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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신의 출발을 알리는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연일 흥행가도를 올리고 있다. 복받아쳐오는 감정을 부여잡으며 영화를 직접 봤다. 엔딩컷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이었다.

진솔했으나 불 같았던, 그래서 정적(政敵)도 많았던 '노무현'. 작년 2월 겨울날 찾아간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올해 12월 마지막 문턱에 다시 찾았다. 이제는 찾아가도 불러봐도 나오지 않는 대통령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은 조금은 서러운 일이지만 <변호인>은 나를 다시 봉하마을로 인도했다.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겸 정부 대변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 봉하마을 묘역 앞 꽃다발에 함께 있는 영화 <변호인> 티켓. <변호인>은 다시금 봉하를 찾게하는 묘한 힘을 가진 영화다.
▲ 봉하마을 묘역 앞 꽃다발에 함께 있는 영화<변호인> 티켓.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겸 정부 대변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 봉하마을 묘역 앞 꽃다발에 함께 있는 영화 <변호인> 티켓. <변호인>은 다시금 봉하를 찾게하는 묘한 힘을 가진 영화다.
ⓒ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겸 정부 대변인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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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무현 대통령 생전에 봉하마을을 찾아가본 적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곳도 군대였다. 토요일 아침 일과는 국방TV에서 방송되는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한주간 피곤했던 일과를 마치고 맞는 첫 휴일 토요일의 나른함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포대장의 한마디와 함께 사라졌다.

"지금 뉴스 틀어라,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다."

포대장의 말은 나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내무반 인원들은 포대장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긴급속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전했다. 내무반에서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날이 2009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다.

봉하마을 초입에 세워져있던 추모관. 내부에는 노무현 대통령 관련 자료 및 향을 피울 수 있는 추모공간. 그리고 방문객들이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남긴 메시지들로 가득차 있었다.
▲ 2012년 2월의 봉하마을 풍경. 봉하마을 초입에 세워져있던 추모관. 내부에는 노무현 대통령 관련 자료 및 향을 피울 수 있는 추모공간. 그리고 방문객들이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남긴 메시지들로 가득차 있었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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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당시의 피켓과 짐작컨대 노 전 대통령에 장례 때 사용했을 글귀가 보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항상 논란의 한가운데 놓여진 노 전 대통령의 운명을 언젠가는 조금 풀어줄 날이 올것인가 의문이다.
▲ 추모관 내부에 있던 글귀와 피켓. 탄핵당시의 피켓과 짐작컨대 노 전 대통령에 장례 때 사용했을 글귀가 보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항상 논란의 한가운데 놓여진 노 전 대통령의 운명을 언젠가는 조금 풀어줄 날이 올것인가 의문이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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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스런 서거 소식은 나라 안을 여러 감정으로 뒤엉키게 했다. 1차 정기휴가를 받고 나온 날. 들뜬 맘으로 터미널에 도착해 수원역에 하차하는 순간 다시 맘이 무거워졌다. 수원역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육교에는 노전 대통령을 기리는 노란 리본이 만개해 있었다.

