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월호 승무원 복장을 입고 있는 안현영씨. 안씨는 승무원복을 입고 일을 했지만, 사실 승무원이라고 할 수 없는 일종의 하청 계약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사고 당시 어떤 승무원보다 더 적극적으로 승객 구조 활동을 했다. 안씨의 세월호 3층에서 한 구조활동은 뒤늦게 생존자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세월호 승무원 복장을 입고 있는 안현영씨. 안씨는 승무원복을 입고 일을 했지만, 사실 승무원이라고 할 수 없는 일종의 하청 계약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사고 당시 어떤 승무원보다 더 적극적으로 승객 구조 활동을 했다. 안씨의 세월호 3층에서 한 구조활동은 뒤늦게 생존자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 유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또 한명의 의사자 지정이 임박했다.

청해진해운에서 불꽃놀이 등 이벤트 업무를 하던 안현영(28)씨. 지난 4월 16일 사고 당시 그가 세월호 3층 로비에서 한 구조 활동이 뒤늦게 생존자 강혜성씨의 증언에 의해 확인됐다.

당시 그는 3층 침수가 진행되자 안내데스크 부근의 의자를 겹겹이 쌓아 사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4층으로 올려 보냈다. 이미 의사자로 지정된 고 박지영씨를 4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 것도 그였다.

박씨는 4층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 변을 당했다. 미처 모든 승객을 다 올려보내지 못한 상황에서 점점 물이 거세게 차올랐고, 안씨는 끝까지 학생 등 승객들과 함께 있었다.

이 기사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뒤늦게 목격자의 증언이 나오기까지 안씨의 흔적을 찾아헤맨 가족들의 노력에 대한 기록이다.

지옥행

4월 16일 급히 진도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아무리 발신을 눌러도 받지 않는 핸드폰을 보며 아버지 안규희(56)씨와 어머지 황정애(55)씨, 형 안현웅(30)씨는 불안했다. 이들은 누구보다 현영씨를 잘 알았다. 20대의 건장한 청년으로 운동신경이 좋았다. 사고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 수백 명이 타고 있었다지 않은가. 가족들이 아는 현영씨는 이들을 외면할 성격이 아니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현장에는 아무리 찾아도 현영씨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곳은 생지옥이었다.

죄인

세월호 승무원이었다는 이유로 진도실내체육관에서 현영씨 가족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똑같이 자식을, 동생을 저 배에 남겨둔 채였지만, 차마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종종 단원고등학교 학부모들이 "어머님은 몇 반이세요"라고 물어오면 황씨는 "일반인 가족이에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끓는 가슴을 어찌하랴. 4월 25일, 실종자 가족들에게 수색 상황 브리핑을 한 뒤 체육관을 나서는 해군 해난구조대(SSU) 주환웅 상사(36)를 부부는 쫓아가 잡았다. 미리 작성한 작은 메모지를 그의 군복 상의 주머니에 직접 넣어주고는 연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훌륭한 잠수부님!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애원합니다. ...(중략)... 승무원복을 입고 근무하는 우리 아들! 나이도 어린 우리 아들, 학생들과 함께 구분하지 말고 같은 어린 생명 같이 구해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학생들 인도하다 못나왔을 겁니다. 평소 그런 애입니다. 정말 승무원복 입은 아이 있으면 같이 구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안씨의 신분

이벤트 업체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불꽃놀이 등 야간 행사 진행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던 안현영씨는 배를 탈 때 일반 승객처럼 승선증이 필요했다. 이 사진은 사고가 난 전날 청해진해운에서 발급한 안씨의 승선증이다.
 이벤트 업체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불꽃놀이 등 야간 행사 진행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던 안현영씨는 배를 탈 때 일반 승객처럼 승선증이 필요했다. 이 사진은 사고가 난 전날 청해진해운에서 발급한 안씨의 승선증이다.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가족들은 현영씨가 인천-제주를 오가는 여객선에서 일하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 관계인지 몰랐다. 승무원복을 입은 모습을 봤기에 승무원이라고만 생각했다. 4월 28일 아버지 안규희씨는 아들의 고용 상태를 청해진해운에 전화로 문의했고, 회사는 팩스로 관련 서류를 보내왔다. 그런데 고용계약서가 아니었다. 개인사업자등록증과 계약서, 승선증이었다.

알고 보니 현영씨는 엄밀히 말해 세월호 승무원이 아니었다. 청해진해운 직원도 아니었다. 일종의 이벤트 업체 개인사업자로서 불꽃놀이 등 야간 행사 진행에 대해 회사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배를 탈 때는 일반 승객처럼 승선증이 필요했다. 진도실내체육관에서 죄인 아닌 죄인처럼 지내온 가족들은 이 서류들을 받아들고 또 오열했다.

목격자

사고 당시 현영씨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5월 3일 형 현웅씨는 동생의 여자 친구로부터 동생의 소식을 들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세월호 승무원으로 사고 당시 3층 로비에 있었던 생존자 강혜성씨 병문안을 갔는데, 강씨가 안내데스크 쪽에서 현영씨를 봤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전화를 한 동생의 여자 친구 역시 세월호 관련 일을 했기 때문에 강씨 병문안을 갈 수 있었다.

가족들은 당장이라도 강씨를 만나고 싶었지만, 아직 현영씨를 건져내는 일이 우선이었다.

