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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넷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극중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여학생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이 '부적절'하다며 방통위가 심의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 사안을 놓고 SNS와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토론이 벌어졌고 언론사에서도 연일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 제목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종편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 동성 키스신 논란'
'파격적인 여고생 동성 키스 장면 논란'

퀴어문화축제라는 것이 있다.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 것, 억누르고 살 것을 강요받는 성소수자들이 일 년에 단 하루 자신을 '해방'하는 날이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비(非)가시화한 성소수자를 수면 위로 꺼내 가시화하려는 목적도 있는 축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 일대에서 진행하곤 한다.

주최 측은 이 축제를 서울시청광장에서 개최하려 수 년간(올해로 7년째) 노력을 해왔지만 매번 무산되었다. 올해도 그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면서 '인권도시 서울'과 함께하는 퀴어문화축제는 결국 볼 수 없게 됐다.

'동성애'는 보지 않을 권리?

이렇게 동성애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보지 않을 권리.

'당신이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이지만, 그 사랑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왜 굳이 그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시내 한복판에서 티를 내려고 하나.'

이 어처구니없는 말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은 동의를 얻는다. 그리고 이런 폭력적인 언사는 공론의 장을 벗어나 일상적으로도 발화한다.

'난 동성애자들이 싫지는 않은데, 그냥 내 앞에서만 안 그랬으면 좋겠어.'

대다수의 비(非)성소수자들이 자기 주변에는 성소수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성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살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이전보다 널리 퍼져 있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그럴 수는 있는데, 내 눈에 보이지만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이해도 존중도 아니다.

'자유', '권리'라는 말을 이상하게 비틀어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은 그의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소수자는 그냥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말이다.

이 세상의 누구에게든 사람의 '존재'를 반대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동성애라는 말 뒤에 접미사처럼 '논란'이라는 말이 늘 붙곤 하는 것이 우스운 이유이다.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찬반 의견을 갖고 그것을 논란거리로 만들지는 않는다.

성소수자는 지금보다 더 많이 이야기돼야 한다

보기 싫으니 음지에 머물러 있으라는 식의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숱한 차별의 사례들이 떠오른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버스 좌석에 앉을 수 없었고, 여성은 자기 일을 갖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던, 그런 게 당연하다고 믿어졌던 시절의 이야기들. 소수자에 대해 '(다수자인) 내 눈에 띄지 말 것'을 당연하게 요구했던 시대적 차별의 내용들.

나는 절대적 소수와 다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성애자는 이성애 중심 사회 안에서의 '표면적 다수'일 뿐이고, 성소수자가 그 단어처럼 정말 수(數)적으로 소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건 가시화의 여부이지 그 집단의 숫자가 아니다.

지금 성소수자의 존재가 얼마나 금기시되고 비가시화, 왜곡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성소수자는 지금보다 더 많이 이야기되어 표면으로 나와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도 그런 방식으로 극복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소수자도 거리로 나와야 한다.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데 그걸 부정하는 것,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 누구에게나 귀중한 정체성을 당연하게 억누르고 살 것을 강요하는 그 모든 행태들에 저항해야 한다. 매체에서 동성애를 표현하고 말하는 것, 서울시청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여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성소수자는 '숨기는 게 당연한'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그:#퀴어, #성소수자, #동성애, #게이,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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