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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막내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아들보다 내 키가 머리 하나는 크다.
▲ 2011년 2월 초등학교 졸업 2011년 막내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아들보다 내 키가 머리 하나는 크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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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막내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누나가 둘이나 있어 나름 아이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던 막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탈 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막내가 대견스러웠다.

제주도에서 전학을 와서 걱정도 했는데 막내는 적응을 잘해줬다. 제주도에서 열심히 뛰어놀았던 까닭에 운동을 잘했다. 운동을 잘한다는 것은 아이들과의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위로 누나가 둘이나 있어 여자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스스럼없이 친함'이 어색했던 도시의 아이들은 '내 여자친구와 친하다'는 생각을 낳았고, 막내를 집단으로 위협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도 원만하게 잘 해결됐다. 이 일화가 막내의 초등학교 생활 중 부모 속을 졸이게 했던 일 중 하나였다.

그냥 밝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막내는 중학교에 입학하자 여느 아이들처럼 학업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애늙은이마냥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면서도 잘 지냈다. 그렇게 막내의 중학교 시절은 부모 마음 졸이게 하는 일 없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아비의 입장에서는 미안하기만 하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키웠다는 것, 지금 이 시대에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입시교육에 철저하게 적응된 인간으로 키웠다는 뜻이니 말이다.

대안학교에 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결국 자율형사립고를 택했다. 막내는 이것도 잘해나가겠지만, 나는 막내에게 큰 짐을 지워주고는 '너 혼자 잘해봐라' 하고 등을 떠민 격이 돼버렸다.

"고등학교 3년만 죽었다 생각해"... 이럴 수가

3년 전 초등학교 졸업때와 비교해 보니 많이 컸다. 이젠 아빠와 키가 얼추 비슷하다.
▲ 2014년 2월 중학교 졸업 3년 전 초등학교 졸업때와 비교해 보니 많이 컸다. 이젠 아빠와 키가 얼추 비슷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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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막내가 중학교를 졸업했다. 막내만 애늙은이 같은가 싶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이 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마냥 덩치도 크고 겉늙었다. 이미, 인생의 쓴맛을 다 본 것 같은 표정들. 이런 느낌은 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획일적인 입시교육이라는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일 게다.

유치원이라는 작은 감옥에서 초등학교라는 더 큰 감옥으로,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라는 감옥에서 직장이라는 감옥으로…. 이렇게 점점 더 큰 감옥으로 이동하며 인내심을 테스트하듯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회의감.

아직 고등학교 교과서도 받지 않았는데, 이미 학원에서는 고등학교 수업을 시작한 지 오래다. 학교에서도 입학식 전인데 아이들을 볶나 보다. 오로지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이 고등학교의 목적인 것처럼 강요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막내에게 "고등학교 3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하자"는 말밖에 못한다.

그 좋은 청춘의 시절, 그 시간을 왜 죽은 듯 입시를 위한 공부만 해야 할까? 다양한 공부가 있는데, 다양한 꿈이 있는데…. 왜 그 꿈들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다 헛된 꿈이 돼야 한다는 말인가.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끊임없는 순환

졸업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다 좋은 것일까? 아이들은 더 큰 경쟁의 감옥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 졸업장 졸업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다 좋은 것일까? 아이들은 더 큰 경쟁의 감옥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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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졸업식 세태가 바뀐 탓이기도 하겠지만 홀가분해 하는 것 같다. 마치 몇 번의 탈피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애벌레가 예정된 탈피를 거친 것처럼 덤덤해 보였다.

졸업식장 여기저기에 보이는 경찰들도 졸업식장의 새로운 모습이다. 이전처럼 교복을 찢거나 밀가루를 뿌리거나 하는 풍광은 없다. 그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졸업식장이 왜 이리도 덤덤할까?

그것은 중학교라는 감옥을 졸업하고 나면 고등학교라는 더 큰 감옥으로 가게 된다는 압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졸업이라는 것, 그것이 이런 것이 됐구나 생각하니 씁쓸하다.

고등학교 졸업식도 다르지 않겠지. 대학을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 세상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재수를 한다. 그들은 대학이라는, 혹은 학원이라는 감옥으로 또 들어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학을 나오면? 직장에 들어가면? 똑같다.

입시교육에 찌들어 있는, 학연과 지연에 얽매여 있는 나라는 이렇게 아이들의 삶을 재미없게 만든다. 오로지 한 가지 꿈만 꾸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꿈밖에 없으니 경쟁에서 뒤처지면 아예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자신의 모든 꿈을 포기해야 한다.

경쟁구도에서 살아갈 막내 생각하니...

졸업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 교실 앞 유리에 아이들이 갇혀는 듯 하다.
▲ 교실 졸업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 교실 앞 유리에 아이들이 갇혀는 듯 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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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줘야 할 졸업식, 나는 아비가 돼 마음껏 축하해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3년, 그 지옥 같은 3년을 어찌 보낼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금보다는 숨통이 트였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그보다 더한 경쟁구도 속에서 막내가 살아갈 생각을 하니 갑갑했던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고등학교 3년도 결국에는 지나갈 터이고, 막내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고등학교 생활도 잘 극복해 갈 것이다. '일류대학' '좋은 대학'이 능사가 아니라 자기의 꿈을 찾는 일에 열중하라고 할 테다. 그 말이 위선처럼 느껴지고, 다른 아이들이 다 가는 길이니 자기도 그 대열에서 경쟁하겠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중학교 졸업식 때를 생각해본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냥 졸업한다는 것만 좋아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돈 있는 아이들과 없는 아이들,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의 서열이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개천에 용 난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벽을 스스로 깨기에는 너무 두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도 같았다.

더 커서 알게된 것은 자본의 사회에서 개인이 공부를 잘해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공부를 못해도, 자본의 힘을 가진 집안의 자식들은 저마다 한 자리씩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도 축하한다.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나이, 살아보지 못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해줘야 할 일이니까.


태그:#졸업, #입시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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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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