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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3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동기동창들과 선생님. 세월은 스승과 제자를 떠나 친구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고교 졸업 3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동기동창들과 선생님. 세월은 스승과 제자를 떠나 친구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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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무엇을 했을까? 인상적인 건 무엇일까? 한 해를 돌이켜 봅니다. 국가적으로는 세월호 사건으로 남은 충격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올 한 해 꽤 열심히 살았습니다. 물론 좀 더 열정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기념식 한대. 너도 올 거지?"

제 삶에서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 30년 만에 은사님과 동기 동창들을 무더기로 만난 일이었습니다. 엊그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데, 벌써 졸업 30주년이라니…. 속절없이 지난 세월이 야속하네요.

'친구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지난달 22일 행사장에 갔습니다. 저만치 행사 준비하는 친구들이 보였습니다. 하나 둘 낯설지만,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들 악수와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물론 은사님들과도 마음 속 인사를 나눴습니다.

"야,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어쩜 이리 그대로냐!"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는 단어의 포근함을 알겠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는 단어의 포근함을 알겠더군요.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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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까까머리 청춘들은 하나같이 50대의 중년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올 것 같지 않았던 50대. 남 일이라 여겼던 50대였습니다. 그랬는데 세월은 여지없이 청춘을 50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 사이에 빠지지 않은 말이 있더군요.

"야,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어쩜 이리 그대로냐!"

이처럼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들과의 만남에는 뭉클한 그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그저 친구였습니다. 고교 졸업 30년 만에 다시 만난 감동을 시 한 편으로 대신하렵니다.

사랑, 썩거나 또는 죽일 놈의

                                             정영희

그래,
네 건반은 별수 없이 삐걱거릴 거야
문풍지 살맛 난 바닷가 횟집 옆 골목다방
십구공탄에 익힌 커피 향만으로는
묽어져 가는 마음을 달래지 못할 거야

소주 한 잔에
손가락부터 붉어지는 썩을 놈의 친구야

그래,
흙먼지 뿌연 미루나무 길을 따라가면
바람을 맛있게 걸쳐 먹는 구절초가 지천인데
단풍잎에 녹슨 트럭 휘파람을 날리며
어딜 바삐 가는 건가
부르면 눈빛 그대로 부딪칠 수 없겠나

소주 한 잔에
발가락까지 붉어지는 죽일 놈의 친구야

고교 동기동창들은 정영희 시인이 그의 시집 <선암사 해우소 옆 홍매화>에 수록한 '사랑, 썩거나 또는 죽일 놈의' 시에서처럼 소주를 앞에 두고 "썩을 놈의", "죽일 놈의"란 말을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허물없는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우리들의 삶이 외롭지 않고 위로되며 훈훈한 거겠지요.

친구야, 보고 싶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친구는 위안입니다. 아픈 친구들, 완쾌되길 바랍니다.
 친구는 위안입니다. 아픈 친구들, 완쾌되길 바랍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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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나이 먹는다는 건, 이제 큰 행복입니다. 예전에는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가는 게 부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청춘일거라고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살 거라고 대책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 두 명…. 친구들이 곁을 떠나갑니다. 그래선지, 이제는 삶을 보다 더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 아프다는 소식 들었어?"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는 여지없이 건강 염려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럴 때 간이 철렁합니다. 그렇잖아도 세상을 등지는 친구 소식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데, 또 이 소식입니다.

"올 수 있으면 오라 했더니, 별 일 없으면 온다더니, 아직 안 왔네. 아무래도 암 수술 후라 많이 힘드나 봐. 그런데도 안 아픈 척,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화하는 걸 보니 내 가슴이 찢어지더라고."

역시나, 종종 들리는 암 투병 소식은 친구들 사이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참석한 친구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수술 후, 찾아보지 못한 미안함이 가득합니다.

"어때, 많이 좋아졌다며?"
"어, 많이 좋아졌어. 다행이 초기라서."
"요즘 집에서 치료하는 거야?"
"응. 언제 주말에 ○○ 친구랑 집에 한 번 와라. 같이 밥 먹게."
"알았어. 시간 내서 갈게."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이 고맙습니다. 누구나 떠날 세상이지만 떠날 날을 미리 받았다는 건 아픔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한계는 이것 뿐.

