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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하얀 건물들이 도청 시설의 일부이다.
▲ 악마의 산 모습 멀리 보이는 하얀 건물들이 도청 시설의 일부이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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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등 유럽 내륙의 대도시들은 서울과 비교했을 때 거의 평지나 다름 없는 지형에 위치해 있다. 물론 그 도시들에도 가파른 언덕과 도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유럽 내륙의 대도시와 서울이라는 도시를 비교할 때, 서울이 우위인 조건은 내사산과 외사산 그리고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과 작은 개천들이 만들어내는 지형에 있다.

심심한 평지에 위치해 있던 베를린에는 2차세계대전 이후 갑작스럽게 여러 언덕들이 생겨났다. 2차세계대전이라는 단서를 통해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언덕들은 전후 무너진 건물 등의 잔해물로 만든 산(Trümmerberg)이다.

베를린에는 언덕이 60여 곳 있는데, 그 중 18곳이 전쟁 폐기물로 만들어진 인공 언덕이다. 60여 곳의 언덕들은 가장 낮은 51.9m의 언덕부터 가장 높은 120.1m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또 전쟁 폐기물이 아닌 서울 난지도 같이 쓰레기장 위에 만들어진 언덕도 5곳 가량 있다.

18곳의 잔해물 산 중에 120.1m의 높이의 '악마의 산(Teufelsberg)'이라는 언덕이 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지역 여성들이 매일 트럭 80여 대 분량의 전쟁 폐기물을 수집해 만들어낸 가장 높고 거대한 언덕이다.

냉전시대 당시 미국의 도·감청 시설이 있었던 곳

도청 시설 일대의 모습
 도청 시설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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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은 자국민 인터넷 검열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도청·감청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는 독일 메르켈 총리의 핸드폰도 도청 당해 독일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십 년 전 이 언덕에는 냉전시대 당시 미국의 도·감청 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은 평범한 수준의 도·감청 시설이 아니었다. 바로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전 세계를 감시하던 에셸론(Echelon)이라는 스파이 네트워크의 일부로 운영된 극비 시설이었다.

1991년 독일 통일 이후, 미군의 도청기지도 철거됐다. 독일 정부는 약 4만7000㎡에 달하는 부지와 건물을 1999년까지 민간항공기 감시용 레이더 시설로 활용했다. 그 이후 한 쾰른(Köln) 기반의 투자회사에 약 5백만 마르크(현재 가치로 약 46억 원)에 팔렸다. 투자회사는 고급 주택, 호텔, 스파이 박물관, 레스토랑 등에 대한 개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환경보호 운동가들의 대규모 반대 그리고 공사 지연과 공사 비용 증가로 인해 회사는 파산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개발 계획은 백지화됐다.

그래피티 예술가들의 예술 작업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건물 내부 그래피티 예술가들의 예술 작업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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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회사를 대신해 베를린 정부가 지역 일대의 경비를 담당했다. 하지만 2003년 예산 문제로 경비 인력은 감축됐다. 지난 2011년 정식 가이드 투어가 시작되며 감시가 늘기 전까지 하나의 성지처럼 많은 베를리너의 새벽 관광지이자 파티 장소가 됐다.

TV타워 등의 인공 건조물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장소에서 베를린과 자연보호 구역 중 하나인 그뤼네 발트(Grüne Wald)의 오묘한 풍경을 바라보는 매력과 아무도 몰래 새벽에 랜턴과 손전등을 들고 방치된 도청 시설을 올라 맥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아슬아슬한 파티를 즐기는 짜릿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경비원을 만나도 뒷돈을 찔러주면 그만이었다고 한다.

과거 모험을 해야 방문할 수 있었던 악마의 산

도청 시설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도청 시설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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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가이드 투어가 시작되면서 이곳에 대한 경비가 좀 더 삼엄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새벽에 몰래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7유로를 주면 매일 오후 2시에 있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경비원과 마주칠 걱정 없이 편안히 둘러볼 수 있게 됐다.

얼마 전 베를린 정부가 다시 땅을 사들인다는 소식이 들렸다. 무려 1500만 유로(약 200억 원)에 말이다. 게다가 이 땅에 묶여 있는 모기지만해도 3500만 유로(약 470억 원)에 달한다. 실제 이 땅은 숲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신규 건축이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실제 땅의 가치는 약 300만 유로(약 40억 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시정부가 제시한 금액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용산 (Drachenberg)의 모습
 용산 (Drachenberg)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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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산은 예전에는 모험을 해야만 방문할 수 있었던 꼭꼭 숨겨진 장소였다. 이제는 누구나 돈을 내면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간혹 개방 행사가 있을 때 무료 입장을 할 수도 있다.

악마의 산과 도청 시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신선한 모습이지만, 좀 더 시간적 여유를 즐기며 베를린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악마의 산 바로 옆에 위치한 용산(龍山, Drachenberg)이다. 서울 풍경을 둘러볼 수 있는 남산타워(정식명: N서울타워)가 있는 남산과 용산구의 관계처럼 서로 가깝게 붙어 있다.

역시나 전쟁 폐기물로 만들어진 언덕인 용산은 철조망도 없고 언제나 개방되어있는 시민 공원의 일부다. 그러나 악마의 산에서는 볼 수 있는 소도시 그뤼네 발트를 용산에서는 온전히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놀라운 풍경을 선사해주는 장소이기에, 악마의 산 입장료 대신 맥주와 안주를 가득 사들고 용산을 찾아도 분명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현대 독일의 역사·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장소

1937년, 악마의 산과 용산이 자리 잡은 이 지역에선 나치 시절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알버트 슈페어(Albert Speer)가 수립한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계획에 의해 군사학교의 첫 번째 건물이 건설되고 있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군사학교 개발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첫 건물의 구조 일부만 세운 채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 후 그 구조물은 잔해물 산 아래 함께 파묻혀 버렸다고 전해진다.

나치 정권의 거대한 계획 아래 위대한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장소는 전쟁의 아픔이 담긴 폐기물로 만든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언덕은 연합군의 도청기지로 이용 되었고, 통일 이후 부동산 회사에 팔린 채 여러 베를리너들의 비밀스러운 파티장이자 탐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 근현대 독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장소가 됐다.

도심에서는 비교적 멀리 떨어진 숲 속의 언덕에 얽힌 역사조차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앞으로 '베를린 소개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도시라는 공간이 수많은 사람, 문화, 역사 그리고 기억 등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다. 이제부터 베를린이라는 도시 공간 그리고 베를린이라는 특정 장소를 떠나서 '도시'라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곳인지 그리고 그런 다양함과 복잡함이 도시를 어떻게 흥미롭게 만드는지 소개하려 한다.

* 악마의 산 가이드 투어 관련 웹사이트(영문)


태그:#독일, #베를린, #악마의산, #용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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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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