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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말]
황선씨가 남편 윤기진씨에게 보낸 편지.
 황선씨가 남편 윤기진씨에게 보낸 편지.
ⓒ 윤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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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미 선생님과 진행한 통일콘서트로 결국 구속이 되었다. 세 번째다. 일부 종편이 토크쇼에서 나오지도 않은 어휘를 선정적으로 반복해서 떠들다보니, 어느새 평화로운 토크쇼 자리는 내란모의처라도 되는 양 여겨졌다. 종편과 공안기관의 종북 수선은 그 모두를 믿은 청소년의 사제폭탄테러를 낳았고 두 아이를 엄마로부터 유기시키는 최악의 아동학대로 비화됐으며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국가보안법의 문제점과 한국사회 표현의 자유의 한계성을 각인시켰다.

누구나 구속영장 청구 자체가 무리하다고 했음에도 영장청구는 강행되었고 나는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다시 법정에 섰다. 간단하게 진행되고 간단하게 기각될 것이라 생각했던 실질심사는 네 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다.

그 중 정작 이 사단의 핵심인 토크콘서트에 대한 질문은 10%도 차지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판사와 검사는, 10년 전, 혹은 그 이상 된 시를 문제 삼거나, 내가 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읽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지조차 하지 않은 문서들을 밑줄 그어가며 추궁했다. 이미 '구속'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진행 중인 티가 완연했다. 오죽 '구속'하고 싶으면, 이렇게까지 골몰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승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심사 아닌 심사 중 판사로부터 들은 가장 기가 막힌 질문은 내 시 '이제는 4.3을!'의 시구와 관련된 질타였다. 2015년 1월 13일 윤강열 판사는 다음 시 중 '인민위원회 깃발'을 문제 삼았다.

이제는 4.3을!

48년 봄
유린되는 강토, 나눠지는 조국
산 자의 의리로는 못 참는다.
숱한 오름처럼, 웅장한 한라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이미 죽음을 넘어선 듯이

이제는 해방이다
내 세상이다.
콧노래 흥흥거리며 한라에서 백두까지
골골마다 치켜든 인민위원회 깃발
그 깃발을 짓밟으며
다시 노예가 되라했다.
꼭두각시 꼰대 모시고
일본대신 미국 섬겨 바치며
그렇게 죽으라했다.

예전에 예전에 있었던 일
지나간 전설처럼 회상할 일 아니라고
나라가 동강나면
식민지로 몰락하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인간답다고
지금도 제주는 술렁인다.
물 맑고 사람들 눈이 순하다해서
피 빛 원한을 잊은 게 아니다.
세월이 흘렀다고 쥐었던 주먹
놓았던 일 없었다.

그러나 이제 4.3도 끝나리라.
백년을 이어온 해방전쟁도
이제는 승리하리라.
오늘도 항쟁은 유채꽃처럼 선명하다
성산포 앞바다처럼 서슬 푸르다.
잘 싸우라.
한라여, 독도여, 백두여,
삼천리 아름다운 조선의 산하여!

2005. 4. 3.

윤강열 판사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골골마다 치켜든 인민위원회 깃발" 부분을 확대해서 화면에 비추며 눈빛에까지 너무 노골적이고 심한 표현 아니냐는 감정을 듬뿍 담아 나를 추궁했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당황했다. 이것도 뻔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꼭두각시 꼰대'가 누구냐?"는 질문이었다면 그래도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건국의 아버지인가, 사기꾼인가. 단선단정을 강행했던 그 정신이 헌법정신인가, 그의 부정부패를 심판한 4.19 정신이 헌법정신인가는, 법정이 그 무대가 되는 것은 역시 야만적이나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해방기 "인민위원회" 언급에, 그래도 이 사회에서 배움의 끝을 경험한 율사들이 그토록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인민위원회가 무엇인가. 38선 이북의 조직인가. 이런 생각에 앞서, 이완용도 즐겨 썼던 '인민'이라는 단어가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어렵사리. "여운형 선생님 아시죠?"를 묻고. "해방과 동시에 우리 민족은 전국적으로 이념과 상관없이 지역마다 자치기구를 내왔습니다. 제가 시에서 언급한 인민위원회는 45년 해방 직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자생적으로 세워낸 자치조직을 말 합니다"라 답했다.

김구 선생님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은 어떤 존재였을까

황선씨가 남편 윤기진씨에게 보낸 편지
 황선씨가 남편 윤기진씨에게 보낸 편지
ⓒ 윤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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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선생님을 위원장으로 하여 해방과 동시에 친일청산, 민생치안, 독립국의 정규군대 편성문제 등을 해내외에 밝히면서 정권인수 작업을 발 빠르게 준비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의도는 미처 간파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국민들은 38선에 연연하지 않고 북으로는 회령, 남으로는 제주에 이르도록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와 마찬가지인 인민위원회를 앞 다투어 설치한다.

해방 직후, 자주독립국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국민 (당시 말로 '인민')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945년 8월 말, 전국에 걸쳐 145개의 인민위원회 깃발이 나부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자주독립국을 향한 기대로 중앙조직과 지역별 조직이 빠른 속도로 마련되고 좌우익 인사가 고루 참여했다.

이후 해방기 민중의 열망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이러한 시도는 내외의 분열공작과 주도권 싸움 등으로 초기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그 꿈은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수립설이 외신을 통해서 전해지고 난 후, 격렬한 단독선거 반대 여론과 시위로 나타나고 38선 양쪽에 각각 정부가 선 이후, 전쟁과 휴전으로 이어진 오늘까지 분단 극복 통일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48년 4.3 항쟁에 나선 제주도민에게,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동포에게 발포 할 수 없다며 항명의 죄를 저지른 여수순천의 군사반란 주인공들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은 어떤 존재였을까? 역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어 대동강 쑥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마주앉아 "자주독립이 있고서야 좌도 있고 우도 있다" 하시던 48년 4월. 김구 선생님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 격렬했으나 좌절 또한 컸던 해방기, 해방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4.3을 기리를 시를 이해할 길은 난망하다. 제주도 4.3 평화공원에 7박 8일을 머물러도 인민위원회나 4.3 항쟁의 주역들인 갑남을녀들 모두 무도한 빨갱이 이상이 아닌 것이다.

검사는 영장청구서류에 위 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제는 4.3을!> 제목의 시는 1948년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공산무장폭도들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여 일으킨 무장폭동 사태를 왜곡 날조하면서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이고,"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제주도민에게 공식사과 한 4.3, 해마다 민관이 합동추모행사를 진행하고 4.3 평화공원이 버젓한데도. 아직 이 나라는 해방기, 우리 민중이 품었던 당연한 열망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법의 제단 위로 멱살 잡아 끌고 다닌다.

격동의 해방기, 당시를 살았던 선열들의 지사적 고민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역사를, 사회를, 문학을 법정에까지 끌고 가서 논한다는 것, 우리 시대의 비극 중 비극이다.

2015.1.22. 황선


태그:#토크콘서트, #재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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