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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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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서쪽 어느 곳에서부터 임을 찾아 동(東)으로 흐르던 황하(黃河)는 문득 초원의 선녀(仙女)가 보고 싶어 북(北)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북선녀는 반기기는커녕 싸늘한 냉기만 뿜어대며 돌아앉았다. 상심한 황하는 다시 마음을 바꿔 동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변심(變心)의 대가는 컸다. 거인 대항(大行)이 황하를 가로막고는 그의 얄팍한 지조(志操)를 꾸짖었다. 너의 마음이 진실 되지 못하니 멀리 돌아가며 뉘우치거라. 황하는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스스로 진토(塵土)가 되도록 울부짖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항의 발꿈치를 돌고나서야 제 길을 찾아 동으로 흘러갔다.  

남북 팔백 리, 동서 사백 리에 걸친 대항산맥. 그 발꿈치에서 황하를 노려보는 산이 하나 있다. 정상(頂上)을 모조리 도끼로 깎아 봉우리마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니 황하는 이즈음에 이르러선 숨도 안 쉬고 휘돌아 나갔다. 그렇다고 마냥 사납기만 하랴, 놀란 황하가 갈 길을 늦출까봐 자주 구름을 불러들여 모습을 숨기기도 하였으니, 이런 사연을 두고 인간들은 구름에 쌓였다가 도끼로 찍은 듯한 얼굴이 번갈아 나타난다고 하여 운부산(雲斧山)이라 일컬었다.    

운부산은 첩첩이 이어지는 봉우리와 골마다 푸른 소(沼)를 품고 끝없이 이어졌다. 관조운 일행이 얼마쯤 가자 양쪽에 골패를 세운 듯한 협곡이 나타났다. 절벽은 누군가 일부러 도끼질로 매끄럽게 깎은 듯했고, 폭은 좁아 범(虎)이라면 한 번에 건너 뛸만 했다. 조수협(鳥囚峽)이라는 곳이야. 담곤이 말했다. 새들도 이곳에 들어서면 갇히고 만다는 협곡이다. 조수협을 빠져 나오자 급한 경사가 이어지며 봉우리에 올랐다. 갑자기 시야가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였다. 그런데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연기들이 솟아났다. 저 연기는 뭐죠? 혁련지가 묻자 형양(荊襄)의 난에서 도망쳐 온 유민(流民)들일 게야. 하고 담곤이 답한다. 칠 년 전 양양 지역에서 엄청난 살육이 있었다. 지주와 관리의 수탈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나 새로이 땅을 찾으러 온 유민들에게 나라에서 원적지로 귀향하라고 명했다. 갈 곳 없는 그들은 반기(反旗)를 들었다. 조정에서 관군이 동원 돼 수만 명이 죽고 수십만이 또 유랑을 떠났다. 그중 일부가 깊은 산이 이어진 이곳 대항산맥 곳곳에 숨어들었다고 담곤이 얘기해 주었다.

봉우리를 내려가는 길을 조망하니 골짜기가 굽이굽이 꺾여 있다. 구사곡(九蛇谷)이라고 하지. 담곤이 말했다. 말 그대로 아홉 마리의 뱀이 꼬리를 물고 몸을 트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골짜기를 향해 내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길은 점점 좁아져 마침내 마차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일행은 걸빵을 벗겨 마차를 숨겨놓고는 말고삐를 잡은 채 걸어갔다. 깎아지른 계곡마다 물이 넘쳤고 어쩌다 쳐다보는 하늘은 보자기만한 얼굴을 내밀며 겨우 안부를 전한다.

마차를 떼어내고 걸은 지 한 시진 쯤 되자 숲길이 끝나고 탁 트인 분지가 나타났다. 그 너른 공터 한 구석에 거각(巨閣)까진 안 되더라도 제법 모양새를 갖춘 저택이 보였다. 깊은 산중과 어울리지 않게 기와를 얹고 담장까지 갖추었다. 가까이 가니 '자운헌'이란 현액(縣額)이 걸려 있다. 관조운과 혁련지 그리고 담곤은 자운헌 안으로 들어갔다. 

자운헌은 커다란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로 방들이 세 개 씩 있는 구조다. 그리고 뒤편에 따로 별채가 있다. 깊은 산속의 별장치고는 작지 않은 규모다.

"처음 자운헌을 지었을 때는 표국의 은가(隱家)로 사용할 예정이었어. 표국이 단순하게 상단의 호위만을 하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선 사람을 은닉 보호해야 할 때도 있고, 귀중한 물건을 맡아야 할 때도 있지. 그럴 경우를 대비해 마련했는데 실제로는 내 개인 별장이 돼버렸어."     

담곤이 자운헌에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는 관조운과 혁련지를 별채로 데려갔다. 별채는 당호도 없고 주련도 없이 소박하게 제 몸집만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거실이 있고 문으로 통하는 서실(書室)이 있다. 담곤이 서실로 안내했다. 서실 안에는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 있고 한쪽 면에 있는 책꽂이에는 각종 서적이 꽂혀 있다. 반대편 벽에는 장검이 하나 걸려 있다.

