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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숙, 민주화 운동의 맏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박문숙, 민주화 운동의 맏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 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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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옛 동지 몇 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박문숙 선배가 암에 걸려 위독하다는데 알고 있느냐"라고. 나는 놀랐다. 전화를 받고 박문숙 선배가 관여하고 있는 모임의 몇 분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분들 역시 놀랐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박문숙, 그는 경북영주여고·서울여대를 나와 1980~1990년대 생활협동조합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통해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경기도의회 의원, (사)한국여성농민연구소 부이사장, 6월항쟁계승사업회 이사, 민청학련정신계승사업회 운영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을 지냈다. 최근까지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박문숙, 민주화 운동의 '영웅' 김병곤의 아내

1988년 4월 28일,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으로 인한 '구로항쟁'으로 구속된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이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1988년 4월 28일,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으로 인한 '구로항쟁'으로 구속된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이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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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숙 선배는 고 김병곤의 아내이다. 김병곤은 민주화 운동의 전설이자 영웅이다. 1952년생 용띠생인 김병곤은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인 1974년 서울대 재학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는 사형 구형을 받고 검찰관과 재판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영광입니다.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투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고 김근태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조직하고 민청련 부의장으로 활동하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그는 19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을 끌어안고 싸우다 감옥에 끌려갔다. 그러나 세상의 핍박보다 더 심한 것은 암 덩어리였다, 그는 1990년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김병곤. 그는 학생운동·민청련 운동에서 민중·민생의 아이콘이었다. 그렇다고 민중의 계몽과 각성을 기다리며 당면한 투쟁을 뒤로 미루는 그런 운동가는 아니었다.

김병곤은 지도자의 품격과 기상이 우러나오는 분이었다. 또한 비전을 가진 분이었다.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만약 김병곤 선배가 살아있었다면 우리 운동과 정치에서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장대한 기골, 잘생긴 얼굴을 암세포에 먹혀 앙상한 뼈만 남은 채 서울대병원 병실에 누워 그 맑은 눈빛으로 병실을 찾은 후배들을 바라보던 김병곤 선배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운명은 왜 이리도 가혹한가

박문숙은 돌아가실 때까지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으로 일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박문숙 이사장.
 박문숙은 돌아가실 때까지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으로 일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박문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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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년이 흐른 2014년 4월 2일. 그의 아내, 그의 동지 박문숙 선배도 저세상으로 가셨다. 남편을 덮친 암세포는 기세를 잃지 않고 야금야금 박문숙 선배의 고운 가슴을 파헤쳤다. 향년 59세. 아, 운명은 왜 이리도 가혹한가.

박문숙, 그는 민주화 운동의 맏언니로 후배들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해했다. 그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운동의 선구자였다. 남편이 떠난 후에는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환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런데 요즘 집회나 모임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후배들은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은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선배는 아무도 모르게 암과 싸우고 있었다. 돌아가신 날까지 후배들은 박문숙 선배가 암과 싸우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후배들은 급히 쾌유기도회를 마련했지만 박문숙 선배는 그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에 이어 자신마저 후배들에게 걱정을 주고 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을 게다.

5일, 마석모란공원에 남편과 합장
 
박문숙 선배의 몸은 비록 싸늘한 시신이 됐지만, 이제 남편 품에 안긴다. 민주열사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먼저 간 남편 김병곤의 묘지에 합장으로 모셔진다. 24년 만에 남편과 아내, 두 영혼이 다시 만난다. 무덤은 전태일 열사와 박종철 열사 사이에 있다. 동지 문익환, 김근태도 그곳에 있다.

고 박문숙 선배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강남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4월 5일(토) 오전 7시 30분, 영결식은 그가 일했던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잔디밭에서 오전 9시에 열린다.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최경환은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으로 전남대 객원교수로 있다. 박문숙, 김병곤과 함께 민청련 활동을 함께 했다.



태그:#박문숙, #김병곤, #민청련, #민청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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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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