나도 한마디 마음을 써 전해보고 싶었지만 공무원의 의무 중 정치활동 금지 조항 때문에 부끄러운 손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대신 전역하면 꼭 봉하에 가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다. 입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달고 살던 대한민국 국민 중 한 명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빠른 2003년 생(10살)입니다. 제가 대통령님을 한번도 보지 못한게 저는 너무 아쉽네요. 비록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것 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하늘나라에서도 행복하시길 바라구요. 만약에 살아 계신다면 대통령님과 함께 손잡고 길도 걸어보고 싶구요. 그리고 또... 노무현 대통령님 기타치는 모습도 보고싶네요... 사랑합니다. ♥ 2011.11.13일 김지연 올림.
▲ 추모관 한 쪽 벽면에 붙어있던 방문객의 메모. 노무현 대통령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빠른 2003년 생(10살)입니다. 제가 대통령님을 한번도 보지 못한게 저는 너무 아쉽네요. 비록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것 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하늘나라에서도 행복하시길 바라구요. 만약에 살아 계신다면 대통령님과 함께 손잡고 길도 걸어보고 싶구요. 그리고 또... 노무현 대통령님 기타치는 모습도 보고싶네요... 사랑합니다. ♥ 2011.11.13일 김지연 올림.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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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노무현 대통령님 보고 싶습니다. 2번째 방문이군요. 저의 꿈은 CSI에 들어가 가던 법대 공부를 하여 대한민국으 빛내겠습니다. ㅎㅎ 닮지 않았네요. ㅎ 하지만 얼굴의 팔자주름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님이란걸 알아볼 수 있어요. 사랑합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있는 나의 대통령. 2012 2.12 일요일 1시 22분경에. 양성조. 박주원
(우) 노무현 대통령님 아녕하세요? 이곳에 2번째 방문이예요. 사실 노무현 대통령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헤헷! ♥ 평안하십시오. 2/12 하늘에 계신 노무현 대통령님께. 전치헌 드림.
▲ 추모관 한 쪽벽면에 붙어있던 방문객들의 메모. (좌) 노무현 대통령님 보고 싶습니다. 2번째 방문이군요. 저의 꿈은 CSI에 들어가 가던 법대 공부를 하여 대한민국으 빛내겠습니다. ㅎㅎ 닮지 않았네요. ㅎ 하지만 얼굴의 팔자주름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님이란걸 알아볼 수 있어요. 사랑합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있는 나의 대통령. 2012 2.12 일요일 1시 22분경에. 양성조. 박주원 (우) 노무현 대통령님 아녕하세요? 이곳에 2번째 방문이예요. 사실 노무현 대통령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헤헷! ♥ 평안하십시오. 2/12 하늘에 계신 노무현 대통령님께. 전치헌 드림.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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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MB정부 마지막 해. 대한민국 구석구석 혹독하고 시린 겨울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3년 전의 약속을 지키러 봉하마을로 향했다. 진영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 마을에 도착했다.

정말 추웠다. 을씨년스럽게 추웠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니면 시대가 추워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추웠다. 낯선 이방인인 나는 얼른 눈에 당장 보이는 건물로 피신했다. 그 건물은 봉하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추모관이었다.

낡은 오디오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불렀던 '상록수'가 흘러나오고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과 그림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전국 팔도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은 각자가 가진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았다. 방문객들을 위해 출입구 바로 옆에 비치되어 있던 믹스커피를 타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노 전 대통령의 육성이 흘러나오는 오디오 앞에서 시선을 멈추고선 멍석 마냥 멈춰 버렸다.

제목에 '소신 정치인' 노풍.단풍에 날개짓. 부제에 '노무현은 다르다' 경선 치르며 힘 발휘. '낡은정치 청산' 호응 인터넷 바람몰이라고 기록돼있다.
또 선거 당시의 긴박함을 표현한 '피말리는 승부수 '역전드라마'', 노.이 지지율 1년내내 엎치락뒤치락 등도 기록돼있다.
선거 승리의 기운이 의기양양하지만 참여정부 5년을 돌아보면 분명 공도 있겠지만 과도 인정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참여정부가 민주세력에게 던져준 숙제다.
▲ 추모관에 전시돼있던 선거 다음날 승리 소식을 전한 한겨레 기사. 제목에 '소신 정치인' 노풍.단풍에 날개짓. 부제에 '노무현은 다르다' 경선 치르며 힘 발휘. '낡은정치 청산' 호응 인터넷 바람몰이라고 기록돼있다. 또 선거 당시의 긴박함을 표현한 '피말리는 승부수 '역전드라마'', 노.이 지지율 1년내내 엎치락뒤치락 등도 기록돼있다. 선거 승리의 기운이 의기양양하지만 참여정부 5년을 돌아보면 분명 공도 있겠지만 과도 인정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참여정부가 민주세력에게 던져준 숙제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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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관에서는 대통령 시절 신년 축사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아직도 살아있어 반갑게 방문객들을 맞이해줄 것 같은 노 전 대통령의 따뜻한 신년 인사말을 자리에 앉아 경청했다. 추모관을 나오는 순간 세차게 눈발이 쏟아졌다. 마치 봉하 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하늘이 내려주는 눈 같기도 했고 뒤늦게 방문한 못난 나의 마음이 흘리는 눈물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추모글들이 새겨진  바닥돌들을 읽어가다 보면 바위 하나만 봉긋이 서있는 묘역에 닿는다. 차마 묘를 사진에 담을수는 없었다. 도저히 카메라로 담아내기에는 내 자신이 노 전 대통령 앞에 부끄러워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눈으로만 기록했다.

