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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함께 고성의 운치를 즐기며 호젓한 나하(那覇)의 슈리성(首里城) 우에키몬(右掖門)을 나왔다. 우에키몬은 슈리성 외부와 정전 뒷편의 내원을 이어주던 성문이다.

우에키몬을 나서자 요새와 같은 슈리성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성벽 아래에 줄줄이 피어 있는 소철은 남국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다. 정원용으로 다듬어진 소철이나 분재용 소철만 보다가 성벽에 자연스레 핀 소철을 보니 왠지 생소하다. 원래 소철의 모습은 저렇게 자연스러운 군락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슈리성 성벽을 따라 나란히 핀 소철이 이국적이다.
▲ 성벽의 소철 슈리성 성벽을 따라 나란히 핀 소철이 이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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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을 나서는 마지막 관문, 큐케이몬(久慶門)이 높은 성벽과 함께 다시 우리의 눈앞을 막아선다.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성문이 성벽을 돌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보인다.

슈리성 측면의 보조 성문이었던 큐케이몬은 주로 왕비 등 류큐(琉球) 왕국의 여성들이 사용하던 성문으로, 국왕이 성문 밖 사원을 참배하거나 과거 왕성이던 우라소에(浦添)의 북쪽지역을 방문할 때에도 이용되었다. 문의 중앙이 아치형의 석조로 되어 있는데, 석벽 위에 목재로 짠 성루 같은 문이 살포시 올려져 있다.

문 부분이 오키나와 전쟁 중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는 사실은 주변의 성벽과 확연히 차이나는 문 주변의 석회암 색깔로 알 수 있다.

슈리성을 나서는 마지막 성문으로 주로 여인들이 사용하던 성문이다.
▲ 큐케이몬 슈리성을 나서는 마지막 성문으로 주로 여인들이 사용하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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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케이몬 성벽 아래의 작고 아기자기한 수로에는 남국의 맑은 샘물이 졸졸졸 흘러나오고 있다. 이 순가히쟈(寒水川樋川, すんが-ひ-じゃ-) 바로 옆 즈이센몬(瑞泉門)의 류히(龍樋)와 함께 슈리성 내의 또 하나의 수원으로서, 생활용수 외에도 슈리성 안에 화재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불을 끄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넘치는 물은 큐케이몬 바깥쪽 땅 속 좌우 배수관을 통해 슈리성 북쪽 아래의 엔칸치(円鑑池) 쪽으로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엔칸치라는 연못에 물이 가득 차면 이 물은 그 아래에 있는 류우탄(龍潭, りゅうたん) 연못에 자연스레 흘러들었다. 왕궁 건물도 위압적이지 않고, 왕궁을 지으면서도 물길을 자연 그대로 살려 놓았으니 참으로 자연친화적인 왕궁이다.

높다란 성벽을 따라 큐케이몬을 나섬으로써 우리는 류큐의 왕이 살던 슈리성의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산책로는 성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고 있었고 산책로를 따라 우리는 성의 북쪽으로 쭉 내려왔다. 류큐 왕국의 왕릉인 타마우돈(玉陵), 그리고 넓은 슈리성 구역을 모두 도는 답사 때문에 나도 그렇지만 아내도 꽤 다리가 아파 오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짝 본 후 수목이 우거진 숲이 참 아름답다며 앞서서 발길을 이어갔다. 내가 가는 이 산책로의 끝에 작은 연못으로 둘러싸인 절경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류큐 왕국과 조선 왕국의 훌륭한 문화 교류의 역사도 남아 있다.

엔칸치를 찾아가다보니 큐케이몬 맞은편에 눈을 다시 돌려서 보지 않을 수 없는 거대 나무가 우뚝 서 있다. 아카키(赤木)라는 이 큰 나무는 전쟁 전에는 직경이 1m나 되는 몸통에 잎이 풍성한 나무였었다. 그러나 아카키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폭탄의 피해를 입어 잔가지들만 남게 되었고, 태평양에서 올라온 태풍에 말 그대로 몸통만 남아 있었다.

