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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양 할매들' 앞에서 죄인이 된다. 밀양을 지나는 69개의 송전탑은 울산 울주군 신고리원전 5, 6호기에서 경남 창녕군을 잇는다. 나는 30년 수명 기한을 넘긴 낡은 원전을 안고 사는 울산 시민이자 그들이 만든 전기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도시인이다.

울산은 고리 원전을 기준으로 반경 30km 이내 약 340만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그러나 원전이 공업용 값싼 전기를 생산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울산 사람들은 유독 원전에 무감각하다. "시골에서는 전기 잘 쓰지도 않는다. 전기 많이 쓰는 도시 사는 너거가 송전탑 지어라!"는 할매들의 절규는 나를 저격했다. '밀양 할매에게 미안했다면 반핵 영화를 보자'는 말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밀양, 그만해요 고리... 제4회 반핵영화제 13일까지 해운대에서

밀양은 고리 원전을 막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반핵영화제는 우리를 밀양의 고리와 연결시키는 또 다른 '고리'다.
 밀양은 고리 원전을 막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반핵영화제는 우리를 밀양의 고리와 연결시키는 또 다른 '고리'다.
ⓒ 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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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부터 13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열리는 제4회 반핵영화제는 '밀양에서 함께하지 못했다면 해운대에서 고리를 막는 고리가 되어보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개막작 <밀양전>을 포함해 <검은비>, <너구리 폼포코 대작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핵발전소> 등 반핵 관련 영화 11편이 상영된다. 영화광이라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가 연출한 <검은비>에 가장 눈이 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와 닿는 영화는 밀양 할매들 이야기인 <밀양전(戰)>이다.

밀양 할매들의 '평범한 일상' 

"이것들아 사람 죽는다, 사람 죽는다!" 할매들은 흙바닥을 뒹굴며 절규했다.
 "이것들아 사람 죽는다, 사람 죽는다!" 할매들은 흙바닥을 뒹굴며 절규했다.
ⓒ <밀양전> 예고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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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마을 풍경으로 다큐멘터리는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선다는 거대한 쇠로 된 송전탑, 할매들은 고쟁이 대신 '750kV OUT'이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고서 굴착기 앞에 눕는다. 묏자리를 미리 준비하듯 구덩이를 파고 그 위로 사람의 목이 들어갈 만큼 밧줄을 동그랗게 맨다.

그렇다고 <밀양전(戰)>은 이들의 처절한 싸움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10년째인 긴 싸움에서 쇠사슬로 벌거벗은 몸을 감는 결정적 순간은 현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흑백의 스틸 컷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대신 생동감 있는 건 쑥 뜯는 할매들의 일상과 그들의 언어다. 한전 직원들을 향해 "똥물 터자뿐다!"며 소리 지르는 할매들의 경상도 방언은 날 것 그대로 자막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일상으로 향한다. 파전을 부치는 할매를 향해 누군가는 "뱃속에 들어가면 다 찢어지는데 막 뒤집으라"며 잔소리하기도 하고, 경사도 없건만 큰 솥에 소고깃국을 끓여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는다. 밤이면 촛불 하나에 의지해 화투도 친다. 서로 '피' 내놓으라며 아우성이다. 일상의 풍경이 무너지는 것은 절대 풀리지 않을 벨트로 서로의 몸을 묶는 순간이다. 젖가슴을 드러내고 때로는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송전탑 건설을 막을 수 있다면 할매들은 무엇이든 하겠단다. 이들의 현실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할매들은 '똥물' 아니면 무엇을 쥘까

"안 물러서면 똥물 뿌릴끼다!"

생전 처음 '데모'에 나선 할매들의 무기는 똥물이다. '한전에서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돌자 수세식 화장실에 두 달 모아뒀던 똥물을 파란 바가지로 퍼 나른다. 할매들에게도 이 작업은 꽤 곤욕스럽다. 페트병 좁은 입구에 똥물을 넘치지 않게 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여기에 김칫국물도 섞는다. 더한 폭탄을 만들려는 건지, '똥색'을 중화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하얀 우비를 뒤집어쓴 채 똥물을 피하고자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한전 직원들과 경찰들의 모습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상대와 비교하면 볼품없고, 지독한 냄새만 풍기는 무기를 쥔 할매들은 어쩐지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한석봉 엄마가 얼마나 강하노. 엄마도 그런데 엄마의 엄마, 할매들은 얼마나 힘이 세겠노."

