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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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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담곤은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해 본채에 남아 바깥 동향을 살피고, 관조운과 혁련지는 별채에서 혹시 모충연이 남겼을지도 모를 서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책장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의서(醫書)가 가장 많았다. 산장 주인 담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기도 했겠지만, 모충연이 기승모를 데려 오고 나서도 많은 의서가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무극의통(無極醫統)'라는 책이었다. 의술의 비급이라 할 수 있는 손사막의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 50여 권의 사이에 꽂혀 있었다. 제목이 눈길을 끌어 관조운은 책장을 넘겨보았다. 필사본으로 적혀 있었는데 필체가 낯이 익었다. 스승 모충연의 글씨다. 내용은 의서(醫書)에 관한 정리인데 기맥의 흐름과 기공의 전개에 따른 치료법만 따로 모아서 적어놓은 것이다. 스승님께서 둘째 사숙의 치료를 위해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기공치료법을 추려 한 곳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무극'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관조운이 생각을 해보았으나 딱히 떠오른 것은 없었다. 그는 혁련지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의서에 관해 무지하기는 그녀도 매한가지일 터다. 그밖에 유가의 경전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기담집(奇談集)과 사서(史書) 등으로 채워져 있다. 특이하게도 무예서(武藝書)는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날 즈음 혁련지가 기름 먹인 봉투를 관조운에게 가지고 왔다.

"사형, 이것 좀 봐요?"
"뭐지?"

혁련지가 보여주는 봉투의 겉봉에 '사제(四弟)에게'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금릉에서 사형(師兄)이'라고 적혀 있다. 관조운이 글씨를 보니 낯이 익다. 사부님의 필체다.

"편지예요. 사부님께서 넷째 사숙님에게 보낸 편지에요."
"사부님 편지를? 그게 어디 있었는데?"
"저기 서안(書案)에 달린 서랍 안에 있더군요."

혁련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앉은뱅이 서안이 책장 옆 구석에 있고 그 위로 허리높이까지 책이 쌓여 있다. 서안에는 한 단짜리 서랍이 달려 있다. 봉투를 열고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사부님의 필체이기에 궁금해서 읽어보았어요."

혁련지가 관조운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녀가 이미 내용을 읽었으니 이왕지사 관조운이라고  달리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삼등분으로 접힌 편지를 천천히 펼쳤다. 오래된 종이냄새가 와하고 관조운에 밀려들었다. 

사제(四弟)에게

뜰 앞의 오동잎이 얼핏 붉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만산(滿山)이 홍엽(紅葉)으로 물들었구나. 지난 봄 자네가 답시(答詩)로 보내온 왕유(王維)의 '춘계문답'에서 '낙엽이 떨어지면(搖落時) 내 홀로 꽃 필 것(獨秀君)'이라고 했는데, 가을이 되고 보니 그 시구가 더욱 생각나네 그려.

우리가 사문(師門)을 벗어난 지 어언 십이 년. 삼제(三弟)는 자신이 뜻한 바대로, 사제(四弟)는 출중한 능력으로 강호에서 이름은 드높이고 있는데, 맏사형인 나는 금릉(金陵)의 한 구석에서 조그만 문패 하나 걸고 겨우 연명하고 있으니 저세상에 가면 무슨 낯으로 스승님을 뵐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사제가 있어 못난 사형의 부끄럼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비천의 네 제자가 어찌 스승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겠냐만 기중 이제와 사제가 그 발자국이라도 따라 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의 불행한 소식이 들려오니 팔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안타깝구나.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특출해 그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더욱 가슴이 아프구나.

사제(四弟)가 요청한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보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 네 제자가 모여 스승님께서 남기신 비급을 찾아서 공개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무릇 만물에는 때가 있고 사람에게는 각자의 그릇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달이 차면 기울고,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듯 만물은 이치에 따라 움직이고, 사람은 국량(局量)에 따라 뜻을 담기 마련이다. 천하의 기개를 품고도 남는 가슴이 있는가 하면, 바람에 날리는 풀씨하나도 심지 못하는 가슴도 있는 법이다.

못난 사형(愚兄)이 보건대, 스승님이 네 제자에게 진경(眞經)의 보존을 명(命)하신 것은 우리의 그릇 탓이 아니라 천하의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음이라고 본다. 사제는 지금이 그 때라고 했지만, 강호에 언제 어지럽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어리석은 사형이 틈날 때마다 스승님의 유지를 곱씹어 보건대, 진경은, 그로써 강호의 어지러움을 잠재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호인들이 다만 도(道)를 좇아 은원을 갈무리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경을 남기신 스승님의 진정한 뜻이지 싶다. 그래서 진경은 무예서(武藝書)가 아닌 무학서(武學書)이고, 상승(上乘)의 무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무극(無極)을 묘리를 깨우치라는 것이라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사제(四弟), 이제 와서 밝히자면 언젠가 스승님이 나를 따로 불러 진경의 향후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네. 스승님은 자신의 사후 30년 내 그리고 우리 네 제자 대(代)에는 진경을 세상에 내놓지 말라는 부탁을 하셨다네. 그 연유는 감히 물을 수가 없었지만 못난 사형의 짐작으로는, 진경은 일개 문파의 영화를 위해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 무림의 대의(大義)를 위해 그에 합당하는 영웅을 기다리며 후일을 기약해야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진경을 두고 네 제자가 다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만 이건 어리석은 사형의 기우(杞憂)임을 밝힌다.

아무튼 스승님의 유명(遺命)이 그럴진대 이 미련한 제자는 다만 스승님의 말씀을 따를 뿐이라네. 사제의 깊은 뜻을 이 사형이 모르는 바는 아니나 사정이 이러하니 사제도 못난 사형의 심지를 헤아려 그 뜻을 거두어 줌이 좋겠구나.

금릉의 이슬이 하남(河南)에서는 서리로 변하겠구나. 정주에도 서리가 눈처럼 내려앉았겠지. 북행(北行)하는 기러기에게 편지를 부탁하면 좋으련만 기러기는 기러기대로 제 일이 바쁜지 이 초라한 모옥에 내려앉질 않는구나.  

언제 또 우리 네 제자가 모여 한 잔 술에 강호의 시름을 달랠 것인가. 세월은 순식간인데 천지는 아득하고 천하는 여전히 소란스럽구나. 괄괄한 사제(四弟)의 일갈(一喝)이 더욱 그리운 시속(時俗)이다.

인편에 햅쌀로 빚은 청주 한 병 보낸다. 이만 총총.
                                                                                    甲子年  한로(寒露) 즈음에 
                                                                                          금릉 모옥에서 愚兄 書

편지를 읽고 난 후 관조운이 날짜를 보니 갑자년으로 적혀 했다. 삼년 전이다. 내용으로 볼 때 삼년 전에 넷째 사숙이 사부님에게 네 제자가 모여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거나 공유하자는 의미 같았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진경의 행방에 대한 어떤 단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일까.

넷째 사숙은 비룡표국 창고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진경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편지 내용을 보면 넷째 사숙은 사부님이 진경의 행방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진경의 입수를 부탁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네 제자 중 사부님만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혹은 넷째 사숙만 빼고 다른 사숙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관조운의 머릿속에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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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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