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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말]
'수배자' 아빠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난 아이. 이제 국가보안법은 엄마마저 감옥으로 잡아갔다.
 '수배자' 아빠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난 아이. 이제 국가보안법은 엄마마저 감옥으로 잡아갔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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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범민족대회'로 어린 나이에 구속되었던 윤기진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살고 출소해 얼마 안 되어 다시 국가보안법 수배자가 됐다. 1998년 겨울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김영삼 정권이 한총련을 이적규정한 후, 대학생들이 직접 선거로 뽑은 총학생회장이나 부총학생회장,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모조리 자연적으로 정치수배자가 돼야 했으니, 국가보안법은 1948년 제정 당시보다 더 광범위한 오·남용의 위세를 떨친 셈이다.

나는 스물이 갓 넘은 때로부터 '억수로' 관제수가 따라다니는 윤기진씨와 그의 수배 6년차에 결혼했다. 식장은 모교인 덕성여대였는데 검거를 피해 신랑을 예식 며칠 전에 가전제품 박스 속에 넣어 짐짝처럼 학내에 옮겨두고 식을 준비했다. 당일 수배자 신랑을 잡기 위해 학교 주변으로 병력이 배치됐다.

30년간 경찰 생활을 하셨던 친정아버지의 친구분이 하객들 차량을 검문검색하는 한편, 아버지 손을 잡고 축의금을 건네는 웃지 못할 풍경도 벌어졌다. 결혼식은 하객 천여 분이 찾아 성황리에 진행됐고, 예식 후 젊은 하객들이 변장한 신랑과 함께 멀리 지하철역까지 우르르 뛰어준 덕분에 그날 '독 안에 든 쥐'였던 정치수배자 '윤기진'은 무사히 결혼도 하고 검거를 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2004년 8월 첫째 딸 '민'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곁에 없지만 씩씩하게 초자연 분만을 하리라 결심한 나는 동네 조산원에서 출산을 준비했다. 조산원 선생님도 '아이가 좀 큰 편이긴 하지만 황선씨 골격이면 아무 문제 없다'며 용기를 주셨는데, 양수가 터지고 진통 24시간이 지나도록 자궁문은 3cm밖에 열리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던 태아는 결국 배 속에서 태변을 보고야 말았다. 아이의 심박이 불규칙해지고 산모도 열이 오르는 상태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옮겨 급히 제왕절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진통하는 내내 이곳저곳 공중전화를 옮겨 다니며 전화를 했다. 휴대폰도 없고, (경찰에게 추적당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곳에서 전화를 오래 쓸 수도 없었으니 우리의 통화는 늘 초간단이었다. 이 복잡한 출산과정을 전달할 여유도 기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없는 목소리로 "아직이야…"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수배자' 남편 없이 출산과 육아... "아빠"를 먼저 부른 아이

수술 직전 대기실에 누워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께서 분만실 문을 두드려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며 '한 통화만 할 수 없냐'고 통사정을 하셨다. 간호사는 전자기기는 들여올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이 아빠예요. 잠깐만 받을게요. 수배자라 못 오거든요"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치다. 얼결에 전화를 넘겨받아, '이제 곧 낳을 것 같다'고 말하고 끊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산모 목소리가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고 자꾸만 물었다 하는데, 입덧이든, 진통이든, 하다못해 초음파 (사진)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이 '24시간 진통'이라는 진 빠지는 과정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여튼 수배자 아버지인 그도 나름 발을 동동 구르며 8월 무더위 속에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개 대학 학생회실에 들어가, 인터넷에 올려진 아이 사진으로 자신의 딸 '민'이를 처음 대면했다. 후에 만났을 때 그는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아기 사진을 출력해서 품고 다니고 있었다.

