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전에 공모한 거 아니에요?"

검찰 수사관이 다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이니까 잘 알아서 하시겠거니 해서 빌려준 것뿐이에요."
"사업자 명의를 넘기면서 공모를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요?"
"당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업의 '사'자도 몰랐어요."

그때였다. 담당 검사가 한쪽 문을 열고 나왔다.

"대학원 공부까지 한다는 양반이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 못해요? 사업자등록증으로 당좌를 개설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잖아."
"몰랐습니다. 공부에 몰두하던 때라 이쪽 일은 잘 알지 못했어요."

그들만의 취조법이었을까. 숫제 반말로 쏘아부치는 검사 말투가 차가웠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2001년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사업을 하던 형에게 명의를 빌려준 것은 그 몇 년 전이었다. 그전에 형 명의로 낸 사업자등록증이 부도로 무용지물이 되고 난 뒤였다. 사업자등록증을 은행에 제출해 당좌수표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정확하게 알았다.

당좌가 무엇이고, 부도가 어떤 식으로 규정되는지도 그해 봄 형님이 모든 사실을 전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우리 말글 공부에 빠져 있던 '백면서생'이었다. 회사 부도니 당좌니 하는 말들을 들을 일이 전혀 없었다.

형님 사업의 부도, 이름 석 자 빌려준 대가는 혹독

당시 나는 우리 말글 공부에 빠져 있던 '백면서생'이었다. 회사 부도니 당좌니 하는 말들을 들을 일이 전혀 없었다.
 당시 나는 우리 말글 공부에 빠져 있던 '백면서생'이었다. 회사 부도니 당좌니 하는 말들을 들을 일이 전혀 없었다.
ⓒ freeimages.com

관련사진보기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름 석 자를 빌려준 대가는 혹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도 받기 힘들 검찰 출석 조사를 받았다. 급여 압류 통지서와 세금 납부를 독촉하는 경고장들이 잇따라 직장으로 배달되었다. 신경과민이었을까. 교무실에 우편물이 들어올 때마다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은 한 사채업자의 독촉 전화였다. 형님은 당좌 결제에 필요한 현금 확보가 어렵자 사채업자에게서 수천만 원의 돈을 빌렸다. 사채업자는 그 돈을 받아내기 위해 명의 소유주인 나에게 접근해 온 것이다.

처음 그는 비교적 '신사적'으로 다가왔다. 드라마 속 사채업자처럼 협박하거나 상욕을 하며 윽박지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른 출근 시간이나 점심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밤 늦은 시간까지 전화를 눌러댔다.

'신사적'인 방식으로 돈을 받아내기 어렵겠다고 판단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투는 여전히 점잖았지만 압박성 발언이 마구 쏟아졌다. 직장에 사람을 보낼 수 있다는 경고가 가장 두렵게 다가왔다. 교무실에서 '깍두기'들로부터 봉변을 당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사채업자의 위협은 나날이 커져 갔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더 참아내기 힘들었다. 어느 날 그에게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다. 성의를 보이겠으니 돈을 융통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했다. 당시 조그만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 딸린 보증금을 빼서 주고 단칸방으로라도 옮길 요량이었다.

곧장 방을 구하러 나섰다. 다음 날 방이 다닥다닥 붙은 벌집 같은 어느 집에서 주인과 구두 계약을 했다.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처연함이 밀려왔다. 그대로 가다가 인생 망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득 사촌 형님 한 분이 떠올랐다. 십수 년 넘게 인근 도시에서 사업을 해 오시던 분이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어떤 수완을 쓴 것일까. 사채업자 전화가 바로 다음 날부터 끊겼다. 놀라웠다. 그 뒤로 두려움 속에서 전화기 폴더를 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갚아야 할 돈 수천 만원... 아내도 몰랐다

세상 물정 공부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수개월 재판 끝에 선고유예를 받았다. 심각한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정에 서기 위해 직장과 법원을 오고간 모든 시간들이 나를 크게 짓눌렀다. 형이 만든 어두운 '유산'이 돈 문제와 얽히면서 일상을 압박하기도 했다. 모 기관을 통해 빌린 사업자금 수천만 원이 내 앞으로 떨어져 있었다. 형이 내 명의의 사업자등록증으로 빌렸으니 고스란히 내가 갚아야 할 돈이었다. 형이 만든 어두운 '유산'의 그림자는 그 뒤로 한참 더 이어졌다.

결혼식을 올린 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위장 결혼'이니 '사기 결혼'이니 하며 크게 화를 냈다. 간신히 설득해 수 년간 조금씩 갚아 나갔다. 그사이 형님은 재기를 하느라 우리에게 돈을 대줄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런 형님을 독촉해 보라는 아내 성화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속도 좋다. 어쩜 그렇게 성인군자 같은 소리만 하니?"

몇 년 전이었다. 형과 얽힌 지난 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내게 막내 누나가 쏘아부쳤다. 오랫동안 우리 부부를 힘들게 했으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형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누나에게 말했다.

"난 많은 거 기대 안 해.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더 나빠지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하면 내 속만 상해."

언젠가 한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잊히지 않는다. 친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돈은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 여력이 있어 빌려줬다면 그만이지 돌려받을 걸 생각하다 보면 관계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살이 이치가 그렇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이런저런 일들에 휩쓸리기 쉽다. 자신의 행동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특히 더 그런 일이 자주 생기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책임 소재나 잇속을 따지기 시작하면 관계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돈이나 다른 무엇으로 주변 사람을 도우면서 차라리 '베푼다'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한 까닭이다. 그때 일 이후 수년간 고생한 형이 지금 '완벽하게' 재기한 데에도 나의 이런 태도가 은근히 작용했으리라 믿고 싶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위기의 순간들 응모 글>입니다.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사채업자, #빚 독촉, #당좌수표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