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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겨울이었다. 아마 11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몹시 추웠던 그 날 저녁, 나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종로로 갔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었다. 친구의 애인이 친구를 여러 명 불러냈는데, 당시에 친구는 나를 불러낸 것이었다. 친구와 나는 평생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살아온 터라 서울에서는 지인이 적었다. 그런 이유로 타지에서 서로 의지하던 사이로서 나는 참석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2012년 한 해 동안 나는 백수로 지냈다. 원래는 연초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학자금대출 연체이자가 폭탄처럼 터져나왔다. 통장잔고를 모두 털리고서, 순식간에 바닥을 친 나는 한동안 의지를 잃고 지냈다. 단기알바로 이따금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간신히 생활을 이어나갔다.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라면 하나로 한 끼를 채우고, 심지어 어떤 날엔 그게 하루의 유일한 식사가 된 적도 있었다. 차비가 아까워서 알바 출근 이외의 외출을 자제하고, 결국 휴대폰 요금을 내지 못해서 발신 정지가 되기도 했다. 인간관계는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방구석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나날이 짙어졌고, 어두운 그늘이 마음까지 잠식해가는 나날이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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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친구의 생일파티를 다녀오던 길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생일파티 초대를 받은 나는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힘든 내 현실을 알고 도와준 몇 안 되는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생존이 화두가 된 시기에도 차마 놓을 수 없는 인간관계란 분명히 있었다. 궁핍한 내 생활에 만남의 자리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곁에 남아준 사람이 그 친구였다.

종로로 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는 지하철을 탔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추운 날씨였기에 친구와 일행은 이미 어딘가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자, 초저녁에 헤어지리라 생각했던 일정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는 조바심에 빨라졌지만, 아쉬움에 마지막 잔을 비우는 순간 "여기 한병 더 주세요"를 외쳤다.

"이걸 어쩌지"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결국 막차 시간에 가까워져서 나와 친구, 친구의 애인과 일행은 각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종로에서 집까지 멀지 않았던 친구는 애인을 배웅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나도 서둘러 집에 가야했다. 신림에 거처가 있기 때문에 막차를 놓치면 귀가가 막막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 봐서 정말 반가웠다. 다들 바빠서 못 온다는데, 넌 멀리서도 와줘서 고마워."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친구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차, 막차는? 황급히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정류장 전광판은 노선마다 온통 '운행 종료'를 나타내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주변의 다른 버스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도 어느샌가 점점 택시를 타거나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밤공기와 적막함이 빈 자리를 소리없이 메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혼자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고, '도대체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할까'하는 물음이 곧장 따라붙었다. 사라진 막차는 머릿속에 귀가의 욕구를 불러왔고, 싸늘한 바람은 이를 더욱 강하게 키웠다. 컴백홈, 집으로 가야만 쉴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 종단, '집으로'

문득 주머니를 뒤졌는데, 텅 비어있던 공간에 무언가 닿아 손에 잡혔다. 다시 꺼낸 주먹을 펴보자 구겨진 만 원짜리가 나타났다. 아까 작별인사를 할 때 친구가 주머니에 손을 대는 것 같더니, 차비하라고 넣어준 것인가 싶었다. 이런 배려심이라니! 고마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집까지 갈 차비로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막막함은 여전한 상태로 남았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이대로라면 밤의 거리에서 새벽을 맞이하게 될 지경이었다. 서둘러서 집으로 가자고 마음 먹었고, 일단 무작정 걷기로 했다. 와이파이로 겨우 지도 어플에 접속하고, 종로에서 시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요금 문제로 끊긴 폰으로나마 길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다 와이파이 사각지대로 들어서면 도로 위의 교통 표지판을 올려다보며 방향을 정했다.

'신림으로, 집으로.' 그렇게 겨울밤의 '나홀로 서울 종단'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술도 깰 겸, 조금 걷다가 근처에 어느 찜질방이라도 보이면 들어가서 하룻밤 자려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만 원으로 갈 수 있는 만큼만 택시를 탈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할증 요금에 한강까지도 못 가서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생각을 접고 걷기만 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시청을 지나서 서울역으로, 숙대입구역을 지나서 용산으로 걸었다. 지하철 1호선 노선을 따라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찬바람에 정신도 맑아지고, 간만에 산책을 하는 느낌이라 기분도 나름 괜찮아졌다. 거기까지 걷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더라면 딱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관은 어느샌가 눈 앞에 나타났다.

바로 고기 굽는 냄새를 맡게 된 것이었다. 용산 인근에서 너무 배가 고팠다. 패딩 안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커졌고, 이윽고 포장마차 앞에서 멈춰섰다. "아, 찜질방" 하는 말이 새어나오면서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지글지글 구워지는 요리를 바라보자 머리가 멍해졌다. 어느새 내 손은 주머니 속 한 장의 지폐를 꺼내들고 있었다. 허겁지겁, 순식간에 꼬치구이 서너개가 뱃속으로 사라졌다.

허기를 채우고서 만난 두번째 고비는 한강이었다. 다시 힘을 내서 걷다가 한강대교를 마주한 것이다. 세찬 바람에 다리 위의 전단지가 휩쓸려 강 위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타야 할까? '아니야, 나는 더 걸을 수 있다'는 이상한 의지가 샘솟았다. 술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내 걸음은 <반지의 제왕> 속 원정대보다 더 굳은 각오로 계속되었다. 마치 '어쨌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왜 걸어야만 하는지도 이미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집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말만 되뇌이면서 걸었다.

다리를 건너고 만난 터널을 잊을 수 없다

노량진의 우뚝 선 학원 건물들을 지나자, 서서히 '약속의 땅' 관악구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갈증이 심해져서 편의점에 들러 작은 생수 한 병을 사서 목을 축였다. 문득 시계를 보려고 폰을 켰다. 4시를 넘어선 것을 확인하자 배터리가 소진되어 스마트폰 기기가 꺼져버리고 말았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골목길 어딘가에 쓰러지듯 누워서 낙엽을 쓸어덮고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라는 말이 떠올라서 고개를 저었다. 미친듯이 자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신대방 근처에 다다르자 터널이 앞을 가로막았다. 인도는 없었고 차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앞에 두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기엔 내가 너무 피곤해. 이젠 어찌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러다가 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곤 하는 걸까. 한숨을 쉬자 입김이 앞을 가렸다. 눈 앞이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내 앞에 택시가 와서 천천히 멈춰섰다. 길가에 앉은 내 모습을 보고, 아마도 택시를 잡으리라 기사가 생각했나 보다. 생각해보니 아직 주머니엔 오천 원이 들어있었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택시에 탔다. 택시기사에게 "신림역으로 가주세요" 하고 말하고선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 날 새벽, '술을 마셔도 반드시 잠은 집에서 잔다'는 나의 신념은 지켰지만 치러야 했던 대가는 컸다. 서울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면서, 나는 스스로 지켜야 할 일을 한가지 추가했다. 술은 적당히, 늦지 않게까지 마시자는 것. 이제는 시간이 지나 직장을 다니고, 지갑에 택시비가 될 돈을 충분히 챙겨다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 교통수단을 모두 차단당하고 쓸쓸히 걸어야 했던 새벽의 회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울 지리를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제 한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듯하니, 한 편으로는 고마워해야 할까. 그 날 한강을 건너면서 인적없는 겨울밤 거리를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아마 당시의 찌질했던 내 모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씁쓸한 '흑역사'로 남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위기의 순간들 응모글'입니다.



태그:#위기의 순간들, #서울 종단, #택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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