 많은 짐을 싣고 쩔쩔 매면 아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 텐데...'하는 걱정을 뒤로 한 채 마침내 5월 1일 새벽 5시. 알람이 울렸다.

섬진강 자전거길, 그곳을 찾았습니다

강진터미널에서 출발 전 인증샷
 강진터미널에서 출발 전 인증샷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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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개발을 하면서 전국에 자전거길이 많이 생겼다. 수많은 자전거길이 있지만 모든 길이 아름답고 달리기에 좋지만은 않다.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이 멋지고 추천할 만한 곳으로 뽑는 곳이 있으니 바로, 섬진강 자전거길이 그 곳이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을 따라 임실, 곡성, 구례를 지나 광양 백운산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왼쪽은 경상도 하동, 오른쪽은 전라도 순천이다. 내가 꼽아본 이 길만의 매력으로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코스가 전체적으로 평탄해 큰 오르막이 많지 않아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다(성인들이 보통 이틀에 걸쳐 전체 코스를 완주한다). 둘째, 자전거길이 섬진강을 계속 따라가며 아름다운 경치가 끊이지 않는다. 셋째, 길을 따라 중간 중간 들러볼 만한 곳들이 많다.

곡성 기차 마을에서 증기 기관차와 레일 바이크를 즐길 수 있고, 밤에는 곡성 천문대에서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중간쯤에는 섬진강 생태 어류관, 대하 소설 <토지>의 배경인 하동 평사리를 지나간다. 조금 더 가면 지난해 화재 후 얼마 전 다시 문을 연 화개장터가 있고, 한창 매실이 익어가는 광양의 매화 마을을 만날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바다까지 다다른다.

적어도 아들 녀석과 함께 하는 4일 동안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 속까지 충만하게 해 줄 만한 모든 것이 있는 섬진강 자전거길. 이곳을 대한민국 최고의 자전거 길임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다.

섬진강 자전거길. 파란색 선만 따라가면 됩니다.
 섬진강 자전거길. 파란색 선만 따라가면 됩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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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간의 여행, 이제부터 시작

아침 6시, 동서울버스터미널 전주행 고속버스. 첫 차임에도 의외로 승객이 많다. 정시에 출발했지만 연휴 첫째날답게 차들은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짜증나는 교통 체증에도 기분이 좋은 것은 오랫동안 꿈꿔온 새로운 여행의 스타트 라인에 선 긴장감, 그리고 준비를 잘 마친 후의 홀가분함, 또 창 밖의 풍경들이 뿜어대는 좋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창밖에 펼쳐진 푸르른 산들은 연초록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날 때마다 산은 그 빛깔을 달리한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솟아난 새순의 여리고 연한 녹색이 제일 마음에 든다.

찬 바람 쌩쌩 불고 눈 내리는 겨울이 오래도록 길수록 갓난아기의 야들야들한 피부결 같은 연녹색 새순의 위대한 생명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 기운으로 온 산과 들이 넘쳐나는 모습은 이 계절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창 밖 감상과 나만의 '개똥 철학'에 푹 빠진 사이 버스는 어느새 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무려 두 시간이나 연착돼 시계는 오전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종주길은 임실군 강진면 섬진강댐 인증센터에서 시작된다. 다시 순창행 시외버스를 타고 50분을 달려 강진터미널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할 일은 보급품을 구하는 일이었다. 일단 자전거길에 들어서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필요하거나 미리 준비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가격이 저렴한 것은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왔다. 하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어디서든 구하기 쉽고 가격이 비슷한 물건들은 현지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좋다. 관광객이 현지에서 물건을 구매해야 지역 경제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제일 중요한 식수를 비롯해 저녁 반찬 거리와 간식을 사서 실었다.

터미널에서 방금 종주를 마친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얼굴은 안경 쓴 자리만 하얗고 나머지는 시꺼먼 것이 꼭 흰 매직으로 안경 모양만 그려놓은 듯했다. 혹시 나흘 후 우리도 저 모습? 아니 될 말씀이다. 당장 선크림을 꺼내 두껍게 바르는 것으로 여행의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첫째 날] 강진면 섬진강댐 인증 센터→ 유등면 내이리

새마을교
▲ 섬진강물의 세례 새마을교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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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km, 3만 9958번.

154km는 섬진강댐 인증센터에서 광양 배알도 수변공원까지 4일간 달려야 할 거리다. 3만 9958번은 내 자전거를 기준으로 기어를 2-6단에 놓고 쭉 달렸을 때 돌려야 할 페달의 수다. 누리 자전거는 좀 작으니 그보다 몇천 번은 더 돌려야겠지? 매일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셈이며, 이것을 네 번 완주해야만 한다. 우리 둘 모두에게 주어진 도전 과제인 셈이다.

면 소재지를 벗어나 회문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섬진강 자전거길 대장정의 시작점이다. 다들 인증센터에서 도장 찍느라 분주하다. 종주 수첩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꼭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도장이야 내 머릿속 기억의 책장에 '쾅' 찍어두면 그만이다.

일기 예보대로 맑고 화창하며 온도도 꽤 높아 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자전거길은 파란색 선을 따라 이어진다. 길이 갈라지거나 헷갈리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섬진강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어 지도가 없어도 길을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힘들 정도다.

다만 자전거길이 도로 갓길에 있는 구간은 차와 함께 달려야 하기 때문에 어른인 나에게도 녹록지 않으니 자연히 누리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여행 내내 아마 누리는 내가 했던 말 중에 다음 세 마디가 제일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오른쪽으로 붙어!"
"내리막이다!"
"괜찮아?"

대충 잡아도 길의 70% 이상은 차가 다니지 않는 자전거 도로였고, 차와 함께 달리는 구간이라고 해도 갓길이 넓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20분쯤 달렸을까?

우리는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다리인 새마을교에 다다랐다. 강이라 하기도 멋쩍은 개천이다. 여기를 건너면서 우리 발과 자전거 바퀴는 섬진강물 세례를 받았다. 마치 깊은 산 속 계곡에 발을 담그듯 느리게 지나가며 발끝에 와 닿는 감촉을 한껏 즐겨본다.

'바라건대 우리 여행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기분 좋은 세례를 뒤로하고 힘차게 오르막을 오르는데 아뿔싸, 체인이 빠져 제 위치로 돌아가질 않는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뗐을 뿐인데 초반부터 김빠지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게다가 쉽게 손쓸 수 있는 펑크도 아니고 변속기 쪽 문제라면? 순간 아찔했다.

"아빠, 자전거 괜찮아?"

유난히 기계 쪽으로는 손 기술 없는 아빠가 당황하는 것을 누리도 눈치챘는지 자꾸 묻는다. 다행히 '멘붕'에서 정신을 차리고 변속도 해보고 페달을 돌려 자전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저 높은 곳에서 툭 떨어진 듯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누리야, 점심먹을 곳 나올 때까지 신나게 달려보자!"

이번 여행 첫 번째 음식은 누리가 제일 좋아하는 하얀 스파게티다. 크림이 꼭 필요한 재료지만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시판 소스에 우유를 넣어 만든다. 자전거 쉼터에 자리를 펴고 근처 메기 양식장에서 식수를 구해와 뚝딱 한 끼를 해결하고 다시 길을 재촉해 달리기 시작했다.

점심준비 - 파스타 삶는 중
 점심준비 - 파스타 삶는 중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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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1일부터 4일까지 아홉살 아들 누리와 함께 달린 섬진강 자전거길 여행 이야기입니다.



태그:#섬진강, #자전거길종주,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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