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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22일 오후 5시 55분]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 문성근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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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야구선수권에서 최초로 우승한 적이 있었죠. 아마도 그때 멤버들이 김응룡, 하일, 박영길, 박현식이 국가대표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실제로 경기장에 가서 봤나요?"


"아! 물론이죠.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정말 많이 갔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지 아세요? 야간경기였어요."
"야간경기요?"

"아~ 당시에는 야간경기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였거든요. 그때가 1960년대였으니까 야구장에 조명탑이 처음 생겨서 더욱 그랬을 거예요. 보통 야구장에서 야간에 경기를 하면 그림자가 선수 아래로 떨어지잖아요? 근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어요. 아마 광량이 부족했든가, 설계가 잘못됐든가, 뭐 그랬다는 설이…."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지역. 을지로와 청계천, 종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라 그런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건축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해 더욱 화제를 모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선 곳. 그곳은 동대문이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예전의 흔적이라고는 조명탑이 유일하다. 1925년 경성운동장에서 시작된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지난 2007년 12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 12일 마포구 용강동의 어느 작은 사무실에서 80년 동안 한국 스포츠의 성지였던 동대문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 배우 문성근을 만났다.

당신의 목소리가 서울의 역사가 됩니다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 문성근2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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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부터 서울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을 목소리로 채록하는 사업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1927년부터 3대째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부터 김두한의 양복을 직접 제작했다는 종로의 어느 양장점까지, 서울에 사는 시민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에 모았다. 지난 3년 동안 참여한 사람만 1000여 명. 모인 에피소드만도 1500개가 넘는다.

작년부터는 '서울을 기억하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주제를 정해 '서울의 추억, 동대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 '서울의 환희, 2002월드컵'에 관한 기억을 채록했다. 이 중 동대문에 관한 기억에 <동대문운동장, 아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의 저자이면서 야구 칼럼니스트인 김은식(42)씨, 동대문운동장 보존 캠페인에 참여한 체육시민연대 소속의 허정훈(45)씨, 중학교 때 핸드볼 선수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직접 경기를 했던 김희웅(56)씨 등 25명이 참여했다.

작년 8월부터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 75개의 에피소드가 모여서 오는 26일에 드디어 2차 콘텐츠인 팟캐스트가 문을 연다. '동대문'라는 제목으로 총 3부로 제작된 이번 팟캐스트에서 문성근은 내레이션을 맡았다.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소정의 거마비만 지급하는 조건(?) 때문에 그냥 홍보대사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자 당대표를 역임했던 정치 거물급 인사였기에 약간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레이션이 진행되던 두 시간 내내 그의 모습을 본 필자는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흠…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보다는… 이건 어떨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가장 보통의 당신'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읽어야 할 원고 분량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깨알같은 대본을 수차례 반복해 읽었다. 빨간 플러스펜은 어느새 원고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정도였으며, 자신의 입에 감길 때까지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을 수 년간 맡은 그가 아니었던가? 단순한 직업의식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본능의 움직임 같았다.

'동대문'이라는 제목의 총3부로 제작된 이번 팟캐스트는 문성근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그가 읽어야 할 원고 분량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뿔태 안경 너머로 깨알같은 대본을 수차례 반복했다. 빨간 플러스펜은 어느새 원고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정도였으며, 자신의 입에 감길 때까지 몇 번이고 되새겼다.
▲ 문성근 내레이션 '동대문'이라는 제목의 총3부로 제작된 이번 팟캐스트는 문성근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그가 읽어야 할 원고 분량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뿔태 안경 너머로 깨알같은 대본을 수차례 반복했다. 빨간 플러스펜은 어느새 원고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정도였으며, 자신의 입에 감길 때까지 몇 번이고 되새겼다.
ⓒ 임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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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동대문과 서울에 관한 추억을 물었다.

"그 당시 장충체육관에서는 정말 다양한 경기를 했어요. 김기수 선수가 세계타이틀매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예순을 넘은 그의 흰 머리 사이로 지그시 감은 눈이 보였다. 1960~1970년대 동대문으로 둘만의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그 경기를 보려고 학교도 그렇고 높은 건물 옥상에도 (올라가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지…."

"야구장은 괜찮았는데, 장충체육관인가? 실내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웃음) 지금이야 상상도 못할 일인데 (당시에는) 금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뭐 그뿐이었는가? (다른 통에) 소주를 몰래 담아서 들어가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술 마시고 싸우는 경우도 허다하구…."

"김기수 타이틀매치 보려고 옥상 올라가고... 정말 대단했지"

술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더 언급했다. 당시 신문에서 가장 즐겨보던 코너가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이라는 네 컷짜리 만화였단다. 하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던 그 시절에 만화를 통해서 서민들이 대리만족했을 테니까.

