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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1일부터 23일까지 13일간 가족과 함께 휴가차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가 이끌고 부모가 따라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아이가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이 보여 뿌듯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베트남 여행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들려드리려 합니다. - 기자말

이번 방학엔 베트남이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한 터다. 초등학교 취학 전 해부터 시작됐으니 이번 가족 여행이 꼭 여덟 번째다. 일본 오사카와 교토를 시작으로 중국, 타이완, 오키나와 등 주변 나라들은 얼추 다 다녀왔다.

여행 경비 중 거의 절반인 값비싼 항공료가 아까워 한 번 나갈 때마다 가능한 한 여정을 길게 잡는다. 직업이 교사인지라 대개 방학을 이용해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열흘 남짓이다. 언제 다시 가보겠느냐는 생각에 가급적 오래 머물면서 많이 보고 경험하겠다는 식이다. 몇 해 전 중국 청도, 서안 여행가서 아이가 아팠을 때를 제외하면, 서둘러 귀국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러다 보니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에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긴 유럽이나 미주가 아니면, 그렇게 긴 일정의 상품은 찾아볼 수도 없다. 항공권과 숙소 예약부터 시작해 전 일정을 스스로 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여행 경험이 쌓인 탓인지 언제부턴가 가족 모두가 그걸 즐기게 됐다. 이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괜한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하나 밝혀둬야겠다. 가족이 해마다 해외여행을 떠날 정도로 돈이 많냐고? 천만의 말씀. 물론, 크게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백 만 원 단위의 여행경비에 눈 깜짝 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집안도 못 된다. 고백하건대, 해마다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약속 뒤에는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포기하기 쉽지 않은 '기회비용'이 있다.

사교육 대신 여행,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훼에서 호이안 가는 침대버스 안에서도 그의 여행 준비는 계속된다. 여행 가이드북과 인터넷 자료가 모두 사실과 다르다며, 오류를 여러 개 찾아내기도 했다.
▲ 여행 관련 책자를 읽고 있는 아이의 모습 훼에서 호이안 가는 침대버스 안에서도 그의 여행 준비는 계속된다. 여행 가이드북과 인터넷 자료가 모두 사실과 다르다며, 오류를 여러 개 찾아내기도 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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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두 아이의 '사교육 포기'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원을 다니지 않는 대신, 여행 통장을 만들어 학원 수강료만큼 매월 차곡차곡 적립하자고 일찌감치 아이들과 '합의'했다. 휩쓸리듯 사교육을 받기보다 가족의 '추억 만들기'에 그 돈을 쓰자는 말에 모두 흔쾌해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학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학교 수업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라는 계산도 있었지만, 아이는 당장 공부를 덜 해도 된다는 생각에 내심 기쁘지 않았을까.

통장엔 여행 경비가 적금이 되어 쌓여 갔다. 매월 적립액은 언론 등을 통해 해마다 공지되는 가구당 사교육비 통계 수치를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다. 참고로 작년 여행 통장 적립액은 총 566만 원이었고, 올해는 총 636만 원으로 정했다. 정부 발표 2013년 가구당 월 사교육비 평균이 53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전년에 비해 70만 원이 늘어난 셈인데, 636만 원이면 우리 가족 네 명이 가까운 해외로 두 번은 다녀올 수 있는 목돈이다.

오래 전부터 아내와 난 사교육은 일단 한 번 발을 담그면 웬만해선 벗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여겨왔다. 공교육의 질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사교육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사교육을 거부하는 당장의 실천 없이 공교육의 질을 높이라는 외침은 공허하다고 반박해온 터다. 또 아이들이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이 가족 여행 통장을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따금 주위에선 그러다 아이가 중학교 올라가서 학업에 뒤처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걱정을 보내기도 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또래 친구들이 학원에서 영어, 수학 선행학습을 할 때, 보름 가까이 해외여행 다니는 게 한심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한다. 그렇듯 '불안해서' 시키는 공부는 별 효과도 없을 뿐더러, 부모들은 물론, 아이들의 맑은 영혼까지 파괴하는 행위라고.

흔히들 놀 친구가 없어서라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지만,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는 지금껏 '약속한 대로' 불평 한 마디 꺼낸 적 없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뭘 하든 혼자서도 잘 논다. 미행하듯 그의 일과를 따라가 보면, TV로 종일 축구 경기를 보는 등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없진 않지만, 다 컸구나 싶을 만큼 대견스러울 때가 더 많다.

