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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관 밖을 나서자마자, "영화 너무 잘 만들었다"며 "서너 번 눈물 흘린 것 같다"고 운을 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관 밖을 나서자마자, "영화 너무 잘 만들었다"며 "서너 번 눈물 흘린 것 같다"고 운을 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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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원짜리 '호화요트'

- 조세소송으로 돈을 많이 벌어 요트를 산 건가요?
"부산시 요트협회 사무국장이 경남고출신 최아무개였어요. 그 친구가 사무실에 놀러오더니 '영감님 요트 안 배울랍니까?' 해서 요트쪽에 입문했어요. 문변(1980년대 초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합류한 문재인 변호사를 지칭)은 그런 근방에도 안 가는 사람이구요. 노변처럼 다혈질 성격은 혹 하거든요. '돈도 얼마 안드니까 합시다' 해서 일요일마다 요트를 배웠어요.

재판에만 얽매이다가 일요일만 되면 요트를 배우다보니 재밌거든요. 토요일에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자기 요트가 필요한 거예요. 88올림픽에 자기가 대표로 나갈 거라고도 했어요. 심지어 수요일에 재판이 있는데도 광안리에서 요트를 탔어요. 그것을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 경선에서 써먹은 거예요. 장인을 간첩으로 몰아붙이고, 요트는 억대 요트라고 하구요. 그 요트는 당시 80만 원에 주고 산 거예요."

- 일반사람들이 볼 때 80만 원짜리 요트도 호화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 노변이 경선 때 서민후보라고 하니까 그걸 공격하기 위해 '호화요트'를 써먹은 거죠.
"왜 서민후보라면서 요트를 했냐? 바로 그거죠. 영화에서 보듯 평탄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김광일 변호사가 부림사건 관련자 면회 한번 다녀오라고 하잖아요. 그때 관련자가 송병곤이라고. 그 애한테 가보니 손발톱이 시퍼렇게 다 멍들었어요. 키는 작제 벌벌 떨더라고 갔다와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면회 갔다 와서 이래요. '나 변호사 안해. 나 여기에 치중할 거야. 정의감 갖고 해야 한다. 억울하게 용공분자로 몰 수 없다. 절대로 이럴 수 없다.'

부림사건은 1981년 3월에 전두환 5공 군사독재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세력을 탄압하는 시기에 일어난 용공조작사건이에요. 학생도 있고 교사도 있는 독서모임이었어요. 그런데 잡아다가 사건을 만들었죠. 수십일 동안 잡아놓고 면회도 안되고 통닭구이, 물고문 등 고문을 했어요. 그때 잡혀가면 죽는 거예요. 국회의원도 잡아가서 조지는 판국인데요 뭐."

- 그 부림사건이 노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거죠.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처음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선 게 아니에요. 고문당한 학생을 접견하고 나서부터 완전히 인권변호사 길을 걷게 됩니다. 면회를 한두 번 갔다 와서 문닫고 아무도 만나기 싫다며 고민에 빠졌어요. '우째 인간이 이럴 수 있나?'

자기는 대학에 안가봤으니 '독재타도하자'는 데모를 안해봤잖아요. 그래서 면회갔다와서는 쟤들이 읽은 책을 보는 거예요. 그것을 봐야만 법정에서 변론할 수 있고, 피고인 심문사항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붉은 서적이 아닌 붉은 서적'을 봐요. (영화에 나오는 노변의) 변호과정은 다 맞아요. 밤새도록 집에서 심문사항 만들어오고. 영화에 나온 내용 그대로 정말 열정을 갖고 변호했어요. 당시 어느 변호사가 그렇게 하겠어요?"

- 영화를 보면 부림사건을 맡기 전에는 "데모나 시위로 바뀌는 말랑말랑한 세상이 아니다"라고 외치잖아요.
"그 말이 맞긴 맞아요. 전두환이 정권 잡은 그 시간에 우리는 술이나 먹자 해서 탁주 먹고 양주 먹었죠. 우리가 개업해서 이 사건(부림사건) 나기 전까지는 데모하면 데모하는갑다, 경찰이 왔다갔다 하면 경찰이 왔다갔다 하는갑다, 이렇게 평온하게 생각했어요. 단 김광일 변호사 등 두세 명의 변호사만이 시국사건을 맡았어요."