이 말이 다 맞다.

농성 중 경찰과 대치한 밀양 주민의 모습.
 농성 중 경찰과 대치한 밀양 주민의 모습.
ⓒ <밀양전> 예고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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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욕을 하거나 배울 일이 없던 할매들도 이제 '욕쟁이'가 다 됐다. 다 보고 들은 결과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욕도 많이 들었다. 용역들은 몸싸움하다 힘에 부쳐 쓰러진 할매를 향해 "그대로 화장하면 되겠네"라고 말하거나 "시발년, 시발년, 시발년"이라며 노래도 불렀단다.

처음에는 '막내아들' 같다며 대치하던 경찰들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던 할매들도 이제는 저도 모르게 악에 받친 욕을 쏟아 낸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한다. 정인출 할매는 "내 입으로 죄를 짓는다. 내가 어쩌다 이래 됐노"라며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2013년 7월, 40일 간의 전문가 협의체 구성은 파행으로 끝나고, 멈췄던 공사가 재개되면서 할매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만 했다.

"세상이 싫다. 세상이 싫다. 우리가 돈 달라 카나. 그대로만 있게 해달라는데. 그게 뭐 잘못이가."  

"쪽파가 철탑을 이깁니다", 우리가 바로 쪽파입니다

할매는 쓰러져 호흡이 가쁜 순간에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 필요없어요. 저는 우리 이웃에 있는 주민들이 필요해요."
 할매는 쓰러져 호흡이 가쁜 순간에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 필요없어요. 저는 우리 이웃에 있는 주민들이 필요해요."
ⓒ <밀양전> 예고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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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1일, 남아있던 마지막 101번 움막 농성장이 강제 철거됐다. 패배가 예상된 싸움이었다. 맞서 버틴 시간은 30분이 채 안 됐다.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며 긴 밤을 지켰던 움막은 하룻밤 사이 사라졌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매일 새벽 가파른 산을 오르던 모습이 떠오른 건 왜일까.

보라색 고무 슬리퍼를 신고서 성치 않은 몸과 다리로 올랐지만 단 한 번 주저앉거나 넘어지지 않았다. 이들을 지탱한 지팡이와 밧줄 그리고 말없이 앞과 뒤를 봐주는 할매들이 있었다. 제대로 몸 누이기 힘든 움막에서 "우리 넷이 언제 이래 어깨 맞대고 함께 눕겠노"라며 '낭만'을 나눴던 할매들은 끝까지 함께한다. 2011년 '우리는 3년간 한 번도 진 적 없다'며 기뻐하던 할매들의 모습은 2014년에도 유효했다.

반핵영화제를 찾은 이사라(83), 한옥순(67) 할매. 유독 많은 10대 관객들을 향해 연신 "고맙다"고 말하던 한옥순 할매. 그는 오늘도 송전탑을 쥔 할매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반핵영화제를 찾은 이사라(83), 한옥순(67) 할매. 유독 많은 10대 관객들을 향해 연신 "고맙다"고 말하던 한옥순 할매. 그는 오늘도 송전탑을 쥔 할매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 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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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막 농성장 벽에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우자'보다 강렬한 말 하나가 있다. '쪽파가 철탑을 이깁니다' 이날 관객의 절반 이상은 10대와 20대였다. '다큐멘터리 잘 봤다'는 젊은 관객의 손을 붙잡고서 한옥순 할매는 말했다.

"이제 젊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합니다."

밀양 송전탑을 막지 못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고리 원전을 막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반핵 영화제 마지막 날인 13일에는, 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전원이 출연한 <밀양 765kV OUT>이 상영된다. 이어 부북면 127번 농성장 할매들과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준한 신부가 함께 하는 '밀양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열린다. 밀양 할매들에게 미안했다면 늦기 전에 보러 와라. 할매들의 '쪽파'는 바로 우리다.


태그:#밀양 송전탑, # 밀양의 친구들, #밀양 할매, #반핵 영화제, #고리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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