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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도시의 산업화는 도시 풍경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은 발전이자 동시에 퇴보이기도 하였다. 국가 경제 구조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 구조에 편승하기 위해 시골과 해외에서 수많은 이주민이 도시로 몰려왔다. 몰려오는 이주민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심각한 주택난을 겪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곳곳에 세워진 공장으로 도시 환경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산업화로 급격한 변화를 맞은 유럽 도시 전문가들의 대응

베를린 모아빗(Moabit)에 위치한 아에게 터빈 공장(AEG Turbinenfabrik)
 베를린 모아빗(Moabit)에 위치한 아에게 터빈 공장(AEG Turbinenfabrik)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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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도 그런 도시 중 한 곳이었다. 1862년 수년간의 작업 끝에 제임스 호브레히트 (James Hobrecht, 1825~1902년)라는 젊은 도시 계획가이자 엔지니어는 현재 베를린의 도시 구조를 만든 호브레히트 계획 (Hobrecht-plan)을 수립한다.

도시에서 일하기 위해 몰려든 이주민들로 인한 주택난을 좀 더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추후 효율적으로 도시 확장을 유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의 거주 환경을 보장하는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 기초를 세우려는 규제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정교하지 못했고, 빈틈을 파고든 부동산 업자의 열악한 주택 공급을 제지할 수 없었다. 당시 이 계획을 바탕으로 도심 외곽지역에 공급되기 시작한 주택들은 독일제국(1871~1918년)의 창건 시기(Gründerzeit)에 지어진 주택이라 하여, 창건 시기 건물 (Gründerzeit-Gebäude)이라고 불린다.

당시에는 도심 외곽이었지만, 도시가 더욱 확장함에 따라 이제는 링반(Ring-Bahn, 링 형태로 베를린을 순환하는 지하철) 내부의 도심 지역으로 분류된다. 창건 시기 주택이 온전히 잘 남아있는 구역을 키츠(Kiez)라고 부른다.

지어질 당시 규제의 빈틈을 파고들어 최대 밀도로 지어진 데다 몰려드는 이주민으로 한 세대를 위한 집에 수 세대가 함께 사는 등 최악의 거주 환경의 표상이었던 창건시기 주택들. 전쟁 이후에야 건물 밀도가 적정한 수준으로 개선되고 인구 또한 줄어들어 적절한 거주 환경이 갖춰졌다. 그 결과 지금은 오히려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거 지역이 되었다.

파리 대개조가 만들어낸 파리의 거리와 건물 풍경
 파리 대개조가 만들어낸 파리의 거리와 건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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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오스만 남작(Baron Haussmann, 1809~1891년) 지휘 아래 파리 대개조가 시작되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이어진 재개발은 지금 파리의 도시 구조를 만든 초대형 사업이었다. 유럽의 두 강대국 수도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의 도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산업화라는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인구 구조 그리고 도시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다.

물론 두 개발에는 차이가 있는데, 파리의 도시 재개조 사업은 노골적인 정치성을 띤 것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인구가 늘고 도시 환경이 악화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도, 경제적 공황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시민 사회와 정치권을 통제하려던 당시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1898년 프랑스 리옹의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 1869~1948년)는 3만5000명의 주민을 수용하고 동시에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산업 도시 (Cite Industrielle)' 계획을 제안하며 로마 대상을 받는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04년에 산업 도시 계획의 세부안을 완성 시킨다.

공원을 중심으로 사진 좌측으로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년)가 설계한 주택이 있고, 사진 우측으로는 건축가 휴고 헤링(Hugo Haring, 1882~1958년)이 설계한 주택이 있다. 같은 주택 단지이지만 건축가의 특성에 따라 주택의 재료, 형태 등이 제각각이다.
▲ 지멘스 슈타트(Siemensstadt) 공원을 중심으로 사진 좌측으로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년)가 설계한 주택이 있고, 사진 우측으로는 건축가 휴고 헤링(Hugo Haring, 1882~1958년)이 설계한 주택이 있다. 같은 주택 단지이지만 건축가의 특성에 따라 주택의 재료, 형태 등이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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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베를린 시의 도시 개발 의원, 도시 계획가 그리고 건축가였던 마르틴 바그너(Martin Wagner, 1885~1957년)는 산업단지 근교의 주거지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 땅은 훗날 '지멘스 도시'라는 이름의 대형 주택 단지가 세워진 땅이었다.