아이는 이렇게 낙서(?)하며 논다. 사회과부도를 흉내낸 듯한데, 대체 어느 도시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 대체 어느 도시의 모습일까? 아이는 이렇게 낙서(?)하며 논다. 사회과부도를 흉내낸 듯한데, 대체 어느 도시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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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한 달 전쯤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그의 공책과 스케치북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도시의 도로망과 공항의 설계도를 꼼꼼히 그려놓는가 하면, 전 세계의 국가명과 수도, 그리고 면적과 인구 등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백 쪽도 넘는 분량이다. 여러 번 지운 흔적들로 보아 그걸 다 그리고 적자면 족히 몇 달은 걸렸음직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게 놀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조금 '이상하긴' 했다. 다른 아이들이 레고 블록을 조립하고 공룡 백과와 동식물도감을 읽으며 놀 때, 그는 생뚱맞게 '사회과부도'를 보고, 지구본을 돌리며 놀았다. 언젠가는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지도만 뚫어져라 보는 날도 있어, 저렇게 놔둬도 되나 싶어 아내와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집에만 오면 별 장난감도 없이 그렇듯 몇 년 동안 지도하고만 놀더니, 별의별 나라와 도시 이름, 쓸데없는 통계조차 다 기억하는 '지리 박사'가 됐다. 학원비로 해외여행 가자는 엄마, 아빠의 제안은 그의 유별난 지도 사랑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의 꿈이 '오지여행가'라는 것도,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그 즈음 알게 됐다. 물론, 그의 꿈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현지 교통편부터 일정까지 빠삭... 아이를 믿고 따라가는 여행

일정에 따른 동선을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다 글라스데코 물감으로 그려 붙여놓았다.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라는데, 검은 선으로 베트남 지도를 그려놓고 유적지의 위치를 표시한 것 같다.
▲ 베트남 여행지를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 일정에 따른 동선을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다 글라스데코 물감으로 그려 붙여놓았다.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라는데, 검은 선으로 베트남 지도를 그려놓고 유적지의 위치를 표시한 것 같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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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베트남에 관한 정보를 모아놓은 공책도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현지에서 가고자 하는 곳의 교통편의 요금과 시간을 조사했고, 유적지의 입장료는 얼마인지까지도 일일이 적어놓았다. 심지어 지역별 평균 기온과 먹어봐야 할 현지 음식, 문화적으로 조심해야 할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도 짜깁기하듯 메모해뒀다. 글자는 비록 삐뚤빼뚤하지만, 웬만한 여행가이드 책자 뺨치는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가려는 곳의 '랜드 마크'를 글라스데코 물감으로 그려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 줄 세워 붙여놓았다. 말하자면, 여행의 동선을 표시해놓은 것이다. 공책에 적고, 스케치북에 그리고,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 붙이며 나름대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거지만, 실은 그에게 있어 그건 그저 신나는 '놀이'일 뿐이다. 하마터면, 어지럽힌다며 혼낼 뻔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가족의 해외여행 준비는 온전히 초등학교 6학년인 그의 몫이 됐다. 다음 여행할 나라도 기실 그가 결정할 때가 많다. 이번에도 처음엔 말레이시아로 정했다가, 댕기열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두어 달을 남겨놓고 급작스럽게 베트남으로 변경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로 정했던 건, 이슬람 문화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젠 철이 들어선지 요즘엔 여행 통장의 잔고도 살필 줄 안다. '터키로 정하려다가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말레이시아로 낮췄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터키와 말레이시아까지 가는 항공료가 대충 얼마인지는 기본이고, 어느 항공사가 몇 번 경유하고 더 싼지, 심지어 항공사마다 기내식으로 주는 음식이 무엇인지조차 그는 훤히 꿰고 있다. 하긴 요즘 그의 스케치북에는 공항과 비행기에 대한 그림이 부쩍 늘었다.

어차피 그에게 들어갈 사교육비로 여행하는 셈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계획을 짠다. 세부 여행지를 정하는 것도, 현지 교통편을 감안해 일정을 짜는 것도 다 아이가 한다. 부모가 해주는 일이라곤 정한 대로 결제하고, 두툼한 여행 관련 책자 한 권 사서 그에게 장난감 삼아 던져주는 것뿐이다. 서너 번 그가 계획한 대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일정이 크게 어그러지거나 불만스러웠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슬람 문화를 체험하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지만, 베트남에서도 보고 싶은 게 있다며 그는 분주하게 책을 읽었고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를 여행하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미리 봐둬야 할 게 많다고 했다. 그는 일본을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서 그렇다며 지금도 후회하곤 한다.

어디서 찾았는지 일정에 따른 다양한 정보를 공책에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
▲ 아이가 쓴 베트남 여행자료 어디서 찾았는지 일정에 따른 다양한 정보를 공책에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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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국 문화와 일본 문화, 그리고 베트남의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는 고대 도시, 호이안이 가장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전공자답게 아시아 3대 요리 중의 하나라는 베트남의 먹거리를 가능한 한 두루 먹어보고 싶다며 기대했고, 나는 과거 남북 분단의 상징인 북위 17도선 주변 DMZ 유적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렇게 대강의 계획과 일정이 정해졌다.

인천에서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아이의 여행 준비는 계속 이어졌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비와 택시비는 각각 얼마이고, 숙소의 위치는 어디인지 준비해온 자료를 열심히 뒤적였다. 늘 그래왔듯 그가 알려준 대로 따를 것이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일찌감치 잠든 초등학교 2학년 동생과 연신 하품을 하며 졸린 눈을 부비는 엄마, 아빠와는 달리, 그의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네 시간 반을 날았다. 덜컹하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독서등을 켠 채 챙겨온 자료를 보며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비가 올 거라는 스마트폰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창밖으로는 구름만 약간 끼었을 뿐 화창하다. 주변 풍광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13일간의 우리 가족 베트남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태그:#베트남 여행, #사교육비, #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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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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