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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 낳았어? 벌써? 순산인 거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참 잘했다. 장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응, 몸조리 잘하고…. 아기는 건강한 거지? 지금 곁에 없다고? 그래…?"

벌써 3개월 전 일이네요. 딸내미가 아기를 낳으러 병원으로 간다는 문자를 받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우리 내외에게는 그 시간은 기도와 설렘 그리고 조바심의 시간이었습니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딸내미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아내가 달뜬 말씨로 통화합니다.

이런 때 '고추' 달고 나왔는지부터 묻는 게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의 통화 아닐까요? 하긴 이미 의사 선생님이 친절을 베풀어주신 덕이기도 하지요. 의사 선생님이 불친절한 분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본디 우리 가문이 그렇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주신 대로, 딸을 주시면 주신 대로 잘 키우자! 예, 그랬거든요. 글쎄 딸아이의 시집 식구들이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죠. 그 집은 2대 독자를 낳은 것이니까요.

태아 때부터 사회성 기르고 나온 서준이... 별 탈 없겠죠?

태에서부터 인사성 끝내주는 서준이랍니다. "충성!" 아니면, 해병대처럼 "단결!"하는 겁니다.
 태에서부터 인사성 끝내주는 서준이랍니다. "충성!" 아니면, 해병대처럼 "단결!"하는 겁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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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달려가 딸내미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계시는지라 그렇게는 못했습니다.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곁에 없으니 더 궁금하고 마음 졸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받은 전화라 저와 아내의 관심은 아들인지 딸인지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제 딸과 손주의 건강이 궁금했습니다.

딸이 건강하게 순산했으면 됐습니다. 손주 녀석이 건강하게 이 땅에 나와 줬으면 됐습니다. 그렇게 2014년 5월 13일, 제 손자 녀석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어쭈!?' 하신 당신 '손자 바보' 자격 없음)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역사적 사명'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더 하기로 하지요.

"아빠, 폰에서 OOOO앱 깔고 가입해요. 그럼 태아사진 볼 수 있어요."

딸내미가 서준이(태명은 '꽁알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딸내미가 말한 바로 그 앱을 받아 깔았더니 정말 손자 녀석 태아 사진이 뜹니다. 참 좋은 세상이죠. 딸이 산부인과에 갈 적마다 사진이 떴습니다. 처음에는 흔적 발견하기도 힘들던 서준이는 '태아사진'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 되고 있다는 걸 말해 주더군요.

그런데 한쪽 팔을 늘 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 생각했습니다. '이 할애비를 닮아서 수줍음이 참 많은 아이로구나!'라고요. 제가 수줍음 타는 꽃할배거든요. 서준이를 본 사람들이 "고놈 실하다, 외할아버지 닮은 것 같고…"라고 말할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답니다. 천생 '손자 바보' 맞죠?

어디든 서준이가 저를 닮았다는 말이 제일 기분 좋습니다. 발가락이라도요.
 어디든 서준이가 저를 닮았다는 말이 제일 기분 좋습니다. 발가락이라도요.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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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솔직히 저보다야 지 애미애비 닮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디 저를 닮았나 하고 찾는 게 이 할애비 마음이랍니다. 그러다 기어이 찾았습니다. 발가락이 닮았더라고요. 허허허. 억지로라도 저 닮은 구석을 찾는 것도 서준이와 함께 하는 행복 중에 하나랍니다.

서준이가 세상에 나와서도 얼굴에 손을 올리는 버릇은 그대로더군요. '한 살 버릇 여든 간다'고나 할까요. 서준이는 태아 때처럼 꼭 한 손을 높이 들어 경례 자세를 취합니다. 태중에 있을 때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인사성(다른 말로 사회성)이 밝은 아이더군요. 하하. "충성!" 아니면, 해병대처럼 "단결!"하는 것 아닐까요.

요즘 대한민국 군대가 너무 무서운데, 우리 서준이는 100일도 안 돼서 경례를 익혔으니 다음에 입대해도 아무 일 없겠지요? 태아 때부터 이렇게 인사성이 깍듯한데 누가 건드리겠어요. '인사만 잘해도 성공한다'는 말이 있답니다. 우리 서준이는 인사 하나만큼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세상살이 성공할 거라 믿습니다.

서준이가 살아갈 세상... 자유와 희망의 나라면 좋겠습니다

서준이의 태아사진입니다. 아직은 형태가 그리 여물지를 않지요.
 서준이의 태아사진입니다. 아직은 형태가 그리 여물지를 않지요.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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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보다는 조금 더 형태가 또렷합니다. 자세히 보면 왼손이 올라간 것이 보입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형태가 또렷합니다. 자세히 보면 왼손이 올라간 것이 보입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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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중략) 자유와 권리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중략)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어렸을 때 이 걸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습니다. 다들 아시지요? 국민교육헌장. 서준이의 탄생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국민교육헌장'인 건 무슨 조화일까요. 역시 이 할애비는 구시대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1968년 12월 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이미 폐기된 전제주의의 산물이죠.

그때는 국가권력이 교육을 컨트롤하겠다는 발상이 먹히던 시대였으니까요. 뜻도 모르고 국민교육헌장을 밤새우며 외웠던 군사정권시대가 새삼스럽습니다. 우리 서준이가 국민교육헌장을 꼭 외워야 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참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서준이가 '민족중흥의 시대적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맞지 않을까요?

'손자 바보' 할애비의 눈으로 볼 때 서준이의 탄생은 시대적 사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군사정권시대가 아닌 건 좋은데 아직 그 맥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날마다 정치하면 대립과 다툼이 먼저 나오고, 군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 소식이 연이어 날아드니까요.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 구현'을 들고 나왔습니다. 글쎄요. 문화를 정권이 구현할 수 있나요? 이런 시대여서 그런가요. 제 첫 번째 글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올라왔습니다(관련기사 "손주 자랑은 꼴불견인줄 알았는데... 이럴수가").

"나도 그러합니다. 손자 때문에 글도 조심하지요. 말조심하고요. 세상이 더러워도 많이 참지요. 그런데 먼 훗날 내 손자가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종북세력'들을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은 뒷전이고 계파싸움만 합니다. 자유 대한이 깨끗해야 어린 내 손자들이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겠지요."

서준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과 사위가 서준이를 안고 있는 탄생 축하카드입니다.
 서준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과 사위가 서준이를 안고 있는 탄생 축하카드입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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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바보'를 자처하며 행복한 너스레를 떠는 제 글을 그렇게 읽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잘 시작하는 것 같더니 엉뚱한 데로 가더군요. 제가 이 댓글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세상 참 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제 손자 녀석이 발을 내디딘 거고요.

태속에서부터 사회성을 가지고 태어난 서준이가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갈등과 저주, 분열의 시대가 아니라 사랑과 소망의 시대를 살길 기도합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조물주가 필요로해서 세상에 나온 우리 서준이가 자유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울어도 곱고, 웃으면 천지가 다 제 품으로 달려오는 것 같은 녀석, 서준이가 앞으로 살아낼 세상은 파란 하늘, 산들거리는 바람, 국민을 웃게 하는 정치가 있는 곳이길 기도합니다.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배가 가라앉아 생명이 죽어가는 사태가 없는 나라면 좋겠습니다.

배부른 이들이 더 이상 배고픈 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권세 잡은 이들이 서민을 짓누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군대 가서 죽는 청년들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통일이 돼 군대에 가지 않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런 희망의 나라, 서준이의 나라면 좋겠습니다.


태그:#손자 바보, #서준, #꽃할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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