2년이 흐른 뒤 찾아간 자리에는 더이상 바람개비가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2012년 4.19경선 당시 친노세력은 이 바람개비 이미지를 선거에 곧 잘 활용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계속해서 이 조형물이 남아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 봉하마을 묘역 근처에 있던 바람개비들. 2년이 흐른 뒤 찾아간 자리에는 더이상 바람개비가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2012년 4.19경선 당시 친노세력은 이 바람개비 이미지를 선거에 곧 잘 활용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계속해서 이 조형물이 남아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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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도 봉하마을을 빠지고 나오면서부터 눈발이 나리기 시작했다. 역에 도차할 즈음에는 꽤 쎈 진눈깨비로 변했다. 마치 봉하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하늘이 내려주는 눈같기도 했고 뒤늦게 방문한 못난 나의 마음이 흘리는 눈물같기도 했다.
▲ 진영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내리는 눈을 찍다. 우연히도 봉하마을을 빠지고 나오면서부터 눈발이 나리기 시작했다. 역에 도차할 즈음에는 꽤 쎈 진눈깨비로 변했다. 마치 봉하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하늘이 내려주는 눈같기도 했고 뒤늦게 방문한 못난 나의 마음이 흘리는 눈물같기도 했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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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7일. 지난 약 2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총선이 있었고 대선도 있었고 보수정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 사이 봉하마을도 작게나마 변화가 있었다.

우선 2년 전 찾은 마을 입구에 있던 추모관은 보이지 않았다. 철근에 간신히 콘크리트가 조금씩 붙어 있어 아직 철거가 진행중인 듯 보였다. 대신 봉하마을의 농산물을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정식으로 마련된 추모의 집은 당연히 아직도 운영 중이다).

주변 풍경 및 위치도 적지만 변화가 있었다. 지난 겨울 때도 있었던 묘역 앞의 수반이 텅비어 있었다. 또한 묘역 근처의 노란 바람개비들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자취들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위) 2012년 2월의 모습.
(아래) 2013년 12월의 모습.
결빙의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원래 구성도에도 나와있는 수반이 없어진 사실은 의아스러웠다.
▲ 2년만에 찾은 봉하마을에 수반이 없어졌다. (위) 2012년 2월의 모습. (아래) 2013년 12월의 모습. 결빙의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원래 구성도에도 나와있는 수반이 없어진 사실은 의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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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에 올라보지 못한 바위에 올라보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 부엉이 바위에 올라 바라본 봉하 묘역 및 마을 전경. 2년전에 올라보지 못한 바위에 올라보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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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방문에는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부엉이바위까지 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는 지인들과 함께 부엉이 바위까지 올랐다. 위에서 바라본 봉하의 풍경은 가을이 제맛이다. 경작지에 메시지를 그려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쓸쓸하고 텅빈 풍경은 고독하다.

방문객들을 위해 정비되어 있는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고 나니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몇 달 전 민주당에서 '귀태' 발언이나 '전철' 발언이 터져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올해 초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일간베스트 (일베)'의 '운지'라는 표현이 논람이 되었다. (물론 이 두 발언을 기계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놓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부엉이 바위에 오르니 JTBC 썰전에서 이철희 두문 정치전략 연구소장이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친노나 친박이나 서로간에 박정희 및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고 신중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부엉이 바위에 오르고 보니 그 말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됐다. 뺄셈의 정치로는 지금의 분열을 치유하기 어렵다. 힘들지만 천천히 거북이 걸음이라도 상대방을 품고 가는 덧셈의 정치가 필요하다. 대통령 집권 후 자신의 정치인생을 이끌어온 투쟁을 통합의 정치로 전환하려 노력했다는 노 전대통령의 발언은 노무현 정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초토화시키고자 했던 '부림사건'의 변호사 자리를 어설픈 호기심으로 맞아, 57년간 구금돼 구타, 고문으로 온 몸이 시퍼랬던 한 학생을 교도소에서 만난 뒤. - 노무현 추모관 인용.
▲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초토화시키고자 했던 '부림사건'의 변호사 자리를 어설픈 호기심으로 맞아, 57년간 구금돼 구타, 고문으로 온 몸이 시퍼랬던 한 학생을 교도소에서 만난 뒤. - 노무현 추모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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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 그리고 하나의 국가를 위해서 경쟁적으로, 국민을 더 가까이서 보필하기 위해서 협력하여서 일해야 하는 것이 정치가 아닐까?
▲ 봉하마을 묘역 바로 옆에 솟아있는 태극기와 계양대.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 그리고 하나의 국가를 위해서 경쟁적으로, 국민을 더 가까이서 보필하기 위해서 협력하여서 일해야 하는 것이 정치가 아닐까?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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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봉하마을, #노무현, #변호인,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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