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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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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에서 하루를 보낸 관조운과 혁련지는 새벽 일찍 정주를 향해 출발했다. 정주성을 통과하는데도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성문을 지키는 포졸은 그저 일상적이고 형식적인 검문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하긴 정주라면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해도 얼마인가. 적게는 수만에서 많게는 십수만 명이 될 것인데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들을 어찌 일일이 기찰을 하겠는가. 동문에만 해도 장사치들이 해가 뜨기 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해 파루가 울리는 오경삼점에는 이미 사람들로 왁자해졌다.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자 먼저 성안의 사람들부터 나왔다. 인마가 뒤섞이고 크고 작은 짐수레가 줄지어 성문을 빠져나왔다.

혁련지가 관조운의 소매를 슬며시 잡아당기며 한 무리를 가리켰다. 거수마룡(車水馬龍)의 상단이다. 족히 스무 대는 넘음직한 수레가 일렬로 성문을 통과하고 있다. 수레 위에는 집채만한 짐들이 거적으로 덮여 있는데, 수레 하나마다 커다란 황소 두 마리가 이끄는 쌍거다. 말을 타고 선두에 선 사람이 관조운의 눈에 들어왔다. 자색 경장 위에 검은 배자를 걸쳤는데, 가슴에서 복부까지 이어지는 원 안에 금빛 용이 승천하는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안장에는 검은 바탕에 노란 수실로 '비(飛)'자가 새겨진 기(旗)가 꽂혀 있다. 한눈에 보아도 비룡표국임을 알 수 표식이다.  

말을 탄 표사들이 수레를 주위로 한바퀴 씩 돌아가며 점검을 하는데,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씩씩하다. 비룡표국의 위상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 장면이다. 

정주 관내에서 비룡표국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저 행렬이 긴 짐마차나 짐수레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번화한 중경로에서 동쪽으로 약 오 마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룡표국은 정북과 서북에 걸쳐 둥그렇게 에두른 동산을 끼고 좌우로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정 서넛이 팔을 벌려야 끝과 끝이 닿을 수 있는 우람한 대문은 진시(辰時)도 안 된 이른 아침이었지만 활짝 열려 있다. 짐수레의 덜컹거리는 소리, 노역꾼들이 워워, 이랴, 하면서 마소를 부리는 소리, 개똥아, 야아, 하며 짐 부리는 소리가 왁자하며 비룡표국의 아침을 열고 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열려진 대문을 통과해 제융전이라고 쓰인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는 책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붐볐다. 각종 전표와 증명서를 주고받는 곳인 것 같았다. 관조운이 어디부터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혁련지가 옷깃을 슬며시 잡아끌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는 관조운을 이끌고 대문 밖으로 다시 나왔다.

"왜 그래? 사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사형?"

혁련지가 눈빛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글쎄……, 나는 모르겠던데. 사람들이 많고 건물이 복잡해 어디서 담 사숙을 찾나, 하는 생각만 했는데."

"흥, 둔하기는……. 서무원들이 앉아 있는 뒤쪽에 팔짱을 낀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사람들을 훑어보는 자 못 봤어요?"
"듣고 보니 그런 자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나 참, 천상 공맹 타령이나 할 사람이네요. 사형은."
"그럼 어떡하지?"

관조운이 머쓱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이대로 들어가면 우릴 잡아가슈, 하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혁련지가 톡 쏘아붙였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일단 뒷동산에 올라 형세를 파악하기로 했다. 동산에 오르니 비룡표국의 스물두 채의 전각과 너른 마당 그리고 후원의 연못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잠깐 기다려봐요. 좀더 자세히 확인해 봐야겠어요."

혁련지가 말하기가 무섭게 옆에 있는 우람한 노송(老松)의 가지를 잡더니 공중으로 빙글 한바퀴 돌며 사뿐하게 올라섰다. 이어 그녀는 가지와 가지를 다람쥐처럼 타고 올라갔다. 경공이 뛰어나군, 관조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혁련지가 쪼르르 내려왔다.

"안 되겠어요. 웬 자들이 은근히 감시하는 게 틀림없어요. 건물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데 장포 안에 검을 숨기고 있고, 무엇보다 교대하는 장면을 방금 보았어요. 아침 식사 때문에 근무교대를 하는 모양이에요."

"휘주를 벗어나고부터 관헌의 수배가 없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 사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은화사가 드러내놓고 공개수배하지 않고 은밀히 추적하기로 방침을 변경한 것 같아요." 

혁련지의 아미가 살짝 요동하더니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그녀가 생각에 잠겼을 때의 표정이다.

"사매, 정면 돌파하는 건 어때?"
관조운이 심각하게 말했다.

"어떤 식으로요?"
"그냥, 제융전인가 하는 곳에 가서 국주님을 뵈러 왔다고 정식으로 면담 신청을 하는 거야. 본시 표국이라는 데가 온갖 기물이 있다 보니 보표(保鏢 : 경호무사)들이 경계를 하는 게 당연한 곳 아니겠어, 우리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생각해 잠복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고 봐."