돼지국밥과 삼계탕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속 주인공인 송강호가 연일 먹었던 돼지국밥과 '소맥'이 저절로 생각난다"며 돼지국밥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 속 돼지국밥 식당 에피소드는 영화적 허구라며 노 전 대통령은 삼계탕을 참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속 주인공인 송강호가 연일 먹었던 돼지국밥과 '소맥'이 저절로 생각난다"며 돼지국밥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영화 속 돼지국밥 식당 에피소드는 영화적 허구라며 노 전 대통령은 삼계탕을 참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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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노변이 부림사건을 맡자 정치부 기자 친구가 "너 정치하려고 하느냐"라고 했는데.
"실제로 <한겨레> 기자가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요. 그 사건 이후 노변은 데모하는 곳곳에 다녔어요. 노동자들이 노동법을 부르짖으니까 노동법을 공부하기 위해 영남 노동운동본부에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데려왔어요. 그래서 '니는 노동문제만 해라'고 했어요. 그때 문변도 같이 있었지요. 노변이 달변이에요. 문변은 좀 어눌한데 노변은 거침이 없어요. 노변이 연설하면 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았어요. 그렇게 노동자를 대변하며 부산, 경남을 다녔으니 기업에서는 얼마나 노변을 죽이고 싶었겠어요? 그러니 기업에서 우리한테 사건을 줄 리 없죠."

- 노동사건, 시국사건은 돈이 안되잖아요.
"일반사건 착수금 30만 원 받을 때 노동사건, 시국사건은 10만 원 받았어요. 그럼 일이 적나요? 일반사건 같으면 서면을 2-3쪽 쓰면 되는데 노동사건, 시국사건은 양도 많아요. 또 면회도 가야 해요. 그러니 일반 변호사들은 안 맡으려 하지요. 반면 노변과 문변은 정의감에서 그걸 한 거지요."

-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돈 벌이는 시원치 않았겠네요.
"정말 없었지요. 그때만 해도 사모님들이 어려웠어요. 다른 변호사들 사모님처럼 자가용에 밍크코트 그런 거는 생각도 못했죠. 시장통에 가서 직접 시장을 보는 수준이었죠."

- 국밥집 아주머니는 실제 모델인가요?
"국밥 장사는 안 했어요. 아들이 고문 당한 그냥 50대 엄마였어요."

- 영화 속 국밥집 아줌마가 살아계셔서 영화를 보시면 그 분도 눈물나겠어요.
"50대 엄마가 지금 80대 할매예요. 이 분이 참 별났어요. 재판할 때마다 쫓겨나오고. 구속된 애들이 16명인가 18명인가 그랬는데 시국사건과 관련해 엄마들이 모이면 50명이상 모여요. 그 당시에는 40대 엄마들이었는데 지금은 70, 80대가 됐어요. 그 엄마들이 아직까지 모이잖아요. 어버이연합회 모이듯이(웃음)."

- 노변과 관련해 돼지국밥이 주는 묘한 이미지가 있어요.  
"국밥 먹고 도망갔다는 거는 만들어진 이야기구요.  영화에 나오는 '국밥집 아들'의 실제 모델은 있었어요. 키가 제일 작았어요. 그러니 고문을 당했을 때 얼마나 비참하게 보였겠어요."

- 부림사건 이후에 노변 사무실이 직장이 됐군요.
"시국사건 관련자들은 직장에서도 안받아줬어요. 그래서 1984년도에 우리 사무실에 주사로 데리고 와서 지금까지 법무법인 부산에 있어요. 나머지는 직장도 없이 '비리비리' 지내다가 노변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청와대로 불렀지요. 그때 야당서 386만 데리고 정치한다고 했죠. 그때도 저랑 같이 사무실을 지켰어요."

- 그 분 결혼식 주례도 노변이 직접 섰다고 하던데요.
"노변이 마흔 서너살 때 처음 주례를 섰어요. 재밌는 게 우리 사무실에 누가 있었냐 하면, 권여사 고종사촌 동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눈맞아서 결혼했어요."