이 또한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 베를린과 파리의 대규모 도시 개발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라는 변화를 조우한 건축가들의 새로운 이상향이었다. 산업화는 이처럼 여러 도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백년 넘게 터빈을 생산하고 있는 베를린의 공장

이제는 지멘스의 공장이지만 문화재 보호를 받고 있어, 처음 모습처럼  AEG의 과거 기업 로고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 아에게 공장의 모습 이제는 지멘스의 공장이지만 문화재 보호를 받고 있어, 처음 모습처럼 AEG의 과거 기업 로고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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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도심에는 여전히 많은 공장이 남아있다. 폐쇄된 곳도 많지만, 크고 작은 공장이 도시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베를린 모아빗 지역에는 아에게(AEG)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년)가 설계한 아에게 터빈 공장이 남아있다. 1909년에 완공된 이 공장은 베를린의 건축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양 건축사 시간에도 자주 등장하는 의미 있는 건축이다.

1956년까지 두 번의 전쟁을 운 좋게 견뎌낸 공장은 문화재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1969년부터 지멘스(Siemens)와 함께 운영되던 공장은 1977년 지멘스가 완전히 인수하게 된다. 다음해 대대적인 공장 보수 공사를 해 20세기 초 급격한 산업혁명을 일구어낸 그 모습도 유지하고, 여전히 터빈을 만드는 기능도 유지한 공장이 되었다.

공장 내부의 홀이 마치 성당을 보는 듯 크고 아름답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건축적 가치가 훌륭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약 3500명의 직원이 교대로 일하며 터빈을 생산하는 일터로서의  가치도 크다. 이곳에서 생산된 터빈은 전 세계로 수출된다. 최근 유행처럼 세계 각국의 산업 유산이 갤러리 등의 문화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지만, 베를린 도심 속 공장은 묵묵히 최대 440톤의 거대한 터빈을 조립하는 공장으로 남아있다.

1904년 마틴 바그너가 주택 개발을 추진했던 부지가 실제로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1929년 마틴 바그너의 총괄 지휘하고, 훗날 분단된 베를린의 도시 개발을 주도했던 건축가 한스 샤로운이 단지 계획을 맡았다(관련기사: '찢긴 베를린 놓고 벌인 동·서독 자존심 싸움').

북쪽으로는 시민 공원, 남쪽으로는 슈프레 강, 서쪽으로는 지멘스의 산업단지 (Siemenswerke) 그리고 동쪽으로는 주말농장 구역(Kleingartenkolonien)이 위치한 장소 사이에 자리 잡게 될 주택 단지였다. 햔스 샤로운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 등,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년) 유명 건축가들이 개별 주택 건축을 설계하였다.

전후 건축가들은 창건 시기의 밀집된 형태의 주택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신 건축(Neues Bauen) 양식 주택을 설계하였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좁고 열악한 주거 환경의 창건 시기 주택이 아니었다. 유리, 철, 콘크리트, 벽돌 등의 새로운 소재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형태의 경제적인 주택이 설계되었다. 뛰어난 채광과 통풍 등, 그 전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새로운 건축이었다.

베를린 시는 새로 도입한 주택 저당 세금을 바탕으로 약 14만6000동의 공동 주택과 주택 단지를 건설하였다. 지멘스 슈타트도 그중 하나였다. 이 주택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새로 통과된 건축법을 바탕으로 지어진 사회 주택이다. 대량의 공공 주택 공급을 통해 주거난을 해소하고 저렴한 월세로 주거 안정화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정부의 주도로 지어진 주택의 규모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 당시에도 따라잡지 못할 수준의 양이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주택 단지인 칼 레기엔(건설 시기 1928~1930년)의 모습. 베를린 주택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80~1938년)가 설계한 단지로 유명하다.
▲ 주거 도시 칼 레기엔 (Wohnstadt Carl Legien)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주택 단지인 칼 레기엔(건설 시기 1928~1930년)의 모습. 베를린 주택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80~1938년)가 설계한 단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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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부터 1931년까지 지어진 이 주택들은 주로 도심 외곽에 있다. 그로 인해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피해가 작았고, 잘 보존된 주택 중 6개의 주택 단지가 200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다. 단순히 양적 수준이 높은 공급이 아니라, 유명 건축가들을 총동원할 정도로 질적 수준이 높은 주택 공급이었다.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주택 단지들의 유산 등재 기준은 다음과 같다.