나무로 기능을 못하게 된 큰 나무 몸통에 뽕나무과의 식물이 기생하게 되면서 지금의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열대 나무의 거대한 크기도 놀랍지만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들의 끈질긴 생명력도 놀랍기만 하다.

찾는 이 많지 않은 연못으로 한적한 아름다움이 있다.
▲ 엔칸치 찾는 이 많지 않은 연못으로 한적한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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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을 보며 계단을 내려가니 거울같이 둥근 연못, 엔칸치(円鑑池, えんかんち)가 아름다운 자태로 눈 안에 들어왔다. 엔칸치 연못은 슈리성과 엔카쿠지(円覺寺)에서 모인 빗물과 용수를 모아 보관하기 위해 1502년에 인공으로 만들어졌다. 이 연못도 오키나와 전투 때 파괴되었다가 1968년에야 복원되었다.

연못 위에 딱 집 한 채 있는 것이 마치 한적한 별장처럼 보인다. 연못의 석재들과 연못 빛깔이 조금 어둡고 색이 바래서 그렇지 상당한 절경이다. 수심 3m인 연못의 수면 위로 아주 조용히 흐르는 물의 흐름이 보인다. 남국의 자연에 둘러싸인 한적한 경치는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 적막감은 연인이 데이트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이 연못이 나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은 연못 한 가운데에 당집처럼 세워진 붉은색 기와의 나무 건물, 베자이텐도우(弁財天堂, べざいてんどう) 때문이다. 원래 이 건물이 있던 자리는 1502년에 쇼신왕(尙眞王)이 조선의 왕으로부터 받은 고려대장경인 호우사츠조우쿄우(方冊蔵経, ほうさつぞうきょう)를 보관하던 서고가 있었다.

류큐(琉球) 왕국의 왕은 이 대장경을 화재에서 보호하기 위해 한때 토굴을 만들어 보관하기도 하였다. 당시 문화선진국이었던 조선에서 보내준 책을 류큐에서는 보물과 같이 소중히 모셨던 것이다.

조선에서 보내준 고려대장경을 이 유적에 보관하였다.
▲ 베자이텐도우 조선에서 보내준 고려대장경을 이 유적에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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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보물과 같은 불경을 굳이 물로 둘러싸여 습기가 많은 연못 안에 보관했는지는 의아하지만, 이 역사적 유적은 조선의 불경이 전해진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지로 대접받고 있다. 이곳은 류큐와 조선이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아주 의미 깊은 곳이다. 조선이 류큐에 불경을 보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었지만 오키나와를 여행할수록 오히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더욱 풍성하게 배우게  된다.

그러나 고려대장경을 보관하던 건물은 안타깝게도 백년 후인 1609년 4월에 사라지게 된다. 당시 일본 사쓰마(薩摩, さつま)의 3천명 군대가 류큐로 침입하여 슈리성을 포위한 후 쇼네이왕(尙寧王)을 항복시킬 당시에 서고는 파괴되었고 고려대장경 책은 유실되었다. 책은 사쓰마 군인들에 의해 도난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기도 한 불경과 류큐 왕국의 역사적 건물이 일본의 침입으로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건물의 내력들만 봐도 류큐의 역사는 참으로 수난이 많은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엔칸치 연못 안의 건물은 이름 그대로 베자이텐(弁財天, べざいてん) 신을 모시는 신당으로 1621년에 재건되었고, 베자이텐도우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파괴되었던 신당 건물과 다리는 1968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원래 힌두교의 물의 신인 베자이텐은 주로 연못이나 강 등 물 근처에 모셔져 있다.

