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밤 늦은 시간 김애진이 작두에 올라 공수를 주고 있다
▲ 작두 밤 늦은 시간 김애진이 작두에 올라 공수를 주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너희들이 이제 와서 나한테 잘 되게 해달라고 빌어. 그동안 어린 제자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살려달라니 괘씸하다"

3일 오후, 하루 종일 뿌리던 비가 멈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름달까지 하늘에 걸렸다. 경기도 시흥시 군자봉길 167에 소재한 한 굿당. 굿당이란 과거 집에서 하던 굿을 마을에서 항의들이 잦아 할 수 없게 되자, 산속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굿 행위를 전문으로 할 수 있도록 조성한 장소이다.

이 굿당에서 김애진(여, 37세. 부천시 오정구 내동)의 맞이굿이 열렸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는 무격(巫覡)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과 수양부리(자신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의 안녕을 위해 벌이는 축원굿이다. '맞이굿' 또는 '진작굿'이라고 하는 이 굿은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성대하게 상을 차리고 굿을 한다.

김애진이 신령들을 위하는 맞이굿을 하기 위해 차린 굿상
▲ 굿상 김애진이 신령들을 위하는 맞이굿을 하기 위해 차린 굿상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김애진이 굿을 시작하기 전에 굿상 앞에나아가 절을 올리고 있다
▲ 절 김애진이 굿을 시작하기 전에 굿상 앞에나아가 절을 올리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13시간에 걸친 맞이굿, 새벽 2시까지 이어져

'굿'은 열린축제이다. 누구나 다 볼 수 있고,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다. 적어도 과거의 굿이란 마을잔치였다. 어느 집에 안택굿을 한다고 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가리지 않았다. 대개 초저녁부터 시작한 안택굿은 다음날 아침에 날이 훤하게 밝도록 계속되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굿판에서 굿을 하는 무격의 말과 행동에 따라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굿을 하는 집주인과 마을사람들 모두의 마음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이웃'이란 그렇게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굿의 결집력이었다. 지금은 그런 공동체가 사라지다보니, 한낱 '무속행위'로 치부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굿은 3일 오후 1시경에 시작해 4일 새벽 2시가 되어 끝났다. 그동안 김애진 자신을 비롯해 신의 웃대인 신할아버지와 신어머니, 신자매 등 5명이 번갈아가면서 굿을 진행했다.

"처음에 신딸 애진이가 내림굿을 받으러 왔을 때는 종교가 달랐어요. 그런데 내림을 받고 천존오방색 천을 잡고 놓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놓으라고 했더니 이 조그만 것이 당차게 '이 줄은 절대 놓을 수 없다. 네가 나를 내치지만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줄을 끝까지 놓지 않는 거예요."

가사장삼에 고깔을 쓴 김애진이 맞이굿에서 신을 맞아들이는 천궁맞이를 하고 있다. 낮 시간에는 비가 내렸다
▲ 천궁맞이 가사장삼에 고깔을 쓴 김애진이 맞이굿에서 신을 맞아들이는 천궁맞이를 하고 있다. 낮 시간에는 비가 내렸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맞이굿을 올린 김애진(여, 37세)
▲ 김애진 맞이굿을 올린 김애진(여, 37세)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잘 나가던 김애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애진의 신어머니인 이정숙(여, 부천거주)은 내림굿을 받을 당시를 이야기하면서 참 당찬 아이였다고 한다. 내림굿을 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보면서 함께 울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내림을 받고 몇 년 동안은 참 잘 불렸다고. 무격들이 잘 불렸다는 것은 손님이 많고 일(굿)을 잘 냈다는 소리이다. 그러면 그만큼 수입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당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동안 마음고생이 참 많았다. 이제 이렇게 신사맞이를 했으니 앞으로 잘 불려주마.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 앞으로 열심히 배워서 큰 만신이 돼라"

윗대 무격의 그 말 한 마디에 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흘린다. 신엄마를 떠나 혼자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누가 말만해도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무격들만큼 위계질서가 분명한 사람들은 없다. 이들은 굿청에 들어가 굿 한 석을 마치면 바로 위 어른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신형제끼리도 맞절을 한다. 그럴 정도로 이들에게는 신의 부모나 신형제들 사이가 오히려 친부모나 형제들보다도 더 끈끈하다.

신어머니인 이정숙이 산신을 맞아들이는 산바라기를 하고 있다
▲ 이정숙 신어머니인 이정숙이 산신을 맞아들이는 산바라기를 하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경기안택굿 보존회 고성주 회장이 대안주를 하면서 공수를 주고 있다
▲ 고성주 경기안택굿 보존회 고성주 회장이 대안주를 하면서 공수를 주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그것은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무당'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신들린 사람'으로 치부를 받기 때문에, 스스로가 매사에 더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같은 동질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자신들끼리는 더욱 사이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만신은 신령에게서 받은 것을 나누어야죠.

김애진이 잘 불릴 때쯤 욕심을 냈다고 한다. 살던 집을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미 내림을 받은 지 10년 세월이지만 3년 정도는 '잘 불리는 애기만신'으로 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오직하면 손님들이 대기를 할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많던 수양부리들이 곁을 떠나고 들어오던 재물도 막혀버렸다.

작두를 타기 별상복을 입은 김애진이 신을 올리는 거성을 하고 있다
▲ 작두거성 작두를 타기 별상복을 입은 김애진이 신을 올리는 거성을 하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아이까지 생기다보니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찾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이 생활에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신어머니의 집 앞을 서성이기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어머니를 디시 만나고 이번에 무리를 해서 맞이굿을 올렸다. 힘든 처지에 이렇게 큰 판을 벌여놓았으니 자연히 버거울 수밖에 없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신에게서 받은 물질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어야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요즈음 어린 애동제자들이 잘 몰라요. 그러면 신령들이 준 것을 다시 걷어가 버린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힘이 들다보면 괜한 짓들을 하게 되죠. 애진이도 이제 제 길을 찾았으니 앞으로 잘 될 거예요."

작두를 타고 내려온 후 고성주 회장이 대감굿을 하고 있다. 고성주 회장은 김애진의 신할아버지이다
▲ 대감굿 작두를 타고 내려온 후 고성주 회장이 대감굿을 하고 있다. 고성주 회장은 김애진의 신할아버지이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고성주 회장이 굿을 하면서 김애진의 옛날이야기를 하자 민망한 듯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다
▲ 김애진 고성주 회장이 굿을 하면서 김애진의 옛날이야기를 하자 민망한 듯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다
ⓒ 하주성

관련사진보기


굿석 자리에 함께 한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 회장은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먼저 내 이익을 생각하면 안된다고 한다. 언제나 내 자손(수양부리)들과 불우한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그 길만이 오랫동안 신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고성주 회장. 몇 년 동안 밀린 슬픔을 작두 위에서 토해내는 어린 신제자에게, 그런 신의 매정함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당부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불교문화뉴스와 네이버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애진, #맞이굿, #굿당, #고성주, #이정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