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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재, 동성애에 관한 인식은 확실히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커밍아웃을 마냥 머나먼 남의 일로만 여기고 있었던 내가 사람들에게 나의 성적 지향을 밝힐 수 있게 된 것도,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덕분이었다.

내가 나의 성적 지향을 인지하고 커밍아웃을 고민하던 시기에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지금보다 더 비가시화해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성소수자는 그저 '타자'였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거의 없었고, 매체에 등장하는 홍석천씨나 하리수씨의 경우는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바라봐졌다. '내 주위엔 없겠지.' 그런 생각이 지금보다 더욱 만연했기에, 쉽게 커밍아웃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커밍아웃을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때 내가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내 결정이, 어리다는 이유로 손쉽게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웠다. 그건 기우가 아닌 현실적 가능성이었다. 청소년은 충동적이고, 판단력도 부족하고, 생각이 미성숙하여 실수도 많이 한다는 건 이 사회의 일상적 편견일 뿐 아니라 교과서에까지 등재되어 청소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혐오세력들이 동성애를 탄압하는 명분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논리는, 바로 청소년과 동성애를 이상하게 엮는 것이다. '동성애는 한창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시기의 청소년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청소년기에는 아직 사고가 미숙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는 공개적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골자이다. '미성숙한'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명목 아래 성소수자와 청소년을 동시에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자기가 성숙한 줄 아는 미성숙한 '어른'들을 선도하려 한다. 청소년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미성숙한 것도 아니고, 비청소년이라면 무조건 성숙한 사고를 견지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도대체 어떤 마법이 작용하기에, '어른'이라는 탈을 쓰고 당당하게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비청소년의 존재가 용인된단 말인가.

'보호'와 '선도'라는 이름의 일상적 폭력

앞서 이야기한 혐오세력의 논리들을 차근차근 짚어가보자. 그들이 청소년과 성소수자를 엮어 이야기할 때에는 시선이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먼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들은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시기의 청소년들에게 동성애가 혼란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소년을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심어줄 수 있는 주장이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애초에 자기 마음대로 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성애가 정말로 질병이고, 틀린 것이고, 내 의지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편하겠는데 그렇지가 않다. 자기 혐오와 모멸감이 생겨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청소년 보호를 외치는 혐오세력들이 오히려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꼴이다.

또다른 시각은 청소년을 선도 및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사고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닌데도 성소수자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 주장에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성소수자가 아닌데 잠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나이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할 자유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을 성소수자 탄압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라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리려 하는 것이야말로 미숙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혐오세력은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있어 청소년을 명분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보호'의 논리이든 '선도'의 논리이든, 어른과 똑같이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존재인 청소년을 한없이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 그런 주장은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논의 밖으로 아예 빼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만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주위로부터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TV 등의 매체에 영향을 받아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원래 지니고 있었던' 동성애 또는 양성애의 성향이 친구의 말이나 매체에 표현된 것들로 인해 '깨어나게' 된다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선암여고 탐정단>에서처럼 드라마나 각종 매체에서 동성애가 그려지고 표현되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 이성애 중심주의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 특히 어리다는 이유로 더욱 억압당하고 부정당하는 이 땅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하는 시기에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혐오세력은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라. 그리고 청소년을 성소수자 억압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태그:#퀴어, #성소수자, #이반, #게이, #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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