- 노변도 영화에서처럼 돼지국밥을 잘 드셨나요?
"(노변은) 삼계탕을 아주 좋아했어요. 청와대 가서도 삼계탕을 잘 드셨잖아요. 그때는 삼계탕이 1300원 할 때였거든요. 그때 봉급은 30만 원, 착수금도 30만 원이던 시절이었어요."

- 본인은 돼지국밥 좋아하세요?
"영화보니까 '소맥'이 먹고 싶더라구요. 저게 맞아. 저렇게 법정에서 싸우고 기록을 던지고….  노변이 법정에서 판검사하고 얼마나 싸움을 했다고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정의는 절대 양보하지 않구요, 불의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어요. 법정에서는 정말 그랬어요."

"이 빨갱이 새끼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배경이었던 '부림사건'의 실제 피해자 송병곤 씨(사진 맨 왼쪽)와 노 전 대통령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부산지방변호사회 사무직원회 초청 행사에서 '법무법인 부산' 직원인 송병곤, 문재인 변호사, 장원덕 사무국장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영화 배경이었던 '부림사건'의 실제 피해자 송병곤 씨(사진 맨 왼쪽)와 노 전 대통령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부산지방변호사회 사무직원회 초청 행사에서 '법무법인 부산' 직원인 송병곤, 문재인 변호사, 장원덕 사무국장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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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는 차동영 경감이 송변에게 "이 빨갱이 새끼야!"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런 거는 없었어요. 다만 그런 정도의 공격은 있었어요. 그때 담당검사가 최병국이에요. 최병국은 나중에 검사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어요. 최병국은 총 안 맞은 게 다행입니다. 제가 '(송)병곤아 니 최병국이를 가만두나? 쥑이뿔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얘가 착해요. 고문도 검사가 지휘했어요. 검사 지휘하에 경찰이 벌인 거예요. 지금도 공안이 살아나고 있잖아요. 박근혜 대통령 저러면 안됩니다. 김대중, 노변이 대통령 할 때 공안은 진급이 안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살아나니까 서로 가려고 하고, 진급이 빠르니까요."

- 노변이 나중에 정치판에서 최병국 전 의원을 만났을텐데요.
"우리 애들만 죽였겠어요? 다른 것도 많이 조작했어요. 군사정권의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용공으로 조작한 거예요. 노변이 그런 사건을 접했기 때문에 과거사위원회를 만든 거예요."

- 최병국 전 의원은 이후 검사장도 달고 국회의원도 하는 등 잘 나갔는데.
"전두환-노태우 하고 한패 아닙니까. 김영삼이 3당 통합만 안했어도 최병국은 죽는 거였어요. 3당 통합하고 전두환-노태우 계열이 같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을 못치는 거예요. 김영삼도 그런 사람은 과감하게 버려야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치기에는 신앙심이 아주 깊었고, 노변이 치려고했으면 문변이 말렸을 거예요."

- 차동영 경감이 호통친 것처럼 노변은 '빨갱이'인가요?
"하하하. 그렇게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하나요? 정의, 진실을 위해 변론했을 뿐이죠. 요즘에는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으면 종북이라고 한다는데. 노변이 무슨 빨갱이입니까?"

-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가 여전히 그때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게 있어요. 박정희, 전두환 때부터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이 빨갱이가 '종북'이라는 이상한 단어로 바뀌었죠. 무조건 종북 딱지를 붙이면 안되지요. 지금 개성공단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종북타령입니까?"

- 혹시 보수에서는 이 영화를 '종북영화'라고 안할까요?
"제 생각에는 그렇게 들고 나올 것 같아요. 아마 최소한 상영금지 가처분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정치성을 가졌다고 하면서."

- 노변은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 길을 걷다가 결국 투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잖아요.
"경찰도 그랍니다. '저거 인간도 아니다.' 우리도 최루탄을 맞으면 이래 되는데 그 최루탄 한가운데 앉아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감동을 안할 수 있습니까? 부산, 경남 애들이 감동을 안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노동자 권익을 위해서 현장을 뛰다보니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국회의원에 나선 거죠. '나 같은 사람이 20명만 있어도 세상을 바꾼다'고 했잖아요."

