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월 11일부터 23일까지 13일간 가족과 함께 휴가차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가 이끌고 부모가 따라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아이가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이 보여 뿌듯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베트남 여행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들려드리려 합니다. - 기자 말

수도 하노이의 실질적인 랜드마크다. 점심시간(11시~2시)에 촬영한 것으로, 관람 시간 같았으면 경비병이 근무교대하고 있는 입구에서부터 왼편으로 족히 수백 미터의 대기 줄이 서게 된다.
▲ 바딘 광장에서 바라본 호치민 묘 수도 하노이의 실질적인 랜드마크다. 점심시간(11시~2시)에 촬영한 것으로, 관람 시간 같았으면 경비병이 근무교대하고 있는 입구에서부터 왼편으로 족히 수백 미터의 대기 줄이 서게 된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호치민 묘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입구가 번잡한 탓인지, 택시 기사가 호치민 묘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려주며 걸어가라고 손짓한다. 나름 서둘렀는데도 입구에 서 있는 줄이 족히 200미터는 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와 기다렸나 싶을 정도다. 왜 이곳을 내·외국인을 떠나 하노이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맨 먼저 찾게 되는 필수 코스로 손꼽았는지 알 만하다.

이곳은 오전 8시에 문을 열지만 11시에 잠시 닫는다. 점심시간 즈음 두 시간여 동안 개방하지 않고 오후 4시에 문을 닫는다. 때문에 하루 중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시간에 불과하다. 계절에 따라 개방시간에 변동이 있으며, 국경일은 물론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은 휴관이다. 여행 일정을 나름 치밀하게 짜지 않으면 호치민을 만나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호치민 묘가 우뚝 서 있는 바딘 광장 주변은, 1945년 최초로 독립을 선언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에 더해 그의 생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하자면 '호치민 테마 파크'다. 유해가 안장된 묘를 비롯해 그가 살던 집과 외국 사절단을 맞은 주석궁이 '세트 메뉴'처럼 줄지어 있고, 그가 타던 자동차와 침대, 책상, 문구류까지 옛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 호치민이 걷던 길이 아닐까 착각하게 될 정도다.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묘 안팎은 경비가 숨 막힐 정도로 삼엄하다. 붉은 색 카펫이 깔린 입구 계단을 돌아 오르면 어둑한 실내에 방부 처리된 호치민의 유해가 누워 있다. 반바지나 슬리퍼 차림은 말할 것도 없고, 선글라스를 낀 채 들어갈 수도 없다. 곳곳의 경비병들이 관람객들의 복장과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검열하는 건,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앞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경건함을 보이라는 뜻이다.

이층으로 된 낡은 목조가옥이다. 이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냈으며, 베트남 전쟁을 진두 지휘했다. 묘와 더불어 '호치민 테마 파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 호치민의 옛 집 이층으로 된 낡은 목조가옥이다. 이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냈으며, 베트남 전쟁을 진두 지휘했다. 묘와 더불어 '호치민 테마 파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광장을 가로지를 만큼 줄은 길지만 대기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유리관 속 유해를 멈춰 서서 오랫동안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은 입장 순서에 따라 물 흐르듯 'ㄷ'자 형태로 유해를 돌아 출구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나마 동선이 'ㅡ'자 형태가 아닌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관람객 모두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묘 내부에선 발자국 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얀 빛의 옅은 조명이 비추는 호치민은 오래전 죽은 게 아니라 마치 잠들어 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앉을 것 같은 생생한 모습에 섬뜩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잠깐 회피하게 된다. 몇몇 서양 관광객들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리기도 했다. 유해 곁에는 마치 순장된 사람들처럼 다섯 명의 경비병이 에워싸고 있는데,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이다.

베트남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호치민

매년 정부가 영구 보존을 위해 외국의 전문 기술자들을 초빙해 유해를 관리한다. 일설에는 호치민의 사례는 1976년 중국 마오쩌둥과 1994년 북한 김일성의 묘 조성과 유해 처리 모델이 됐다고 한다. 반세기 전에 숨진 그의 유해를 방부 처리하는 데만 매년 수십 만 달러가 소요된다고 하니, 베트남에서 호치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69년 호치민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거나 따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유해 때문에 단 한 푼의 세금도, 단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화장한 후 유해를 통일된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남부 지방에 나눠 뿌려달라고 호소했다.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웠으나 끝내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눈 감은 지도자다운 유언이었다.

1969년은 미국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다. '명령'은 거역했을지언정 멸사봉공의 삶을 산 그의 정신만은 죽어서도 후계자들에 의해 고스란히 지켜졌고, 베트남군의 사기 진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남베트남을 함락시키고 미군을 완전히 축출한 1975년이 되어서야, 그는 베트남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정치적 고향인 하노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언대로 유해를 태워 흩뿌리기에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남긴 그의 족적이 너무나 컸던 셈이다.