이 베자이텐은 일본에서 재산의 신이자 뱃사람들이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도록 관장하는 물의 여신이 되어 있다. 류큐인들은 엔칸치 연못에 둘러싸인 이곳에 물의 여신인 베자이텐을 모신 후 바다에 둘러싸인 류큐 왕국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이 전해 준 고려대장경이 이 신당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면 조선의 선진문화를 알려주는 역사적 징표로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 여인은 베자이텐신에게 많은 재물을 내려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 기도하는 여인 이 여인은 베자이텐신에게 많은 재물을 내려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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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베자이텐도우로 넘어가기 위해 만든 구름다리가 텐녀바시(天女橋, てんにょばし)라고 불리는 다리이다. 나는 아내와 텐녀바시를 먼저 살펴본 후 다리를 건너 연못과 베자이텐도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신당 앞에서 과일을 올리고 무릎을 꿇은 채 복을 빌던 여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여인은 물의 신이자 재산의 신인 베자이텐 신에게 아마도 재운을 내려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나도 그 여인처럼 우리 가족의 복을 빌려다가 순간 동작을 멈췄다. 신당 위 나뭇가지에 앉은 산비둘기 2마리가 소란스럽게 날개로 상대를 후려치며 영역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작은 새들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끔찍할 정도로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새들이 경쟁자를 후려치는 모습도 사납기 그지없다. 새들이 보기에도 이곳은 명당자리이고 그 명당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 다 하는 이곳 새들의 행태는 마치 엔칸치의 생태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음을 시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이 가득 찬 연못 위의 무지개 다리를 지탱하는 석재에는 녹색의 이끼가 잔뜩 끼여 있다. 누렇고 이끼 긴 다리 밑에 고여 있는 불투명한 물은 잘 정돈된 폐허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신당이 생기기 전에는 이 다리가 연꽃을 보는 다리라고 불리었는데, 쓸쓸해 보이는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있으면 풍경이 훨씬 풍요로워 보이지 않을까 싶다.

엔칸치에 물이 가득 차면 이 통수문을 따라 류우탄으로 물이 흘러든다.
▲ 엔칸치 통수문 엔칸치에 물이 가득 차면 이 통수문을 따라 류우탄으로 물이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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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연못을 둘러싼 석벽에는 암문 같은 구멍이 있다. 엔칸치에 물이 가득 차게 되면 자동적으로 이 구멍을 통해 류우탄(龍潭, りゅうたん)으로 물이 흘러들게 되어 있다. 류우탄은 1429년에 류큐 왕국이 통일되면서 왕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인공 연못으로, 중국에서 온 책봉사의 의견도 연못 조성에 반영되었다.

류우탄 근처에 있는 류큐 최고(最古)의 비문(碑文)인 '안국산수화목기(安国山樹華木記)'에 보면, 류큐의 재상이 중국에 가서 배운 정원기술로 류우탄을 만들었다고 한다. 류우탄 연못 주변에 꽃이 만발하는 봄에는 연못 위에 유람선을 띄워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했다고 한다.

류우탄의 물가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던 것보다 꽤 넓은 연못이다. 호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물이 담겨 있다. 류큐 왕국 당시의 왕국 규모를 고려하면 상당한 공력이 들어갔을 인공연못이다. 류우탄은 슈리성 아래 지형에 물을 채워야 좋다는 풍수상의 목적을 위해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섬나라였던 류큐에서 부족한 빗물을 잘 담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연못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옛 류큐 왕국에서 부족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 류우탄 옛 류큐 왕국에서 부족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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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을 들여다보니 토실토실한 잉어들이 유유자적하고 있고, 자세히 보면 꽤 많은 거북이들도 헤엄치고 있다. 워낙 물고기들이 많으니 연못 앞에는 낚시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서 있다. 류우탄과 엔칸치의 운치있는 연못가에서 잠시 새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오후 시간을 즐겨본다. 나는 산책을 즐기며 나의 여정을 잠시 쉬고 있었다.

덩치도 크고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오리이다.
▲ 엔칸치 오리 덩치도 크고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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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가로운 산책을 방해하는 징그러운 오리들이 엔칸치와 류우탄 사이에 잔뜩 몰려 있다. 기본적인 체형은 오리인데 덩치가 평소 보던 오리보다 훨씬 크고 오리의 눈 주변이 칠면조같이 생겨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오리와 칠면조를 DNA 조합해서 만든 것 같이 생긴 비호감의 오리들이다.