- 결국 노변이 정치를 하게 되죠.
"당시에 노변과 문변, 김광일 변호사 3명이 국회의원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김광일 변호사는 중구, 노변은 동구, 문변은 영도에 나오라고 했어요. 하지만 문변은 정치 안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몇억씩 주고 정치를 하던 때라 엎드려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문변은 그때부터 정치 안하겠다고 했어요. 젊은 사람이 대단했던 거죠. 노변과 김광일 변호사는 공천받아 국회의원이 됐죠. 노변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문변에게 사정사정해서 민정수석으로 데려갔어요. 그때 문변은 '앞으로 정치하라는 말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청와대에 올라갔어요."

문변 속에 영감 들어 있다?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문재인 의원의 1978년 당시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신분증을 보여주고 있다.
노변과 문변은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공감하면서 열심히 변론하자 어느덧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가 됐다.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문재인 의원의 1978년 당시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신분증을 보여주고 있다. 노변과 문변은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공감하면서 열심히 변론하자 어느덧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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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변도 모셔보고, 문변도 모셔봤을텐데요.
"문변은 말을 안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젊은 시절부터 그랬어요. 노변은 그저 말을 하고 싶어서 막 떠드는 사람이에요. 언제나 아무하고나 대화하려고 하는데 문변은 출근할 때 '반갑습니다' 하고는 퇴근할 때까지 말을 안해요. 지금도 그래요. 기쁘면 하하하 웃고. 물론 문변은 한번이라도 말을 하면 다정하게 해요.

노변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저는 문변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때 선거사무실은 난리가 났는데 문변은 '앞으로 잘해봅시다' 이 말밖에는 안했어요. 제가 보니까 문변이 잘못한 게 있어도 노변의 호령이 한번도 안 떨어져요. 노변이 할 말을 다 하는데 문변한테는 할 말을 못해요. 문변도 노변이 잘못하면 '이건 이렇습니다'라고 해요. 그러면 노변이 '이게 아니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그게 맞겠네' 그렇게 한다니까요. 겁이 나나 봐요. 문변은 생각이 깊어요."

- 노변은 다혈질이었죠?
"다혈질도 그런 다혈질이 없어요. 그에 비하면 문변은 선비에요. 같이 시국사건을 변론해도 문변은 논리적으로 부드럽게 하는데 노변은 다혈질이라. 공안부 검사들조차 문변한테는 '수고했다'고 하는데 노변한테는 '죽일 놈, 살릴 놈' 해요. 그때부터 밉보였죠. 특히 고등학교밖에 안나와서 인기 좀 끌려고 한다고 수군거렸어요. 원래 변호사들은 논리적이고 조용하게 '피고인 그렇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만 해요. 하지만 그거는 (노변한테는) 성경 읽어주는 격이죠."

- 노변과 문변은 그런 성격, 스타일 차이 때문에 싸우지 않았나요?
"그러지는 않았어요. 노변이 문변을 두고 '서로 성격이 비슷했다면 벌써 깨졌다'면서 '그런데 문변이 하는 거 보면 젊은 사람 속에 영감이 들어있다'고 했어요."

- 서로 보완이 됐군요.
"노변이 스스로 자기 성격을 죽여가면서 했던거죠."

- 그런데 그토록 오래 모셨던 노변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잖아요. 
"노변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를 미워하는 국민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사람이었구나, 참 인간적이었구나'라는 걸 느끼면서 마음이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지금은 노변은 안계신데, 영화에서는 그 분이 살아계시고. 
"영화에서 송강호씨가 노변 역할을 하는데 저도 송강호씨가 노변으로 보이더라구요. 똑같은 대사는 아니라도 법정에서 강하게 어필하는 그 순간만은 노변으로 보였어요. 그 전에는 노변이 술을 많이 마셨죠. 하지만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에는 우리하고 술 한 잔 묵어본 일이 없어요. 생활자체가 더욱더 그랬어요."

- 문변이 대통령이 되면 노변의 억울함이 풀릴까요?
"작년에 됐으면 다 풀렸겠지요."