베트남 독립 직후 세워진 현대식 건물로, 외빈 방문 시 영접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을 뿐, 호치민은 이곳에서 거의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사치스럽다는 이유에서다.
▲ 베트남 주석궁 베트남 독립 직후 세워진 현대식 건물로, 외빈 방문 시 영접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을 뿐, 호치민은 이곳에서 거의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사치스럽다는 이유에서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죽은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의 '실질적인' 통치자다. 국민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일당제와 다당제 등에 대한 호불호로 갈등이 벌어질지언정 호치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변함없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 상점이나 작은 식당, 일반 가정집에서도 벽에 걸린 그의 초상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언뜻 신격화돼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파란만장한 호치민의 생애가 바로 베트남의 현대사, 나아가 그들이 기억하는 역사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묘 옆에 세워진 호치민 박물관이 곧 베트남 박물관이고, 활짝 웃고 있는 호치민의 얼굴은 사진으로, 그림으로, 조각으로, 자수로 되살아나 베트남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이 되어 있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여전히 호치민이 없는 베트남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묘에서 한 발짝만 나서도 그에 대한 숨 막힐 듯한 엄숙함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없다. 묘의 맨 위에는 베트남어로 '주석 호치민'이라고 적혀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누구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의 영원한 호칭은 '박 호'다. 우리말로 '호 아저씨'쯤 된다. 생전 격식을 따지지 않고 늘 국민들과 일상을 함께하고자 한 그의 삶에 걸맞은 애칭이다.

"우리도 이제부터 호치민 대신 '박 호'라고 부를까"

만약 장기간의 강압적인 독재로 인해 세뇌된 이미지라면 절대 남녀노소 누구나 그렇게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직함 대신 늘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온화한, 검소한, 헌신적인, 너그러운 등. 제국주의 국가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할 만큼 그 누구보다 치밀하고 냉철했으며 과감하고 단호했지만, 적어도 국민들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부드러운 지도자였던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극진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양인들조차 수백 미터 줄을 서서 호치민 묘를 참배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야. 호치민은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인 것 같아.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라잖아. 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베트남에 세워진 모든 박물관의 '표준'이다. 여느 박물관과 다른 점은 호치민의 행적과 베트남의 현대사를 미술관처럼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 호치민 박물관 베트남에 세워진 모든 박물관의 '표준'이다. 여느 박물관과 다른 점은 호치민의 행적과 베트남의 현대사를 미술관처럼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그럴듯한 아이의 비유다. 그의 말마따나 이름이 어떻게 활용되느냐 하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그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옛 이름은 사이공)의 이름이기도 하며, 최고 고액권인 5만 동부터 10종이 넘는 모든 베트남 화폐의 공통된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식민지 해방 운동 당시 쓴 이름인 '응우옌 아이꾸옥(阮愛國)'은 베트남 도시들의 대표적인 도로명이기도 하다.

듣자 하니 적잖은 베트남 사람들이 지금의 당 서기나 주석, 총리 등 정치지도자의 이름을 잘 모른다고 한다. 혹자는 그러한 정치적 무관심을 호치민의 '그늘'이라고 표현하는데,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구동성 모든 정치인들의 '유일한' 롤 모델이기 때문이다. '호치민'이 아니고서는 정치인의 길을 걸을 수 없다. 호치민의 삶은 모든 정치인의 다짐이자 목표인 셈이다.

누구나 베트남의 미래가 밝다고들 한다. 한 해에 쌀을 세 번까지 수확할 수 있는 기후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넓은 소비시장 등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심리적' 요인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호치민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다는 역사적 경험의 공유야말로 베트남의 미래를 이끄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자 남다른 저력이 아닐까.

"호치민이 남긴 말들을 마치 교과서처럼 외우고, 꼬맹이들조차 '박 호'라며 스스럼없이 부르는 모습이 우리에겐 참 낯설게 느껴져. 우리나라에선 교수님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갑질'을 해대는가 하면, 대통령님도 모자라 '각하'라는 극존칭까지 다시 등장하는 마당이니, 저런 지도자를 가진 베트남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외국인이지만, 우리도 이제부터 호치민 대신 '박 호'라고 부를까?"

아내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숨지지만, 그 후계자들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끝내 미군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수해낸다. 보응우옌잡 장군 등 당시의 지휘부가 모여 회의를 했던 곳이 하노이 고성 유적 내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회의를 내려다보듯 벽에는 호치민 사진이 걸려있다.
▲ 베트남 전쟁의 작전지휘본부 내부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숨지지만, 그 후계자들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끝내 미군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수해낸다. 보응우옌잡 장군 등 당시의 지휘부가 모여 회의를 했던 곳이 하노이 고성 유적 내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회의를 내려다보듯 벽에는 호치민 사진이 걸려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태그:#베트남 여행, #호치민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