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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게는 29개월 된 아들이 있습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아들이 정말 많이 예쁘고 귀엽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잘 때가 제일 예뻐"라고 했던 선배 아빠의 길을 걸은 친구나 동료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갈 만큼 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물론 있습니다.

한없이 귀여울 나이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요? 글쎄요. 온몸에 힘을 집중시켜도 앞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던 아들 녀석이 어느덧 기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하고, 드디어 브라질 댄서들의 현란한 발놀림 못지않은 발재간을 보여주면서까지 뛰기 시작하는 29개월 차 아들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이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아들은 그리 크지도 않은 집 안 이곳저곳으로 저를 끌고 다니면서 기차놀이 해 달라, 의사 놀이하자, 미끄럼틀 타는 거 보고 박수쳐라, 자전거 뒤에서 밀어 달라 등 요구가 끊임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들의 요구 사항이라지만 10대도 20대도 아닌 30대 중반의 아빠의 체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아들에 대항할 전략을 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전략은 바로 '폴리 놀이'입니다. 제 아들 또래의 아이를 키우시는 분들이라면 다 아시는 바로 그 유명한 만화 <로보카 폴리>를 적극 응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29개월 차가 되면서 현란한 발놀림과 더불어 조금씩 더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제 아들이 마루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고 발생! 사고 발생! 출동하라!"

사실 원래 저는 이 말을 들으면 머리가 어질어질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로보카 폴리'에 나오는 로이와 엠버, 헨리, 그리고 서울시에서 운영했던 그 유명한 타요 버스 장난감을 들고 잠자리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냥 아들 녀석이 로보카 폴리에 나오는 캐릭터들도, 그리고 타요도 좋아하니까 같이 자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이 타요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난데없이 '로보카 폴리'에서 자주 나오는 말인 "사고 발생! 사고 발생!"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로이를 들고 집사람에는 엠버, 제게는 헨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출동하라!" 이러는 것입니다. 별 수 있습니까? 일단 손에 헨리를 쥐고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헨리라는 캐릭터는 헬리콥터라 계속해서 프로펠러를 돌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손으로 프로펠러를 돌렸습니다. 너무 힘들어하니까 집사람이 뒤에 헬리콥터 꼬리 부분을 잡았다 뺐다 하면 프로펠러가 자동으로 돈다고 해서 잡았다 뺐다를 반복했습니다. 처음에는 편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완전 자동이 아닌 반자동이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냥 돌릴 때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용감한 구조대! 로보카 폴리~ 어쩌고 저쩌고 하늘 위를 날아요~" 이 노래를 아들과 같이 부르면서 타요를 구조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이와 엠버와 헨리가 노력한 끝에 타요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구조에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희율이가 다시 타요를 쓰러뜨리더니 "사고 발생! 사고 발생! 출동하라!" 이러는 것입니다.

"구...구했잖아?"라고 제가 아들에게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지만 막무가내입니다. 한 번 정도 더 못 해줄까 싶어 다시 앞에서 했던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팔이 아팠지만 아들하고 이 정도 놀아주는 것 정도 못할까 싶어 참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자!"라고 하는 순간 다시 희율이가 타요를 넘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싶었지만 또 "사고 발생! 사고 발생! 출동하라!" 이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이 놀이를 무한 반복한 것입니다. 예전에 광고에 나오는 오래 가는 건전지를 껴서 지치지 않는 토끼처럼 아들은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쓰러뜨리고 사고 발생, 출동하라를 반복했습니다.

바로 그 아픈 기억! 그 기억 때문에 "사고 발생! 사고 발생! 출동하라!"가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활동량이 부쩍 늘어진 율이를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장난감이 아닌 율이를 직접 출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는 가만히 누워있고 이렇게 말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양희율. 마루에 사고가 발생했다. 출동해라! 출동해라!"

'출동'이라는 단어와 '출동' 놀이에 푹 빠진 제 아들은 그 말을 충실히 따라 처음에는 혼자서 열심히 출동했다가 돌아왔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밖에서 돌아와서 보니 희율이가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저를 보고 바로 일어나서 놀아 달라고 할 것 같아 제가 미리 선수를 쳤습니다.

"양희율. 출동하라!"
"양희율. 출동하라!"

항상 '출동'이라는 말을 듣자 마자 "출동!"이라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열심히 출동했던 희율이가 그 날은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손으로 가리키며 "아빠가 출동해!"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29개월 된 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웃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희율이가 한 말을 들으며 그 때 희율이가 했던 말들과 행동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성을 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희율이가 저를 찾으며 "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격하게 감정을 표현한 것도 아닌데 그 말에서 아이 답지 않은 '짜증'이라는 감정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9개월 밖에 안 된 녀석이 어디서 그런 감정을 넣는 법을 배웠을까를 생각해보니 원인은 저였습니다. 제가 가끔 밖에 나가야 하는 옷이나 물건 등이 바로 찾아지지 않으면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아 어디 있는 거야?"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아이들은 다 어른들 하는 거 보고 따라하니까 말도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고 들려주셨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율이가 제게 "아빠 출동해" 이렇게 말할 때의 모습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율이에게 했던 동작이나 어감 등이 그대로 배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조금은 귀찮아 한 제 마음까지 아들이 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하는 행동과 말들 그 모든 것들을 무의식적인지 의식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억해두었다가 따라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나니 마음 한 편이 무거워졌습니다.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잘못된 삶을 살면 이 아이도 똑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하는 일인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보다 좋은 아빠가 되고자 오늘 또 다시 다짐해봅니다. 그런데 이 다짐이 내일 아침까지 이어질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요새는 제 배 위에 올라 와서 노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빠 위에 올라가 볼까?" 이러면서 배 위에 올라와 자꾸 뛰면서 놀고 싶어해서 말입니다.

진짜 갓난 아이 때는 제가 귀여워서 그렇게 놀아주었지만 이제는 15kg이나 나가는데 제 배 위에 올라와서 뛰면 제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아빠가 좋다고 같이 놀자고 하는 것인데 화를 낼 수도 없고, 현명한 해결책이 없을까요? 오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지만 가끔은 꾹꾹 눌러 참는 초보 아빠입니다. 언젠가는 진짜 좋은 아빠, 본받고 싶은 아빠가 될 수 있겠지요?


태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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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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