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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리 재미있고, 즐거운지. 그때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행복했었지?
▲ 유치원 발표회 때 무엇이 그리 재미있고, 즐거운지. 그때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행복했었지?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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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시작된 이듬해 5월, 아빠가 출장 가 있는 사이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말, 아빠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 IMF가 일 년만 빨리 왔어도 감히 셋째를 나을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다.

딸이 귀했던 집안이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아들 욕심이 있었다. 나는 늘, 함께 목욕탕에 갈 수 있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엄마는 엄마대로 고추 달린 아들을 원했지. 그렇게 넌 선물처럼 우리에게 온 거야.

작은 시골학교. 1학년 신입생이 전부 모였었더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입학식에 참석했던 너를 잊지 못한다.
▲ 초등학교 입학식 작은 시골학교. 1학년 신입생이 전부 모였었더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입학식에 참석했던 너를 잊지 못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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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네 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이사를 했단다.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는 집, 잔디가 깔린 학교운동장, 그리고 바다, 마당에 있는 팽나무와 배롱나무와 배나무. 너는 그 모든 것들을 마음껏 즐기고 호흡했더란다. 뛰어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좋아했어. 열심히 뛰어다닌 덕에 어려서부터 몸이 단단했지. 근육이 너무 단단하면 키가 안 큰다고 걱정을 할 정도로 말이야.

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도 너는 잘 웃지. 그 웃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
▲ 개구쟁이 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도 너는 잘 웃지. 그 웃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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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도 너는 금방 아이들과 친해졌단다. 축구는 물론이고 운동 감각이 뛰어난 덕분에 금방 아이들과 친해졌고, 한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도 했지. 틈만 나면 서울에서도 축구와 농구를 했지. 아마도, 서울이 답답했을 것이다.

천연잔디 구장에서만 축구를 하다 맨땅에서 축구를 하면서 다리가 까지는 일도 많았지만, 초등학교 내내 유소년 축구단에서 열심히 뛰었지. 그때, 너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축구부 코치도 사인을 보냈지만, 아빠는 운동을 취미로 삼았으면 싶어서 거절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아빠로서 당연히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 꿈도 아니고 네 꿈인데 말이야.

어렸을 적 넌 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단다. 팔에 깁스를 하고도 얼마나 뛰어다니던지.
▲ 개구쟁이 어렸을 적 넌 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단다. 팔에 깁스를 하고도 얼마나 뛰어다니던지.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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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었고, 중 3이 되니 이젠 아빠만큼이나 훌쩍 컸구나. 지난 12월 초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진로로 고민하는 중에 자립형사립고에 가기로 하고 지원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다. 중학교 때도 그렇게 뛰어놀기 좋아하는 네가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안쓰러웠고, 그런 현실이 너무 싫었단다. 그래도 잘 자라준 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때는 작았지만, 축구를 잘했었지. 슟돌이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축구하면 잘하는 너를 보면 부럽다.
▲ 축구 그때는 작았지만, 축구를 잘했었지. 슟돌이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축구하면 잘하는 너를 보면 부럽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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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꿈대로 목욕탕에 함께 가서 때를 밀어주고, 네가 아빠의 등을 밀어주면 이게 아들 키우는 맛이구나 싶었지. 이젠, 네가 아빠 옷을 입고, 아빠가 네 옷을 입을 정도로 몸이 비슷해졌구나. 네 옷을 입고 나가면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라며 패션감각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 너는 '구닥다리' 아빠 옷을 입어도 젊음 자체가 빛나므로 잘 어울리고.

