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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우리 앞에 열린 정보사회는 지난 산업사회의 유물들과의 갈등과 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갈등은 불가피하다. 새로운 시대의 첫 장을 위해서는 당연히 존재해야 된다.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의 본질, 논쟁의 사회적, 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이다. 논쟁을 통해 정보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정보사회학을 전공한 필자가 매주 하나씩 주요 쟁점들을 분석·정리해서 올린다. 독자 여러분의 논쟁적 참여를 기대한다. – 기자 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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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료된 SBS 인기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이 입었던 '천송이 코트'를 구매하려는 외국인들이 공인인증서 시스템 때문에 결국 포기하게 되면서 졸지에 공인인증서가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가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한 해결 의지를 보인 끝에 6월부터는 외국인들도 '천송이 코트'를 구매할 수 있게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인인증서의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여러 단체나 개인들이 줄기차게 한국형 공인 인증서 제도의 개선을 요구해 왔을 때는 계속 모르쇠 하다가 갑자기 대통령의 결단 하나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어째든 일단 바람직한 결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럼, 여기에서 질문 하나 해보자.

왜 정부는 그렇게 완강하게 한국형 공인인증서 시스템을 주장해 왔을까?

누구를 위한 공인인증서인가

우선 인증서에 대하여 알아보자. 인터넷 상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는 일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는 다르게 거래보증을 안심할 수가 없다. 내가 돈을 보내면 물건이 정말 도착할까? 그 물건에 하자가 있다면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 만들어 놓은 가상공간에서는 서로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거래를 위해 신분과 구매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인증서 제도다. 부동산 거래를 위해서 개인 신분증과 인감이 필요한 것처럼 가상공간에서 사용할 신분증과 인감을 전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인증서를 정부 주도로 만든 것이 공인인증서다.

이제 온라인상에서 공인인증서의 설치와 이용과정을 살펴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온라인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터넷에 접속해야 된다.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원하는 물건을 고른 후 결제를 하기 위해서 'Active X(엑티브엑스)'로 만들어진 공인인증서 플러그인을 다운받아 설치해야 한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보안 모듈을 설치한 후 7~8단계를 거쳐야 물건 하나를 살 수 있다.

우리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현금을 내거나 신용카드를 내고 한 번에 사는 것에 비해 온라인 거래는 시간도 더 걸리고 과정도 복잡하다. 온라인상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일종의 전자 인감 같은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갈등'

공인인증서는 글자 그대로 나라에서 인정한 전자 인감증명서다. 이 인감 증명서가 있으면 서로 믿고 거래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전제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선 공인인증서를 만든 배경부터 살펴보자.

물리적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상행위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구매자와 판매자다. 둘의 자율적 판단에 의하여 거래가 성사되고 거래 시 발생하는 모든 결과에 대하여 책임지는 주체 역시 구매자와 판매자 둘이다. 둘 사이에서 화폐와 상품이 직접 거래되기 때문에 굳이 제3자가 간섭할 이유가 없다.

국가 등 제3자가 개입하는 경우에는 거래 사후의 일이다. 국가는 당사자간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만 하면 된다.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인터넷에 의한 가상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가상공간에서도 실제 상거래가 가능해지면서 물리적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처럼 상대방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가상공간의 상거래에서 예상되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당연히 사회적 관심이 되었고 관련 기술들이 하나 둘 출시됐다. 따라서 적절한 보안 기술을 채택하여 전자 상거래에 적용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현실공간에서는 당사자간 거래에 제3자가 개입하는 일이 없는데 가상공간에서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거래에 국가가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마치 부동산 등기에 국가 기관이 개입하는 것처럼 온라인 거래에 국가 기관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온라인상에서 가방 하나 사는데 인감증명서 같은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거래하라고 국가가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 온라인 상거래에 국가가 나선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가 만든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면 구매자와 판매자간의 불확실성이 감소되어 원활한 시장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 주요 논리다. 즉 온라인 거래의 불확실성을 빌미로 국가가 자연스럽게 가상공간에 개입했다. 이제 구매자와 판매자 둘 사이의 관계에서 구매자, 국가, 판매자의 다단계로 바뀌게 되었고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국가와 판매자 둘을 상대해야 되는 처지가 되었다.

