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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발리(Bali)를 여행하다 보면 한국의 시골을 여행하는 듯한 묘한 친근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뭔가 낯익은 전원풍경. 발리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에나 논이 펼쳐지고 그 논에서 벼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시원스러운 해변과 살아 움직이는 활화산이 자연 모습 그대로의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발리. 발리는 야자수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논을 보면서 시골 풍경 속 여행도 떠날 수 있다.

빠중을 찾아가는 길에는 발리 남부의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 발리의 논 빠중을 찾아가는 길에는 발리 남부의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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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논에는 언제나 벼들이 자라고 있다. 발리는 1년 내내 온도가 높고 강수량과 일조량이 풍부한 아열대 지방이어서, 벼농사를 일 년에 세 번 짓는 삼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논에서는 모내기를 하고 그 옆에서는 누런 벼들이 익어가고 있으며 또 그 옆의 논에서는 추수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태양의 축복 아래 쉬지 않고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논농사만을 보아온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평소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첫 베트남 여행 당시 삼모작이 가능한 베트남의 들판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평소 상식의 한계를 절감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을 동행한 발리 친구, 아롬에게 물어보았다.

"아롬, 발리는 1년에 삼모작이 가능하니까 농민 대부분이 일년에 벼를 3번 수확하겠네요?"
"농부들마다 쌀 삼모작을 할 수는 있지만 모든 농부들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삼모작을 하면 쌀의 양이 넘쳐서 쌀 공급 과잉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쌀은 이모작만 하고, 1년에 한 번은 특수작물 등을 심는 밭농사를 하지요."

사람의 노력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데 모인 곳

발리의 중부지방으로 들어서면 산이 높아지면서 고산지대가 전개된다.
▲ 발리 고산지대 발리의 중부지방으로 들어서면 산이 높아지면서 고산지대가 전개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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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고 한가해 보이는 발리의 논. 그 논의 이면에는 이처럼 농사로 생을 이어나가는 수많은 농부들의 땀과 서로간의 조정 노력이 담겨 있다. 이처럼 발리의 농부들은 단순히 여행자의 눈 앞에 보이는 것처럼 목가적인 생활을 해왔던 것은 아니다. 발리의 북부와 중부지방은 화산지대와 구릉으로 이뤄져 있고, 경작지로 사용할 만한 평지가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리에는 이러한 산 중턱부터 개간해 물을 댄 계단식 논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발리의 생활 환경이 만들어낸 발리의 계단식 논에는 아름다움도 담겨 있다. 농사 짓기에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발리의 계단식 논이지만 특히 논농사를 짓지 않는 서양 친구들에게는 매우 이국적으로 보일 것이다. 발리의 나지막한 구릉과 비탈진 산의 야자수 아래마다 쌀농사가 지어지는 정경은 발리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 중의 한 곳이 됐다.

논농사를 짓는 나라에서 온 나도 발리의 계단식 논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우리는 브두굴(Bedugul)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빠중(Pacung)의 계단식 논을 찾아갔다. 도시 구역을 벗어난 차창 밖의 발리 들판에도 시원스런 논이 펼쳐져 있었다. 섬이라고 하기에는 드넓은 벌판과 논이 발리의 남부지역에 전개되고 있었다.

발리의 아름다운 초록색 논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속에서 벼이삭들이 포근하게 자라고 있다. 야자수 아래의 계단식 논 위로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모습, 지구 상에서는 동남아시아의 몇몇 쌀농사 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이국적 풍경이다.

빠중 가는 길 도중에는 주변에 딸기 농장이 많이 보인다. 빠중 근처의 조그마한 재래시장에도 딸기를 파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잠깐 내려 빠중의 딸기 맛을 볼까 마음먹었다가 일단 빠중의 계단식 논으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항상 정해진 시간 안에 흥미 있는 곳을 최대한 보려고 하는 나의 여행 일정은 이미 빡빡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빠중의 딸기농장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둘러볼까 했지만 해가 지는 상황이라 다음 여행으로 미루기로 했다.

발리서 가장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계단식 논

발리의 계단식 논을 보려면 큰 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마을길을 가야 한다.
▲ 한적한 마을길. 발리의 계단식 논을 보려면 큰 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마을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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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넓은 큰 길에서 차들의 운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마을길로 들어섰다. 빠중의 계단식 논 입구는 무척 조용하다. 한낮의 열기 때문에 논 주변에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다.

발리에는 계단식 논으로 대표적인 빠중 이외에도 우붓(Ubud) 주변의 뜨갈랄랑(Tegallalang), 빠중 서편의 자띠루이(Jatiluwih) 같이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지역이 여럿 있고, 이 계단식 논을 찾아가려면 큰길에서 벗어나서 꽤 이동을 해야 한다. 실제로 발리의 계단식 논 중에서도 발리 중서부, 우붓의 서쪽에 있는 빠중의 계단식 논이 보다 웅장하고 제일 멋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곳은 계단식 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큰 맘 먹고 여정 중에 포함하는 곳이다. 안내판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서 현지인과 동행하지 않으면 길을 여러 번 물어봐야 하고, 찾는 길을 헤맬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빠중 입구 주변에는 외국 여행객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발리의 수많은 계단식 논 중에서 빠중만큼 여유롭게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없다.