아빠따라 촛불집회도 참석하고, 어쩌면 이때부터 너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에도 눈을 떴는지 모르겠다.
▲ 촛불집회 아빠따라 촛불집회도 참석하고, 어쩌면 이때부터 너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에도 눈을 떴는지 모르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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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구나. 아직도 아빠는 화가 난다. 중3 때, 제도교육이 대안이 아니라 생각해서 대안학교도 알아보고 했는데, 결국은 그냥 일반학교, 그것도 자립형사립고로 보낸 것이 벌써 후회가 되는구나.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중인데, 이번 주(6일)부터 고등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소집을 하고 시험을 보더니만, 아예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하게 하더구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후 1시, 밥 먹고 학원에 갔다 오면 밤 10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빠도 직장생활을 하지만, 그렇게 일하라면 하지 못 할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다 그래, 더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뭘" 하는 말에 아빠는 가슴이 먹먹하다. "3년만 이 악물고 공부하지 뭐. 걱정하지 마, 아빠"라는 말에도 억장이 무너진다.

초등학교 졸업식, 그때만 해도 머리 하나는 작던 녀석이 이젠 아빠하고 키도 몸무게도 거의 비슷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 졸업식 초등학교 졸업식, 그때만 해도 머리 하나는 작던 녀석이 이젠 아빠하고 키도 몸무게도 거의 비슷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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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아빠가 미친 것 같다. 이런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교육 체제에 너를 쑥 밀어놓고 견디길 바라니 말이다. 우리 아들은 씩씩하게 잘 이겨낼 거라고 무책임하게 방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아이들에게 뒤처질까 봐 두려워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아빠 위신 세워주는 것 은근히 바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성적이 안 좋으면 얼굴 굳어지고, 고리타분하게 "아빠는 말이야..."하며, 검증할 수도 없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했던 옛날 이야기나 해대고. 이미 너는 아빠의 이 얄팍한 마음을 다 간파했을 것이다.

지난 여름 여행길에서 담은 사진, 이젠 완벽한 남자가 되었다.
▲ 여행 지난 여름 여행길에서 담은 사진, 이젠 완벽한 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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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자기 아들을 그 속으로 쑥 밀어 넣고 방관하는 아빠. "대학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도 누나들이 제법 좋은 대학 다닌다고 뻐기는 아빠. "우리 집안에도 SKY 출신 하나 쯤은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에둘러 압박을 넣는 아빠. 놀면서 공부하라고 하면서도 노는 꼴을 못 보는 아빠. 고작 밤 10시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너를 보면서 "수고했다"는 말 밖에는 못 하는 아빠. 미친 아빠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을 것이다.

전주여행을 할 때 작은 누나와 함께. 큰누나에게는 절절 매는 녀석이 작은 누나는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둘이 잘 통해서 그런다는 거 알아.
▲ 여행 전주여행을 할 때 작은 누나와 함께. 큰누나에게는 절절 매는 녀석이 작은 누나는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둘이 잘 통해서 그런다는 거 알아.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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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빠가 대학 시절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제도교육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더란다. 그런 문제들을 모르면서 이러면 몰라. 제도교육의 한계와 입시교육의 문제점과 사교육의 문제, 그 모든 것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그 악마 같은 체제의 아가리로 너를 밀어 넣었으니 미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니?

지난 가을, 큰누나 학교 앞 커피숍에서. 얼른 대학생이 되고 싶어하지 말고, 때가 되면 되는거니까 지금 네 나이의 삶을 즐기면 좋겠다. 그걸 아빠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 아들 지난 가을, 큰누나 학교 앞 커피숍에서. 얼른 대학생이 되고 싶어하지 말고, 때가 되면 되는거니까 지금 네 나이의 삶을 즐기면 좋겠다. 그걸 아빠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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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일하고 집에 들어가도 녹초가 되는데, 너는 끝도 보이지 않는 경쟁에 시달리며 점수와 싸워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니? 중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고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그것도 겨울방학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이런 나라, 이런 제도교육에 대해 침묵하는 아빠는 미친 게 틀림없다.

아들아, 미안하다.
그냥 남들이 다 그 길을 간다고 억지로 가지 말고, 너무 힘들면 뛰쳐 나와라. 지금은 이렇게 비겁하게 관망하고 있지만, 언제나 아빠는 네 편이 될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태그:#아들, #편지, #입시교육, #제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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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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