단계가 많아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전자상거래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구매자는 국가와 판매자 둘을 상대해야 된다. 둘 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입증의 책임이 구매자인 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금융기관에 보관되어 있던 개인 정보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개인들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공인인증서를 얻기 위해 제공한 정보들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개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개인이 당한 피해에 비해 보상 받을 수 있는 금액은 너무 적다. 당사자간 거래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책임 소재가 명확해지지 않고 기업들은 국가를 피난처 삼아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은 비교적 간단할 수 있다. 물리적 현실 공간에서처럼 국가는 온라인 상거래에 간섭하지 않고 당사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가 공인인증서 제도를 만들어서 민간의 상거래나 금융 거래에 사용하도록 하는 나라는 사실상 거의 없다. 개인들 거래에 국가가 개입한다는 자체가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위배되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가상공간에 개입한 이유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공간의 확장을 방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늘 공간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려는 국가권력이 새로 생긴 가상공간에서도 동일한 시스템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만든 제도들이 결국 가상공간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제도와 기술의 '갈등'

SBS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과 천송이.
 SBS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과 천송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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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간 온라인 거래에 제3자의 보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현재 공인인증서를 생성하기 위해 필요한 프로그램은 앞에서 언급한 'Active X' 다. 이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만든 웹 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터넷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브라우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공인인증서 때문에 특정 회사의 프로그램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에 한국의 윈도우와 익스플로러 점유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결국 정부의 결정 때문에 국민의 대부분이 특정 외국 기업 제품에 종속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인인증서 도입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인터넷 브라우저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익스플로러였기 때문에 익스플로러에 기초하여 공인인증서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시대 변화에 따른 대응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다양한 브라우저의 출현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고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기본적으로 확장성과 개방성을 전제로 해야 미래에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객관적 위치에서 국가의 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공무원의 경우 특정 기술에 종속되는 정책을 고집한다는 것은 기술의 유용성 여부를 떠나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결정이 부메랑이 되어 국가의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국민들의 편안한 전자 상거래를 위해 도입한 기술이 결국 국민들을 구속하는 결과로 귀속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특정 외국 기업에 포위돼 있어 다양하지도 못하고 보안에 취약한 모습만 보여준다. 사실상 독점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Active X' 프로그램 때문에 경쟁력이 있는 다른 제품들을 구매·사용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공인인증서 제도의 허점만 노출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제도와 기술은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제도와 기술이 동시에 진행되기도 했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이 계속 진행되는 시기에는 제도와 기술간 시간지체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가 기획되고 구상되는 시점과 그것들이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 시점 사이에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공인인증서 제도를 '인터넷 갈라파고스 현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 기획할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급속한 기술 발전의 속도를 못 따라가서 결국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가 된 것이다.

국가의 규제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사실상 독점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Active X' 프로그램 때문에 경쟁력이 있는 다른 제품들을 구매·사용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공인인증서 제도의 허점만 노출하고 있다.
 사실상 독점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Active X' 프로그램 때문에 경쟁력이 있는 다른 제품들을 구매·사용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공인인증서 제도의 허점만 노출하고 있다.
ⓒ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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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인증서 폐지를 둘러싼 논쟁에서 나오는 사례 중 두 가지를 들어보자.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천송이 코트'고 다른 하나는 '아마존닷컴'의 결제 방식이다. 한류 열풍 덕에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에 외국인들의 접속이 잦아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인인증서 제도 때문에 한국기업이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에 제약이 생겼고 결국 포기하게 되면서 공인인증서 제도의 수혜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비즈니스가 전 세계적으로 실시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는 당연히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도와줘야 한다. 온라인 쇼핑은 간단하게 해외에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시스템인데 공인인증서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가가 자국민을 위해서 만든 시스템이 결국 자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국가의 규제 범위를 다시 세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아마존닷컴'의 사례는 결국 온라인 쇼핑은 당사자간 판단이 제일 중요하다는 기본 사실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아마존 닷 컴'은 하나의 상징일 뿐 대부분 외국 기업들의 결제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결제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인인증서가 아니라 신용카드에 기록된 숫자뿐이다. 그 신용카드가 오용될 경우 구매자가 책임지는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미국 전자자금이체법(EFTA)에 의하면 금융사고 발생 시 기본적으로 책임의 주요 소재는 기업에 있다. 국가가 상거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감시자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소비자들에게는 규제를 최소화하고 사회적 책임이 있는 기업에게는 그에 걸맞은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이 대부분 국가들의 역할이다.

소위 '천송이 법'으로 불리는 'Active X' 폐지 관련 법안 명칭 중 하나는 '국제표준에 따른 이용자 중심 웹 환경 조성 촉구 결의안'이다. 여기서 언급된 국제표준은 '국가의 불개입'을 전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용자 중심의 인터넷 환경이다. 글로벌하게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특정 국가에서 통제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홍열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독문학, 국문학을 공부했고 성공회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 과정 후 <정보네트워크 변화에 따른 가상공간의 확장과 권력관계의 재구성>으로 학위 취득했다. 저서로는 <축제의 사회사> (2010. 한울), <디지털 시대의 공간과 권력>(2013, 한울)이 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성공회대와 명지대에서 '과학기술의 사회학'과 '정보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태그:#공인인증서, #엑티브엑스, #천송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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