"노변은 정의에 불탔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1987년 8월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 사망사건 때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된 노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참여한 공동변호인단의 자필 서명을 보여주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당시 왕따였던 노무현 변호사의 변호인 수가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만 91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이 꾸려졌다"며 "당시 최대 규모였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19일 오후 부산 진구 한 영화관에서 <오마이뉴스> 취재기자와 함께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뒤 1987년 8월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 사망사건 때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된 노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참여한 공동변호인단의 자필 서명을 보여주고 있다. 장 사무국장은 "당시 왕따였던 노무현 변호사의 변호인 수가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만 91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이 꾸려졌다"며 "당시 최대 규모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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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인상 깊어요. 1987년에 구속됐을 때 많은 부산 변호사들이 공동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리잖아요. 특히 90명 이상이 법정에 직접 참석하는데 판사가 그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 노변도 정말 가슴이 벅찼을 것 같아요.
"영화에는 99명이 참석한 걸로 나오는데 제가 가진 자료에는 91명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변협에서 받은 자료거든요. 법정에 참석한 것만 그렇고 서명한 사람은 더 많아요.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그때 공동변호사 명단을 제가 다 가지고 있어요. 노변이 돌아가신 뒤 그 기록을 권여사께 드렸어요."

- 그들은 왜 공동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을까요. 노변을 지지해서? 아니면 그냥 동료 변호사라서?
"이 사람들이 노변을 지지한 거예요. 부산에서 최초로 변호사가 구속된 거거든요. 그것도 시국사건과 관련해서 데모 좀 한다고. 결국 그런 공안정국에 변호사들조차 반기를 든 거죠. 노변이 밉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못하는 걸 얘기했다는 차원에서 서명했다고 봐요. 노변의 부르짖음에 참여하고, 묵시적으로 동의한 겁니다. 단순한 변론 참여는 아니에요."

- 그 전까지 노변은 변호사 사회의 왕따, 미운 오리 새끼였는데 90여명이 공동변호인단이 이름을 올린 것은 정말 극적이에요.
"김광일 변호사가 공동변호인단 명단을 불러달라고 재판장에게 요청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한명 한명 호명하는데만 30분쯤 걸렸을 거예요. 영화를 보면 재벌회사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노변이 공감한다고 하잖아요. 노변이나 문변은 현장에 뛰어가서 민주주의를 외친 거예요. 박종철이 죽고 이한열이 죽었지요. 결국은 6월항쟁이 일어났잖아요. 대통령 직선제 됐잖아요. 전두환이가 손들었잖아요. 우리 사무실에서도 내일 이 영화본다는데 술 많이 묵게 생겼네(웃음)."

- '노무현 찬양 영화다'라는 지적도 있어요.
"저쪽에서는 당연히 그러겠지요. 노변을 인정하기 싫다는 거겠죠. 하지만 거의 사실 그대로 만든 영화예요. 조작이 아니에요. 양심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동안 느끼지 못한 부분을 영화를 통해 느끼고 생각을 바꿨으면 해요. 인간의 피가 흐른다면 반론을 제기하기보다 저런 인간미가 있었구나 하는 걸 느끼고 깨우칠 거라고 생각해요.

노변은 잡혀간 대학생이 고문받은 흔적을 확인하고 분노했을 뿐이에요. 인간으로서. 저쪽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반신반인'으로 모시는데 노변은 그냥 인간이에요. 노변은 암울한 시대에 정의감에 불탔어요.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그것을 살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고 살자는 거예요."

- 현재도 그것이 필요하죠. 간절하게.
"그렇죠. 인간답게 대접받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노변이 얘기한 '사람사는 세상' 아닌가요. 내가 할 말은 다 하고, 억압 당하지 않고, 자기 양심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 영화는 흥행이 될 것 같나요?
"뭔가 될 거 같은데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 것 같아요. 아주 속 시원하고, 울분이 팍 풀리지 않을까요?  저런 변호사가 있어야겠구나 하고. 송사가 걸린 사람이 100만 명은 될 건데요, 이렇게 송사에 얽매인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이 다 보러 가지 않을까요. 대학생들도 봐야 하고."

- 어떤 사람은 아주 진지하게 노변이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득표한 1200만명 정도는 보지 않겠나 하더군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2002년 투표했던 때와 지금은 달라요. 노변 장례식 때도 조문객이 500만명이었거든요."


태그:#장원덕, #노무현, #부림사건, #법무법인 부산,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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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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