남편 없이 출산을 겪는 것도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몸조리와 육아는 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내 몸이 힘들고 피곤하고 감정적으로 서러워지는 순간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아기가 커가며 하루하루 새로울 때, 그 감격의 순간을 아이 아버지랑 나눌 수 없어서 답답한 순간이 참 많았다. 민이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기여서 어느 날 택시기사 얼굴을 보고 울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 내내 낯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수배자 아버지를 만날 일이 걱정이었다. 한 번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숨어 만나는 자리에서 내내 울면 그 무슨 낭팬가. 보안도 보안이지만 아버지를 보고 울기만 하면 그 사람 마음은 또 얼마나 찢어질까 싶었다. 그래서 다른 엄마들이 흑백 모빌이다, 그림책이다, 아이들 눈앞에 들이대는 시기, 나는 아이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며 습관적으로 "아빠" "아빠" 했다. 그 조기교육 때문인지 아이들이 모든 말 중에 '엄마' '맘마'란 말을 가장 처음 발음할 때, 우리 민이는 '아빠'를 먼저 했다. 다음은 당시 쓴 시이다.

육아일기

우리 아이 민이가
얼마 전부터는 목에 힘을 주더니
곧추 세워서만 안아달랍니다.
세워 안아 주면
그 눈에 뭐가 보이는지
머리를 이쪽저쪽 돌리며
세상구경에 바쁩니다.
누워서도 머리를 얼마나 어지럽게 돌렸는지
고 짧은 뒷머리가 푸시시해지고
밥풀 붙은 듯 꽁꽁 엉켰습니다.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엄마 얼굴, 할머니 얼굴, 할아버지 얼굴
누구의 얼굴이라도 발견하면
어디서 배웠을까,
해님처럼 웃습니다. 활짝
그러나 
사람 반가워하는 고 눈에
아빠는 없습니다.
민이가 새로운 재롱을 할 때면
민이 아빠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냉큼 안고가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아빠는 요 작은 딸아이를
얼마나 이뻐할까 생각합니다.

민이가 사진을 볼만해지면
아빠사진을 매일 보여줘야지
하필 아빠보고 낯가림하지 않도록
그래야지, 생각하다가
아, 그만큼 크기 전에 우리,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의 육아일기는 또다시
국가보안법 철폐!
국가보안법 철폐!
국가보안법 철폐!
입니다.
(2004. 9.)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옥중편지 여섯 번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옥중편지 여섯 번째
ⓒ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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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 

검사는 공소장에 이 시 중 마지막 연 "그래서 나의 육아일기는 또 다시/ 국가보안법 철폐!/ 국가보안법 철페!/ 국가보안법 철폐!/ 입니다"만을 뽑아 적시하는 한편, <국가보안법을 만드신 분들>이라는 또 한 편의 시와 연계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가운데,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배반자, 반공·친미파로 극렬 매도하는 등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며 이를 선동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로써 피고인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할 목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제작·판매하였다.

1948년 단독선거 강행에 이어 남북 각각에서 정부가 수립되자, 이대로 분단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의 근심은 깊어갔다. 그러나 단독선거를 강행한 집권세력은 이런 국민의 우려가 달갑지 않았다. 분단고착화를 우려하는 자체로 반정부적이고 내란음모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1948년 11월 9일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는 본회의에 '국가보안법' 제정안을 제출한다. 아직 '형법'도 마련하지 못한 시기였다. 숱한 반발을 진압하고 우격다짐 식으로 단선단정(단독선거 단독정부)을 강행했으나 국민들의 열망은 여전히 친일청산이라는 과거사 문제에 닿아 있었다.

해방된 다음 달로 점령주둔을 시작한 미군정에서 친일파의 재산이며 법적지위까지도 보장하는 한편, 심지어 일제시대 조선인 통제를 위한 정치집회 금지법, 선동문서 통제령, 치안유지법 등도 미군정 내내 유지했다.