"사형 말씀처럼 우리가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만약 우릴 체포하기 위해 진짜로 잠복한 자들이라면 어떡할 거예요. 은화사에 또 연행되면 이번에도 어떤 사람이 구해 주리라 기대하는 거예요?" 

"……."

"모든 일은 미리 조심하고 준비하는 게 상책이에요. 상단 일을 하다보며 여러 가지 생각치도 못한 변수와 맞닥뜨릴 때가 있어요. 그럴 경우 우리 상인들은 정도(正道)니 도의(道義)니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 일단 위험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걸 가장 상수로 칩니다."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사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저에게 따로 생각이 있으니 사형은 절 따라주시면 됩니다."

그녀가 관조운을 쳐다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작천방 방주 배설은 늦은 아침을 막 끝냈다. 새벽부터 맞춰보기 시작한 장부와 부기를 검토해보니 지난달 역시 실익이 별로 없었다. 상단의 규모만 커지고 겉으로 보기에만 요란했지 별로 남는 게 없는 게 요즘의 실적이다.

유서 깊은 정주의 상계가 대명(大明)에 들어서서 산서와 신안 상계의 등쌀에 못 이겨 위세가 쪼그라들었다. 당(唐)이 멸하고 송(宋)이 세워지기 전까지 다섯 왕조가 화북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할 무렵 정주와 개봉의 하남상인들은 군수물자를 보급하면서 왕실 이상의 부를 축적했다. 그후 송(宋)과 요(遼), 금(金)이 남북으로 대치하면서 하남상계는 다시 위축되었다. 남쪽의 풍부한 물자를 화북으로 이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元)이 중원을 통일하고 대도에 도읍을 정하면서 다시 흥하기 일백년. 상계의 성쇠는 역사의 흥망과 궤를 같이하는지, 중원의 주인이 대명으로 바뀌면서 도읍이 남쪽 금릉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다시 위축되었다.

그것도 잠시, 정난(靖難)의 역(役)으로 제위에 오른 영락제가 예전의 대도였던 북평으로 재환도를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상도의 기회가 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막북 정벌을 취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선서상인들이 날개를 달고 말았다. 연왕(燕王) 시절 영락제 주치는 거사에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면서 산서의 상인들에게 빚을 졌다. 안으로는 환관과 밖으로는 상인들에게 신세를 진 영락제는 내치의 기반을 닦으면서 이들에게 특혜를 주기 시작했다. 산서상인계에 소금 전매와 같은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막중한 특혜를 누리진 않지만, 그동안 쌓아놓은 부를 기반으로 치고 들어오는 산서상인의 상술에 막무가내로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궁여지책으로 하남상계도 산서상인의 경쟁자인 신안상인들과 손을 잡고 소금유통에 뛰어들었지만 교활하기로는 산서상인 뺨치는 신안상인인지라 이득이라는 측면에선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신안상인과 손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산서상인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배설이 정주의 가장 큰 상계 작천방을 세울 때만 하더라도 염업유통에 뛰어드는 게 목적이었다. 선제 성화제 때부터 완화되기 시작한 소금전매는 현제 홍치제에 이르러 산서상인의 독점적 지위가 거의 허물어졌다. 시중의 거래수단이 은화로 집중되면서, 소금은 화폐적 성격보다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해졌다.

이는 소금을 매개로 돈의 흐름을 쥐고 있던 산서상인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굳이 소금을 가지고 돈놀이할 필요가 없어졌다. 즉 특혜의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소금의 유통망을 확보해 놓으면, 언제 손바닥 뒤집히듯 바뀔지 모르는 거래 관행에 미리 대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세를 조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사실 서북 오랑캐 이적(夷狄)들에게 소금은 아주 절실한 생필품이다. 유목으로 생활하는 그들은 모자란 염분을 보충하거나 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기 위해선 중원 사람들보다 소금이 더 절실한 입장이다. 그런데 원에서 명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전쟁으로 인해 많은 길이 끊겼다.

영락제의 달단 막북 정벌이 끝난 지 어언 오십년이 흘렀고, 북쪽의 원(이때까지도 원나라는 북쪽에 있었다)과의 적대행위도 거의 사라졌다. 지금이 장안의 옛길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돌궐과 서하가 지배하던 강역(羌域)에 진출할 호기이다.

상념에 잠겨 있는 배설에게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라고 하시더냐?"
"웬 젊은 처자인데 명첩을 건네주었습니다."
"명첩? 이리 갖고 오너라."

시비가 들고 온 명첩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꺼운 화선지에 비단을 입히고는 그 위에 글자가 적혀 있다.

소주(蘇州) 체체염방(諦締鹽坊) 혁련지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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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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