'친구야, 보고 싶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지난번 보다 훨씬 잘 불렀다... 그래서 감점이다"

음악 선생님은 제자의 추억을 듣고는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음악 선생님은 제자의 추억을 듣고는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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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 녀석 기억나세요?"
"아니. 누군데…."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데리고 와,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을 찾아 인사하며 한담을 나누려던 참이었습니다.

"고 3때 우리 반 1번이었던 친굽니다. 이 친구와 추억, 기억 안 나시죠?"
"무슨 추억인데?"

벗들은 선생님과의 추억을 곱씹으려는 중이었습니다. 귀를 쫑긋했습니다.

"노래 실기시험 때였어요. 순번이 다 돌아간 후 선생님께서 더 잘 부를 자신이 있는 사람에겐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요. 이 친구가 손을 들고 다시 불렀는데, 한 소절 들으시더니 그만 하라고 하셨대요. 그리고 이어진 선생님의 강평. 1번 너는 먼젓번이 훨씬 잘 불렀다. 그래서 오히려 감점이다 하시고 감점 하셨답니다."

음악 선생님 "이런…. 내가 그랬단 말이지?" 하시며, 호탕하게 껄껄껄 웃으셨습니다. 얼마나 함박웃음을 지으시는지, 옆에서 보던 우리까지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친구 어깨를 뚝뚝 치시며 "미안하다"며 위로하시더군요. 세월은 이렇듯 관계를 승화시켰습니다.

"내가 네 생활을 망쳤구나... 선생님이 미안하다!"

이날 만남은 작은 앙금을 풀어낸 힐링이었습니다.
 이날 만남은 작은 앙금을 풀어낸 힐링이었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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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얽힌 인연은 이뿐 아니었습니다. 반가운 중에도 술이 한 잔 씩 들어가자,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진 말까지 스스럼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중에도 과거 아픔이 그대로 녹아나더군요. 마치, 삶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선생님, 어떻게 생활기록부에 그렇게 쑬 수 있어요?"
"왜~에? 어떻게 썼는데?"
"이 학생은 교실 분위기를 저해합니다. 뭐 이 비슷하게 노골적으로 쓰셨어요. 제가 20대에 취직하려고 갔다가 면접 때 이것 땜에 떨어졌어요."

헉, 어째 이런 일이…. 30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제자가 선생님께 이런 원망을 하리라곤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돌발 상황에서 친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감싸 안았던 손을 내려 굵은 눈물방울을 닦았습니다. 난감해하시던 선생님께서 한 말씀하시더군요.

"미안하다. 내가 네 생활을 망쳤구나. 선생님이 미안하다."

선생님의 사과에 친구가 더 민망해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슴 속에 쌓아뒀던 멍울을 벗기 위해 꺼낸 말이 오히려 선생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움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변명에 나섰습니다.

"그 땐 나도 막 선생님이 되고 2년 만에 처음 맡은 담임이라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지금 같으면 생활기록부에 쓰는 말을 많이 돌려서 했을 텐데, 젊은 혈기에 그대로 쓴 거 같구나. 내가 정말 미안하다."

"우리 선생님이 그나마 젊어서 참 좋다... 그치?"

오랜만에 고등학교 교가도 부르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교가도 부르고...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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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진심어린 사과는 처질 것 같던 분위기를 묘하게 끌어 올렸습니다. 왜냐하면 50인 제자와 내년에 환갑인 선생님의 대화엔 사심이 없어 하나로 묶는 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마지막 한 마디는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제자가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이렇게 털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으냐.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 덕분에 서로 같이 얼싸안고 울면서 풀어냈으니 이게 행운이고, 힐링인 게야!"

세월은 스승과 제자를 가슴 속에 남은 작은 앙금까지 걷어가더군요. 그날 선생님과 제자들은 행사장을 벗어나 리조트에서 밤늦게까지 술잔을 나누었습니다. "아직까지 끄떡없다"던 선생님의 호기는 어느 새 사라지고, "너희들이 날 잘 조절해라"시며 뒷배를 부탁하더군요.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고단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고향집 어머니 품에서 잠든 자식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선생님의 잠든 모습을 보던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그나마 젊어서 참 좋다. 그치?"

이제야 "군사부일체"라던 고사성어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세월은 <철> '없던' 삶에 <철> '있음'을 선물했습니다. 그저 삶인 것을…. 이렇게 2014년이 저물어 갑니다!

고등학교 은사님들. 샘, 그대로세요...
 고등학교 은사님들. 샘, 그대로세요...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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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고등학교 졸업, #선생님, #친구,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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