그로써 '해방'이 곧 '자주독립'이라는 착각은 금물이라는 표시를 노골적으로 해왔음에도 '무식한' 조선인들은 포기를 모르고 친일의 기반 위에 선 이승만 정권에게조차 친일청산을 끝없이 요구한 것이다. 여론은 그래도 무서운 것이라, 내키지 않는 속에서도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설치되고야 말았다.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사권, 기소권, 재판권까지 지닌 특위의 출현은 친일의 과거를 친미와 반공의 가면으로 덮은 채 기득권을 유지하던 인사들에겐 몹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반미특위가 친일청산이라는 민심을 업고 혼란의 와중에도 태동할 수 있었다면, 이런 민심을 밟기 위해 일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칼이 '국가보안법'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시간이면 감옥에서 '108배'

당시 이 법안의 제출의도가 얼마나 뻔하고 노골적이었던지 <조선일보>조차 1948년 11월 14일자 사설에서 국가보안법을 두고 '크게 우려할 악법',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광범위하게 정치범 내지 사상범을 만들어 낼 성질의 법안인 점'에서 단호히 반대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또한 '형법과의 중복, 일제하 치안유지법처럼 다수의 사상범을 만들어낼 우려, 자의적 해석에 의한 오·남용 가능성'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우려했다.

나름 절박한 심정으로 이 법의 통과를 밀어붙였을 당시 법무부 장관도 국회에서 법률로서의 부족점과 여론의 불리함을 인식하고 "평화 시기의 법안은 아니며, 비상시기의 비상조처"라는 말로 이 법이 한시적인 법임을 인정했다. 1953년에는 여전한 비상시기였음에도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은 '형법을 가지고 국가보안법의 체벌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밝히며 보안법 폐지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이후, 70년이 다 되도록 국가보안법은 여전하다. 정통성에 자격지심이 심한 정권일수록 이 법을 더 많이 휘두르며,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국가안보라는 말 뒤로 숨겨왔다. 국가보안법이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잣대이긴 했으나, 오히려 명확하게 반대로 위법의 자리에 애국, 정의, 양심, 민주, 인권을 세우는 특이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법은 나라 안팎에서 반인권 악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으로 해마다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검사가 문제 삼고 있는 또 하나의 시 <국가보안법을 만드신 분들> 전문을 보자.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보안법 제작자 중 그것이 애국인 줄 알고 했다는 분들이 몇몇 있었다 한들, 이 시가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주장만큼은 100% 망상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만드신 분들

일제 36년간 꿈에라도
조선을 조국으로
여겨본 적 없으신 분

백년 후엔들
조선의 독립은 없어야 할 일
그거야말로
홍역 마마보다 두려웠을 분

혹시라도 독도는 우리 땅
아우성 소리 한 번 들으면
독도가 다 무어냐
내선일체 내선일체, 호통을 칠
교육 너무 잘 받으신 분

무질서한 야만조선의 안보와 치안유지는
제국의 치안유지법이 다했노라고
그 법이 잡아가둔 독립군은
모조리 불온한 공산비적이요
산적이요 화적떼라고
무식한 말씀 자랑처럼 하시던 분

친일배족의 훈장이
대를 이어 빛날 수 있게
구사일생 구원해 주신
아메리카와 이승만 각하가
두고두고 고마우신 분

보안법 덕분에
어리석은 백성들
속여먹고 등쳐먹고
여차하면 북망산골짜기로
밀어 넣어도 일 없고
얼씨구 절씨구
또 한 세월 영화로다
48년 12월 1일이 광복보다 좋았을 분

생각할수록 몹쓸 분
괘씸한 인종
역사의 쓰레기들
(2004. 9. 18.)

아버지를 국가보안법에 뺏긴 채 영유아기를 보내야 했던 딸들은 이 3월 초등학교 5학년, 4학년이 되었다. 그 딸들의 새 학년 책가방을 챙겨주지도, 머리를 빗겨주지도 못한 채, 이 어미는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시간이 되면 미안함과 간절함을 담아 감옥에서 108배를 한다. 아직도 나의 육아일기는 '국가보안법 철폐!'이다.

2015. 3. 15. 황선


태그:#국가보안법, #양심수,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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