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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 6400여 명, 교직원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1980, 19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기자말

사학을 부의 축적 도구로 이용한 백인엽은 그만큼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에 인색했다. 대학원 건물 건축 공사는 몇 년째 중단됐고, 도서관 건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백인엽은 쫓겨난 선인학원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 이사회를 통해 '건설소위원회'를 구성한다.

건설소위는 지난 1985년 6월 10일 첫 회의를 열어 종합도서관과 대학원 건물 건축 공사 중단 문제를 논의해 '건설 본부'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당시 이호 이사장은 "건설 경험이 많은 설립자(백인엽)를 자문 위원으로 위촉해 건설 업무를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이사회는 방대한 규모의 '건설 본부' 설치안을 의결하고, 백씨를 건설 본부 자문 위원으로 위촉한다. 비리 혐의로 쫓겨난 백씨가 선인학원에 다시 들어온 것이다.

복귀한 백씨는 재단 사무국에 관련 사항뿐 아니라 각급 학교의 고유 업무에 속하는 사항도 일일이 보고 받고 결재까지 했다. 그의 결재는 모두 연필로 이뤄졌다. 이는 부당한 간섭이 문제될 때 그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다.

1980년대 선인학원에 있던 인천대는 학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대학원 건물(좌측)이 수년째 방치됐다. 당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사진제공ㆍ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1980년대 선인학원에 있던 인천대는 학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대학원 건물(좌측)이 수년째 방치됐다. 당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사진제공ㆍ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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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교육 환경, 학교를 공사판으로

백씨 복귀 후 선인학원 안은 온통 공사판이 됐다. 대학원 증축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고, 도서관조차 없는 상황에서 백씨는 이해 못할 각종 시설물을 설치했다. 이때 남구 도화동 선인학원 부지 출입구엔 거대한 철재 문을 만들었고, 각종 동상도 세웠다.

또한 학원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던 넓고 잘 다듬어진 잔디 구장을 없애고, 거대한 인공 폭포를 세우고, 각종 시설물을 설치했다. 조경을 위해 심어 놓은 수많은 나무 중엔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품종도 많았다. 공원 조성에 투자한 돈만 11억 원에 달했다. 교수와 학생은 기초적인 실험·실습 도구가 부족해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토건 사업이 학내 곳곳에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학생들을 자극한 것은 학원에 설치된 대규모의 벤치와 파라솔이었다. 학원 통로와 공간마다 설치된 파라솔은 적·녹·황·청색 등 원색의 비닐 천을 이용한 것이었데, 파라솔마다 색 세 가지를 배합한, 실로 호화찬란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벤치와 파라솔이 무려 200여 개에 달했다. 삭막했던 학원이 유원지를 연상하게 하는 공간으로 바뀐 셈이라, 학생들은 의아해했다.

재단은 당시 파라솔과 벤치를 개당 33만~38만 원 가격으로 외부에서 공급 받았다고 설명해,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벤치와 파라솔은 선인학원 안에 있는 운산기계공고 교사와 학생들이 실습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재단이 인천대뿐 아니라 선인학원 안에 이런 파라솔 3000개 정도를 설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학원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백씨가 학원을 공사판으로 만들어 재산을 부정하게 축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1992년 학원민주화 투쟁의 불씨가 된다.

재단 복귀한 백인엽, 교수와 학생 탄압

학생들을 위한 투자는 하지 않고, 파라솔을 설치하는 등 학교를 온통 공사장으로 만든 것에 학생들은 서서히 분노하기 시작했다. 또한 백씨가 있는 '건설 본부'에 교직원 72명이 '파견' 형식으로 차출됐다. 여기다 백씨는 관선 이사 당시 새로 뽑힌 교수 40여 명의 감시와 견제를 계속했고, 학생들의 자치 활동에도 개입했다.

1986년 1학기 말부터 대학 사회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교수들을 통제했다. 이른바 '고과제(考課制)'란 제도를 도입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교수 근무 평정이다. 고과표는 평가 항목 20여 개로 구성돼 있었는데, 연구 실적이나 능력과는 상관없는 근무 실적, 지시 사항 준수 여부, 학교 방침 협조 자세, 학교 시설물 관리 상태 등이 주 내용이었다.