인양

사고 20일째인 5월 5일 새벽 5시40분경 현영씨가 인양됐다. 승무원복만 입은 채, 구명조끼는 입지 않은 채. 발견 장소는 3층 선원식당이었다. 강혜성씨가 목격했다는 로비 안내데스크와는 문을 몇 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안씨가 인양되기 전날 저녁, 같은 장소에서 단원고 여학생 한명이 인양됐다. 일반 승객들이 접근하기 힘든 장소인 선원식당에서 여학생과 현영씨가 같이 발견됐다는 점에 가족들은 주목했다.

5월 7일 고인을 인천 고잔성당에 모셨다.

어긋나다

5월 16일 현영씨와 가깝게 지냈던 고 양대홍 사무장의 시신이 인양됐다는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저녁 무렵 인천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을 갔다. 이곳에서 청해진해운 관계자들로부터 "조금 전 강혜성씨가 부모님과 조문을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어긋났다. 강씨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증언

다음날인 5월 17일 전화통화가 된 강씨가 부천에 있는 현영씨 집으로 찾아왔다. 온 가족이 그를 기다렸다. 숨을 죽이며, 막내의 마지막 순간을 들었다. 형 현웅씨는 기자와 만나 당시 처음 증언을 듣던 상황에 대해 이렀게 말했다.

"안내데스크 앞에서 의자를 쌓는 과정을 들으며 자랑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이 차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펑펑 우셨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2014년 4월 16일 오전 세월호 3층 로비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숨진 승무원 故 박지영(22·여)씨의 영정이 4월 22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 분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 '당신의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숨진 승무원 故 박지영(22·여)씨의 영정이 4월 22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 분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가족들은 강씨의 동의를 받아 증언을 녹음했다. 기자는 이 녹음 파일을 모두 들었다. 다음은 강씨의 증언 중 현영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자) 오전 9시 40분 쯤 여성 한 분이 (배의 오른쪽 카페 부근에서 왼쪽) 편의점(매점)으로 떨어졌습니다. 열려진 문으로 바로 들어갔어요. 당시 (편의점 바로 옆) 안내데스크 쪽에는 저와 안현영, 박지영, 이렇게 셋이 있었습니다. 현영이가 떨어진 분을 꺼내게 도와달라고 말했고, 셋이 같이 꺼내서 진정시켰습니다.

곧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저와 현영이는 안내데스크에 있던 의자를 편의점 옆 쪽으로 겹겹이 쌓아서 승객들이 밟고 위(4층)로 올라갈 수 있게 하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지영이가 편의점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현영이가 그 키로 문을 잠그고 그 위에 의자를 쌓았습니다. 제가 의자를 넘겨주면 현영이가 쌓았습니다. 그래서 한명은 의자를 잡고, 한명은 승객을 아래에서 올려주고, 한명은 위에서 끌어주고.

그러다가 지영이가 자신은 수영을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우리 셋은 모두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4층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이후 점점 물이 차오르면서 제가 휩쓸렸어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계단 사이에 틈이 있는데, 그쪽을 잡고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영이를 봤을 때 3층에 학생들 십여명과 같이 있었습니다. 십수명을 위로 올려보냈지만, 아직 3층에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경 조사 때도 시종일관 동일하게 말했다"

현영씨의 마지막 모습을 들은 가족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형 현웅씨는 "속된 말로 개죽음이 되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면서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5월 21일 소재지인 부천시청에 의사자 신청 서류를 접수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혹시 강씨가 유족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강씨는 여러차례 "해경 조사를 받을 때도 시종일관 동일하게 말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 초기부터 조사를 받은 터였다. 안내데스크 매니저였던 강씨는 이번 사건에서 중요 인물이었다.

가족들은 보다 객관적인 자료인 해경 수사 기록을 직접 찾기 위해 5월 22일 진도로 떠났다.

기다림

하지만 수사 기록은 민간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다. 해경으로부터 보여줄 수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만 관계기관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으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다음날 진도에 상주하고 있는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을 잠시 면담해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치단체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의사자 신청서를 접수받은 부천시는 다음날인 5월 22일 바로 해경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가슴 졸이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증언 내용이 거의 같다"

8일이 지나서야 회신이 왔다. 5월 30일 해경은 부천시청에 전자문서로 관련 자료를 보내왔다. 부천시 복지행정팀 김태경씨는 "현영씨 가족이 제출한 증언 녹취록과 해경이 보내온 자료가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며 "세세한 부분에서 해경 자료가 좀 더 자세하다는 차이 뿐"이라고 말했다.

부천시는 당일 바로 관련 서류를 경기도와 보건복지부에 넘겼다. 이제 의사자 지정까지는 보건복지부 의사상자심사위원회의 심사만 남은 상황이다. 심사위 개최는 6월 중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일을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

기자는 5월 22일 경부터 현영씨의 이야기를 파악했다. 두 차례 유족도 만났다. 그런데 26일 아버지인 안규희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씨는 보도를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해경으로부터 확인 자료까지 온 후에 안씨에게 물었다. 자식의 훌륭한 행동을 널리 알리는데 왜 이리 주저하냐고. 그의 답은 이랬다.

"혹시 일을 그르치면 안되잖아요."

먼저 간 막내 아들을 명예롭게 보내는 것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 일이 행여나 잘못될까, 그는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태그:#안현영, #세월호, #의사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