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란리본 단 시민은 청와대 행진 저지','시민 침묵 행진 불허' ,'유가족 KBS 항의 방문 때, 병력 과잉 배치', '유가족 미행 덜미에 사과', '대국민 담화 발표 앞두고 시민 200여 명 연행'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경찰이 주어가 된 기사의 내용이다. 경찰이 시민들의 추모 움직임을 봉쇄하고 유가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예고한 주말에는 시민 215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 때문에 세월호 시민들의 추모 물결에 대응하는 경찰에게서 박근혜 정부의 공안 본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명보다 돈이 중요한 사회에서 벗어나야"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를 제안한 용혜인씨가 지난 18일 서울 중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를 제안한 용혜인씨가 지난 18일 서울 중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 김민

관련사진보기


경기 안산 출신의 대학생 용혜인(25)씨도 지난 18일,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시위는 용씨가 제안해 시작된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였다. 침묵 시위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여섯 글자 속에 세월호 참사 원인이 있다 보고 이에 저항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시위다. 그의 제안으로 지난 3일, 서울 홍익대학교 앞에서 첫 시위를 진행했다. 이날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34주년 기념일로 세번째 진행된 시위였다.

이날 용씨는 동화면세점 앞에서 "박근혜 정부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답하실 분들,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다. 이에 시민들이 부응했고 광화문 광장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경찰에 가로 막혔다. 세 차례의 해산 경고에 불응하자 경찰은 체포하기 시작했고 용씨도 여경의 손에 서울 은평경찰서로 잡혀갔다. 그리고 지난 20일 오후, 연행된 지 44시간이 지나서야 풀려나왔다. 구금 기한인 48시간을 3시간 여 앞둔 시간이었다.

그는 2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대규모 연행은 일선 경찰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며 "위선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이고 세월호 추모에 대한 박근혜의 대답"이라며 "경찰이 계속 연행한다고 해도 시민들은 멈추지 않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뒤에서는 시민을 연행하고 유가족을 미행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사고를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빗대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34년 전 일어난 광주 민주화운동이 우리의 역사가 된 것은 시민이 광주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300명이 넘는 이들이 죽거나 사망한 이 사건을 역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잊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또 "경찰이 어떻게 대응하든지 관계없이 계속해서 침묵 시위와 행진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용씨와 함께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 처음 제안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 한마디가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이 말의 함의가 크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 이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생명보다 돈이 중요한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이 중요해서 낡은 배를 운행 연장시키고 화물 더 싣기 위해서 증축했던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서 침묵 행진을 제안 드렸다."

- 연행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당시, 침묵 행진이 끝나고 18일 오후 7시가 넘었을 때다.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박근혜 정부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답하실 분들은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다. 시민들이 모였고 동화면세점에서 광화문 사거리 세종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경찰 병력에 가로 막혔다. 대치가 이어졌고, 3차례 해산 명령 뒤 연행하기 시작했다."

- 경찰의 연행 이유는 무엇이었나.
"집시법 가운데 경찰의 해산 명령 불응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가 인도에 있는데, 인도로 올라가라고 하면서 계속 해산 명령을 내렸다."

"연행 과정에서 남자 경찰의 성희롱 직접 목격"

세월호 침묵시위를 하던 경찰에 둘러쌓여 가만히 있는 모습. 용혜인씨는 경찰이 침묵행진을 막자 "추모하는 게 죄라면 우리를 잡아가십시오!"라고 외쳤다.
▲ 경찰에 둘러쌓인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침묵시위를 하던 경찰에 둘러쌓여 가만히 있는 모습. 용혜인씨는 경찰이 침묵행진을 막자 "추모하는 게 죄라면 우리를 잡아가십시오!"라고 외쳤다.
ⓒ 알바노조

관련사진보기


- 경찰의 연행이 두렵지 않았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번 사고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4년 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역사가 된 이유는 시민이 광주를 끊임없이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거나 실종된 이번 사건을 역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잊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역할이다. 경찰이 어떻게 대응하든지 계속해서 거리에 나올 것이다. 이번 주말도 마찬가지다."

- 연행 과정에서 부당한 일은 없었나?
"나는 여경에 의해 끌려갔다. 팔과 다리를 붙잡혔는데, 여경이 팔목을 자꾸 꺾었다. '꺾지 말라'고 자꾸 항의를 했지만 여경은 웃으면서 계속 팔에 힘을 줬다. 경찰 버스를 타면서 계속 항의했다."

- 연행 과정에서 성희롱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직접 목격도 했다. 여자 분들이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남자 경찰이 여자 다리에 손을 대거나, 연행 과정에서 스타킹이 찢어지도록 만들었다. 경찰이 저희를 막고 밀면서 남자 경찰들이 여자의 몸에 손을 댔다.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았다. 같이 있던 여성분은 남자 경찰이 잡아서 왜 여경 아니냐고 항의했더니 높은 경찰이 와서 "그냥 잡아"라고 말했다.

- 조사는 어떻게 받았나.
"19일에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 받는 중간에 점심시간이 껴서 두 차례에 걸쳐 총 3시간가량 조사를 받았다. 경찰이 구교현 알바노조 위원장을 아냐고 물어보더라. 그 분은 침묵행진이랑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다. 그리고 진술 거부를 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의도를 자꾸 묻더라. 부당하다고 느꼈다."

"시위 주동자로 보고 가장 늦게 풀어줬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입구대에서 청소년과 시민들이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침묵시위을 벌이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입구대에서 청소년과 시민들이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침묵시위을 벌이고 있다.
ⓒ 최윤석

관련사진보기


- 언제 풀려났다.
"서울 은평경찰서에 9명이 같이 있었다. 20일 오후 3시경부터 순차적으로 석방이 됐는데,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석방됐다. 오후 6시 47분이었다."

- 왜 가장 늦게 풀려났나?
"18일 오후 10시 15분경에 연행됐으니까 만 44시간이 넘어서 풀려났다. 나를 침묵 행진의 주동자라고 보고 가장 늦게까지 있게 한 것 같다. 경찰은 다른 분들에게는 몇시에 풀려난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풀려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17일과 18일 200명 넘게 연행됐다. 대국민 담화문 발표를 앞둔 주말이었다.
"대규모 연행은 일선 경찰들이 단독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다. 경찰 윗선 혹은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이고 세월호 추모에 대한 박근혜의 대답이다. 경찰이 계속 연행한다고 해도 시민들은 멈추지 않아야한다.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태그:#세월호 침몰사건, #침묵 시위, #경찰 연행, #용혜인
댓글10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