백씨는 평가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교수는 '정리 대상'이 된다고 협박했다. 특히 실험 실습이 없는 학과의 경우는 '조교'가 불필요하다며 정원 47명 중 15명만을 남기고 해고했다. 백씨는 그 해 9월 20일부터 '1986 서울아시안게임'을 핑계로 인천대에 2주간 임시 휴강 조치를 내렸고, 재단 비판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인천대 학보를 압수해 소각했다. 학내에서 재단에 비판적 활동을 벌인 민속학연구회의 악기가 모두 파손되기도 했다.

학생 동원해 시위 학생들 폭행까지...

1986년 인천 5.3민주 항쟁으로 김교흥 당시 인천대 총학생회장이 구속돼 학생회가 제 역할을 못했지만, 2학기부터 학생들은 대학 당국의 탄압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특히 선인학원의 파행에 울분을 느낀 김정환 학생은 그 해 10월 13일 '도화 동산의 학우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장문의 호소문을 학생들에게 배포해, 비교육적 전횡을 폭로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호소한다.

하지만 백씨는 10월 11일 출소한 김교흥 총학생회장을 불러 '집행유예' 중임을 들어 투쟁에 참여할 경우 다시 구속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인천대가 주춤할 때 선인학원에 함께 속한 인천전문대 학생들은 10월 14일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진행한다. 제물포역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백인엽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고, 경찰은 이를 제지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 학생들이 전경들에 잡혀가자, 흥분한 전문대생 700~800여 명이 전경 버스를 둘러싸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들 학생들은 재단 이사장실 등을 점거하고 '백인엽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인천대 학생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재단 정상화 투쟁위원회(아래 재투위)'를 구성하고 학내에서 백인엽 퇴진, 어용 학장과 보직 교수 총사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점거 중이던 학장실에서 '호교회'의 정체를 알려주는 자료를 찾아냈다. 이 내용이 폭로되자,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더욱 늘어났다. 정원이 5000여 명인데, 매번 1000~20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씨의 두 번째 퇴진과 인천대 휴교령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 재투위 학생들은 10월 21일에도 학내 집회를 준비 중이었다. 부슬비가 내리자 학생회관 내 체육관에서 집회를 하려했지만, 축구부 학생들이 연습을 핑계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학생 500여 명이 비를 피해 체육관으로 들어가려하자 축구부 학생 30여 명은 각목과 쇠파이프, 우산 등으로 시위 학생들을 구타했다.

학교 당국의 종용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폭력 사태였다. 축구부 학생들은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가 계속 폭력을 휘둘렀다. 학생 여러 명이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부상자 15명 중 3명은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흥분한 학생 300~400명도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찾아 들고 체육과 교수실과 사무실을 쳐들어가 집기와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휩쓸고 지나간 학생회관, 체육관, 본관 1, 2층은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갑자기 일어난 이날의 폭력 사태는 학내의 여러 학생에게 목격됐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학생 1500여 명이 분노와 흥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각 단과 대학 학장실과 모든 보직 교수실을 점거했다. 또한 '더 이상 인천대에 다닐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며 자퇴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까지 학생 1000여 명이 자퇴서를 작성했다.

다음날 열린 학생 비상총회엔 학생 3500여 명이 참여했다. 인천대 분규 사태 이후 최대 인원이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인천대뿐 아니라 선인학원 내 중·고교를 순회하며 '백인엽 퇴진, 학원 정상화'를 외쳤다.

학생들은 철야 농성에 들어갔고, 이러한 투쟁은 교수 사회로까지 번졌다. 그럼에도 백인엽은 해결책을 좀처럼 내놓지 않았고, 학생들의 투쟁은 계속 고조됐다. 당시 문교부는 매우 이례적으로 단일학교에 휴교령(1986년 10월 31일)을 내려 사태를 수습하려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인천대학교, #선인학원, #분쟁 사학, #백인엽, #휴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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