"만화 속에는 항상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가 등장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징어가 없어졌어요. 누군가 얘기하는데, 오징어를 일본으로 전량 수출을 해야 해서 쥐포로 바꿨다 하던데요. 뭐 별거는 아닌데, 왜 그게 그렇게 아쉽던지…."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 문성근3 '서울의 추억, 동대문'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한 배우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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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나 2살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강대 무역학과(72학번)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도 잘한 수재였다. 30년 이상 국민배우로 알려진 그가 연극영화과가 없는 서강대에서, 그것도 무역학과를 졸업하던 그 시절이 궁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너는 꿈이 뭐냐? 너는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냐?'라는 질문을 해요. 사실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무역학과를 갔어요. 지금도 대단하지만 제가 입학했을 당시 무역학과가 점수가 제일 높았어요. (웃음) 고3 때 '진학'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점수를 보니까 붙겠더라구요.(웃음)"

점수에 맞춰 대학을 입학한다는 것이 필자의 상황과 비슷해 충분히 공감했다.

"그런데 1년 만에 알겠더라구요. 아~ 내가 잘못 왔구나! 종합대학이 된 이후론 전과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제가 행복해지는 걸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절실했던 거 같아요."

연극, 영화를 비롯해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선배로서 조언과 쓴소리를 하면서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다른 얘기도 하고 싶어요. 사실 요즘 문화예술계가 상당히 어렵잖아요?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해결이 안 된 시설이 있어요."

최근 문을 닫은 대학로극장을 비롯해 연극계의 상황이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극 산실로 여겨졌던 공연장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한 것도 최근이고, 더욱이 문화지구 선정 이후 대학로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도 현실이다.

"예전에 한 군에 하나씩 문화회관을 보유하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공연장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강당을 지은 셈이죠. 이것을 참여정부 때 당시 이창동 장관이 중단했어요. 이런 문화회관이 어떻게 보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런 (공연이 불가능한 수준의) 무분별한 건립은 폐해였다고 봐요. 공연을 해본 사람들은 그 느낌을 알거든요. 이곳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역사맹 안 되려면 부끄러운 역사도 지켜야"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지역. 을지로와 청계천, 종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라 그런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건축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가 설계해 더욱 화제를 모았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선 곳. 그 곳은 동대문이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예전의 흔적이라고는 조명탑이 유일하다.
▲ 동대문 조명탑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지역. 을지로와 청계천, 종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라 그런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건축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가 설계해 더욱 화제를 모았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선 곳. 그 곳은 동대문이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예전의 흔적이라고는 조명탑이 유일하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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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기억을 채록하는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에 내레이션으로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최근에 찍은 영화, 시민 참여행사를 볼 때, 그는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보였다.

"특별히 과거에 관심을 둔다기보다는, 역사는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모든 것은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하구요. 지금 2015년 대한민국이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 아세요? 현실을 직설적으로 논해야 미래에 대해서 얘기할 거 아닙니까?"

그는 집권세력이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치는 현실에 많은 섭섭함을 토로했다.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처음 생긴 것이 국민의 정부 시대부터라고 말했다. 지금의 이런 현실이 국민들을 역사맹으로 만들고 있다 비판했다.

"후손들에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박종철 방은 유지되고 있는데, 남산의 정보국(예전 안기부) 등 이런 것들을 솔직히 후손들에게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사는 잊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요. 자랑스러운 역사이든지, 부끄러운 역사이든지 지우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필자는 그가 살아온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담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에 살지 않았지만, 1970년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를 같이 봤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현재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인터뷰를 약속한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점심시간을 지나쳐도, 오히려 헤어지는 순간을 아쉬워하던 인간 문성근이었다. 이번에 오픈한 팟캐스트에서 그의 목소리가 더욱 감미롭게 다가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내가 당신께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바쁜 당신, 오늘도 아침을 거른 당신,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두 눈을 꼭 감은 당신,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핸들을 손에 쥔 당신, 어제나 내일이 아닌 그저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가장 보통의 당신, 그래서 당신은 어쩌면 추억이나 기억 속에서 빠져드는 문을 굳게 닫아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런 당신께 기억을 걷는 시간을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덧붙이는 글 | 본 인터뷰는 문화예술 전문 시사 월간지 '문화+서울' 7월호 <사람과 사람>에 동시 게재됩니다. '문화+서울' 웹진주소 : www.sfac.or.kr/munhwaplusseoul



태그:#문성근, #메모리인서울프로젝트, #동대문, #동대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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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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