"여기가 모 사형께서 묵었던 곳이네. 대사형은 이곳에 머물면서 서실에서 무언가 쓰고 기록하곤 했었지."
"사부님이 여기서 글을 쓰셨다고요?"

관조운이 놀란 듯 물었다.

"사년 전 여름 이곳에서 한 철을 나시면서 사형께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쓰시며 책으로 묶으시기에 나는 평생의 절학을 무예서로 남기시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시문을 편집하시는 것 같았어."

"그러셨군요."

혁련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욱 놀라운 건 당시 대사형이 오셨을 때 혼자 오신 게 아니었어."

담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침이 넘어갔다.

"둘째 사형과 같이 오셨어."
"아, 강호에서 운몽선객으로 널리 이름을 날리셨던 기승모 사숙 어른 말씀이십니까?"

혁련지가 놀란 듯 말했다.

"그렇다네."

"강호의 소문으로는, 둘째 사숙께서는 광인(狂人)이 되어 소식이 끊긴 지 십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 사부님과 함께 나타나셨단 말입니까?"

"지난 십년 동안 대사형께서는 알게 모르게 수소문을 하셨더군. 네 제자 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둘째 사형이었는데 그런 지경에 빠지셨으니, 장제(長弟)인 대사형께서 늘 마음에 걸리셨던 게지. 대사형께서 한 번씩 강호에 출타하신 건 옛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명문정파들의 소식망을 이용해 둘째 사형의 행방을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었다네. 그렇게 수년을 지내다가 마침내 둘째 사형이 낙양(洛陽)에 있다는 소식을 개방(丐幇)을 통해 알게 되었던 거야. 대사형께서는 그길로 낙양으로 가서 둘째 사형과 함께 나에게 온 것이라네."

"그 때가 삼년 전인가요?"

혁련지가 물었다.

"맞아, 기해년 여름이었지."

담곤이 잠시 말을 멈추며 잠시 회상에 잠기더니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곤이 표국을 개국한 지 일 년 하고도 삼 개월.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없으나 성장세를 타고 있는 입장이고 보니 해야 할 일이 태산였다. 표국의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대사형으로부터 은밀히 연락이 왔다. 정주의 모처에 있는데 아무도 모르게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이었다. 담곤은 부랴부랴 모충연을 만나러 갔다. 대사형은 그에게 은밀히 기거할 데가 있는가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마침 운부산에 산장을 마련했던 터라 그곳으로 추천하고는 동행을 했다. 가는 길에 초작현의 움집에서 웬 걸인을 데려오나 싶었는데 그가 바로 둘째 사형 기승모였다.

기승모는 항간에서 얘기하는 광인처럼 울부짖거나 발광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고 어딘가 모르게 넋이 나간 모습에서 범인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 뿐 얼핏 보거나 무심히 지나치면 그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모충연이나 담곤을 대하는 태도였다. 형제나 다름없었던 그들 앞에서 이제(二弟)는 소가 닭을 보아도 저렇진 않겠다 싶을 정도로 무심한 눈빛을 했다.   

담곤은 모충연에게 네 제자 중 셋이 이왕 이렇게 모였으니 서호에 사는 삼제 장강편운 습평에게도 연락하자고 했다. 그러나 모충연은 정색을 하고 담곤에게 말했다.

"사제(四弟)야. 네가 스승님의 유지(遺志)를 잊었느냐. 스승님은 네 제자들이 모여 강호에 세력을 형성하고 위세를 떨치는 걸 금(禁)한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내가 둘째를 데리고 너에게 온 건 우선 정주가 낙양과 가까웠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대항산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네가 운부산에 산장을 마련해줘 굳이 대항산까지 갈 필요는 없게 되었다만 너의 호의는 여기까지만 받자구나."

담곤은 서운한 마음을 접어두고 둘째 사형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모충연은 둘째의 치료를 장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루 이틀 안에 호전될 것도 아니니 막내 사제는 정주로 돌아가 표국 일에 전념해 달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는 길이라고 거듭 말했다. 대사형의 부탁이기도 하거니와 달리 도울 만한 방도가 없어 담곤은 사흘을 같이 지낸 후 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굳이 찾아 올 필요는 없네.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모충연이 말했다. 표국으로 돌아온 담곤은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를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충연이 불쑥 표국으로 찾아왔다.

"둘째가 갑자기 사라졌어. 온 산중을 다 뒤져봐도 도저히 찾을 길이 없네."

모충연이 침통하게 말했다.

"네에? 아니 둘째 사형은 무공이 실전(失傳) 된 거 아닙니까. 사형의 경공이면 둘째 사형이 어딜 가도 반나절이면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담곤이 놀라서 물었다.

"글쎄, 나도 그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네.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내가 손 쓸 길이 없으니 말이야."

그 길로 모충연은 금릉으로 돌아가고 담곤은 표국 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둘째 사형은 물론 대사형으로부터도 어떤 소식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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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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