사람들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접근하면 큰 부리로 쪼아댈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조금 무섭다. 사람들이 옆으로 다가가도 전혀 물러서거나 신경 쓰지 않는 배짱도 가지고 있다. 오리의 외모가 워낙 위압적이고 떼로 몰려다녀서 오리떼 주변을 슬글슬금 피해가며 산책을 했다.

류우탄에서 고개를 들어 산 쪽을 보니 요새같이 산 위에 자리한 슈리성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열대의 숲과 연못으로는 새들이 날아들고 있다. 이 울창한 숲을 지나 슈리성의 출구 쪽으로 나가려는데 길 오른편의 우거진 숲 속에 전쟁 때 사용하던 참호 시설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사용되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 참호의 입구였다.

안내판에 의하면 1944년 3월에 일본 남서제도 방어를 위해 제32군이 창설되었고, 같은 해 12월 지역 주민들과 오키나와 사범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이 사령부 참호를 만들었다. 5개의 갱도가 연결된 참호 안에는 사령관, 참모장, 1000여 명의 일본군, 학생의용군, 오키나와 현 출신의 군속들이 숨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사령부의 입구이다.
▲ 일본군 32군 사령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사령부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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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미군에 밀린 일본군이 본격적인 후퇴를 하기 시작하면서 사령부 참호의 중요부분과 입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당시 군인과 민간인이 뒤섞인 후퇴 행렬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슈리성이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류큐왕국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슈리성을 답사하면서 왜 이렇게 미군이 슈리성을 철저하게 공격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이 참호를 보면서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슈리성 아래로 이렇게 지하호가 넓게 퍼져있으니 미군들이 이 참호를 공격하면서 슈리성은 완전히 망가졌던 것이다.

나는 미군의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끝까지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적을 찾아나섰다. 슈리성의 세계문화유산, 소노햔우타키이시몬(園比屋武御嶽石門, そのひゃんうたきいしもん). 슈리성 입구의 석문과 주변 숲 일대를 소노햔우타키이시몬이라고 하는데, 우타키(御嶽)는 선조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종교적 성역을 의미하며 오키나와 곳곳에 우타키가 있다. 슈리성의 언덕 위로 올라가기 전 입구의 아주 찾기 쉬운 곳에 이 석문이 있었는데 그만 지나쳤던 것이다. 나는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슈리성 안내인에게 지도를 짚어가며 확인한 후 이 문을 찾아갔다.

이 석문은 목조 문짝 외에는 모두 류큐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문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이 석문은 원래 사람이 출입하던 문은 아니고, ​류큐 왕국 당시 국왕이 성을 나서서 각지를 순행할 때 선조들에게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던 성소였다. 류큐인들이 슈리 왕조를 지켜주는 왕가의 선조신들이 이곳에 머문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우타키 앞에 석문을 세운 것이다.

전쟁 중에 석문 주변이 모두 불탔지만 이 석문만이 신기하게도 유일하게 남았고 류큐 왕국의 독특한 전통종교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게 된 것이다. 이 석문 앞에만 별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내문이 서 있을 정도로 이 석문은 옛 류큐 왕국의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류큐 왕국의 왕이 선조들에게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던 성소이다.
▲ 소노햔우타키이시몬 류큐 왕국의 왕이 선조들에게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던 성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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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문은 과거 류큐 인들에게는 기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은 성지와 같은 곳이다. 나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던 문 앞에 섰다. 참 작고 소박하고 안정감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석문이다. 류큐인들은 가장 신령스러운 곳에 '우타키'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 같은 외국인이 봐도 이 우타키 주변은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창 전성기에 있던 류큐의 왕이 석문 앞에서 기원하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한 왕조의 성소 앞에서 아내와 함께 좋은 기를 받아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3년 5.20일~5.23일의 일본 오키나와 여행 기록입니다.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슈리성, #엔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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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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