"베를린에 있는 주택 단지 6개는 베를린의 주택·생활환경 향상에 크게 이바지한 대규모 주택 개혁 운동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 발달한 이러한 도시·건축·공원 설계는 주택 건축 표준과 더불어, 이후 독일 안팎에서 지어진 사회 주택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주택 단지 6개는 사회적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도시·건축 형태의 탁월한 사례이다. 설계·건축에 참여한 선도적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새로운 설계 디자인과 기술적·미학적 혁신을 이 주택 단지 건설에 적용하였다."

과거의 교훈을 잊은 베를린

마르틴 바그너의 지휘 아래 스위스 건축가인 오토 루돌프 잘비스베르크(Otto Rudolf Salvisberg, 1882~1940년)이 설계하여 1931년 완공된 주택 단지이다. 이 주택 단지의 다수의 주택도 국제 부동산 회사인 아켈리우스(Akelius)에게 판매되었다. 아켈리우스 관련해서는 이전 기사 ‘월세방에서도 쫓겨나는 노인들... 이래서야 되겠나’ 참조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주택 단지인 백색 도시 (Weiße Stadt) 마르틴 바그너의 지휘 아래 스위스 건축가인 오토 루돌프 잘비스베르크(Otto Rudolf Salvisberg, 1882~1940년)이 설계하여 1931년 완공된 주택 단지이다. 이 주택 단지의 다수의 주택도 국제 부동산 회사인 아켈리우스(Akelius)에게 판매되었다. 아켈리우스 관련해서는 이전 기사 ‘월세방에서도 쫓겨나는 노인들... 이래서야 되겠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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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가디언지>에 희극작가 이안 마틴(Ian Martin)이 기고한 기사 '죽음으로까지 사유화되고 있는 도시'에서 그는 최근 런던 시의 많은 부분이 사유화 되는 문제를 풍자한다. 기사의 배경은, 도시 전반에 걸친 사유화가 지금처럼 계속 진행된 2115년. 영국의 한 저명한 역사학자는 21세기를 공부하며 '어떻게 저소득층이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어떻게 사람들이 도시의 사유화에 의해 서서히 죽어갔는지'를 관찰한다. 또한, 그 역사학자는 '왜 사람들이 도시의 공공재가 사유화되는 상황을 참았는지' 궁금해할 것이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도시는 흔히 살아 숨 쉬는 역사책으로 비유된다. 이번 기사에서 등장한 수많은 장소와 인물들은 베를린이라는 도시로 기록되어 있다. 오래된 과거의 도시 유산뿐만 아니라 불과 100여 년 전 처음 산업화를 맞이했던 시대의 공장이 아직도 운영 중이다.

산업화의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한 도시 개발의 흔적이 키츠, 도로, 거리 그리고 창건시대 주택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이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새로운 주거 문화와 올바른 주택 정책을 세우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들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를린 시는 불과 100년 전 바이마르 공화국이 새로 법을 지정해 가면서 어려운 시민들을 위한 저렴한 월세의 사회 주택 공급으로 주거 안정화를 이루었던 것을 잊어버린 듯싶다.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공 주택은 계속해서 부동산 회사에 매각되고 있다.

심지어 유네스코에 지정된 주택들도 개인과 부동산 회사에 매각하고 있다. 적정한 수준의 월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민간에게 위임한 채로, 월세 안정시키기 위해 내놓은 월세 제동(Mietpreisbremse) 법은 여전히 빈틈투성이이다. 이 모습들은 과연 어떻게 기록이 되고, 100년 뒤 어떻게 연구될까?

베를린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어떤 것들이 기록되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한국의 역사학자가 서울을 공부할 때, 과연 서울이라는 도시의 어떤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어떤 의문을 가지게 될까? 모두 한 번씩 질문을 던져볼 때다.

* 베를린 소개서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미처 다 싣지 못한 최근 베를린 소식과 베를린 사진들을 공유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독일의 월세 제동법은 새로운 임대 계약 작성 시 월세 상승률을 주변 시세의 10%를 초과하지 못하게 함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세입자 및 지역 보호 정책이지만, 보호되지 않는 예외적인 사항이 많아 관련 전문가들은 대부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태그:#독일, #베를린, #도시, #건축,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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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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