사진 몇 장만 찍기에는 아쉬운 곳

산의 언덕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 빠중의 계단식 논 산의 언덕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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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려 빠중의 계단식 논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서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거대한 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길의 모퉁이 저편을 둘러보아도 탄성이 이어진다. 자연의 풍광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진 기묘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멋진 전망을 한껏 자랑한다.

사진 몇 컷만을 찍고 출발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한적함 속에서 빠중 계단식 논의 풍경을 감상했다. 나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 전체가 계단식 논이니 평지에 만들어진 논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우리나라 시골의 논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일단 눈앞에 펼쳐지는 계단식 논은 스케일부터 다르다. 앞에 펼쳐지는 논들은 한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다. 계단식 논을 만들 때도 제멋대로 구불구불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구획으로 구분된 논들이 굽이굽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따뜻한 남국의 라이스 테라스이기 때문인지 더욱 편안해 보인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계단식 논을 바라보기만 하는데 무슨 일인지 지루함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논에 가득한 물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쌀농사를 짓는 나라에서 왔기에, 쌀밥의 정갈함이 연상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국의 계단식 논을 보면서 잠시 마음의 휴식을 취했다.

빠중의 계단식 논은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논이 아니다. 실제 농사가 행해지는 곳인데 그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 인간이 노력해 만든 인공 경작지가 아열대 대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답기까지 한 저 논들을 가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농부의 손길이 필요했을까? 계단식 논은 발리 농부들의 땀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많은 수확과 농부들의 건강을 염원한다.
▲ 마을의 힌두교 사원. 많은 수확과 농부들의 건강을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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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의 논에도 종교의 염원이 닿아 있다. 수천, 수만 개의 힌두교 사원이 있다는 발리. 발리 사람들은 과거부터 산과 언덕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산의 신과 언덕의 신을 모셔 왔다. 이에 따라 산 정상이나 산 중턱, 언덕의 성스러운 곳에는 사원이 세워졌다.

계단식 논의 한 구석에도 진한 검은색의 사암으로 만들어진 작은 힌두교 사원이 있다. 일종의 마을 사원인데, 이 논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이 계단식 논에서의 많은 수확을 빌고 건강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생업의 현장인 계단식 논에서도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야자수와 어우러진 계단식 논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 야자수와 계단식 논. 야자수와 어우러진 계단식 논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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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다 대야 하는 물은 위쪽의 논부터 들어간 뒤 아래쪽 논으로 계속해서 내려간다. 자세히 보니 논의 곳곳에는 민가와 함께 논을 경작하는 소가 머물 수 있도록 만드러진 시설물이 세워져 있다. 안에 구유도 있는 간이 외양간같은 건물이다.

산의 구릉에 저 수많은 논들을 만들어 둔 농부도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일 것이다. 다만 물이 부족해 논에 물을 대야 할 일이 많은 한국 농부에 비해서 물이 풍부한 이곳 발리의 농부들은 논에 물을 대는 면에서는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시원한 바람, 흔들리는 벼

경사진 논의 한가운데에 민가와 외양간 시설이 있다.
▲ 계단식 논 사이의 민가. 경사진 논의 한가운데에 민가와 외양간 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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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중은 잠시 들러서 사진 몇 장만 찍고 떠나기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빠중은 점심을 먹고 간단한 휴식을 취하거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기에도 좋은 곳이다. 이런 여행자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본 사람들이 있었을까. 계단식 논이 보이는 빠중의 언덕 위에 레스토랑이 있다.

식당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계단식 논의 전망이 시원하다.
▲ 빠중의 식당. 식당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계단식 논의 전망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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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전망을 즐기며 뷔페식 점심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라서 식사 시간에는 여행자들이 꽤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한가한 주변 풍경답게 식당의 종업원들도 여유가 있다. 계단식 논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테라스는 분위기가 있고, 테라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식사와 차 그리고 커피는 풍치가 있다.

종업원들의 표정에서 한가함과 여유가 느껴진다.
▲ 식당 종업원들 종업원들의 표정에서 한가함과 여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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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논 뒤편으로는 발리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궁산(Gunung Agung)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리고 광활한 계단식 논은 뒤편의 숲과 이어진다. 나는 잠시 마음을 편하게 내려놨다. 계단식 논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한적하게 트래킹을 하면 참으로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 계단식 논의 구불구불한 논두렁을 따라 잠시 걸었다. 논에서 발리의 농부를 만나면 손이라도 흔들어주려고 했으나 더운 낮이라 그런지 논에는 사람이 없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경사진 계단식 논을 보면 경외감이 느껴진다.
▲ 빠중의 계단식 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경사진 계단식 논을 보면 경외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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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조용한 발리의 논을 걷는 기분이 시원하기만 하다. 누군가 발리의 전통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이곳 계단식 논이 가장 발리다운 발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답하고 싶다.

추수를 앞둔 계단식 논의 황금빛 물결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 논 위에 소나기의 강한 빗줄기가 뿌려지면 참 운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국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벼의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빠중, #계단식 논,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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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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