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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의 일이다. 중앙도서관 매점 옆에 계단으로 된 복도가 있었다. 여자대학교였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다들 여자였고, 통행이 많을 때는 계단에서 울리는 구두 굽소리가 열람실까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동음이의어와 혼동하지 않도록 그림까지 곁들여서.

"당신은 말(馬)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물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에서 의인화되는 동물들이 대표적인 예다.

"동물은 마음으로 왜곡해도 되는 저열한 존재"

어린 시절 휴일이면 방영되었던 반공 애니메이션에서 북한군은 늑대로, 김일성은 탐욕스러운 돼지의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런 방송을 보며 자란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함께 돼지와 늑대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도 생겨났을 것이다.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이한중 역, 돌베개)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시선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오랜 기간 북극의 늑대를 가까이에서 연구하여 얻은 결과를 담은 이 책에서, 모왓은 늑대가 "피에 굶주린 포악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사실무근의 편견임을 알려준다.

사실 늑대는 필요한 경우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하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 등,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동물이었다. 모왓은 순록의 개체수를 급격히 감소시킨 이들은 순록의 머리와 털가죽을 노린 사냥꾼들임에도 불구하고, 늑대에게 잘못을 덮어씌우고 마녀사냥하는 인간이야말로 피에 굶주린 동물이라고 말한다. 

흔히 듣는 비속어 중에 '개새끼'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하는 짓이 얄밉거나 더럽고 됨됨이가 좋지 아니한 남자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개새끼'라는 말이 훨씬 불편해졌다. 왜 '개'를 붙여서 쓰는 걸까? 개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개는 얼마든지 업신여겨도 되는 존재"라는 편견을 가중시키는 건 아닐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의인화 중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합리화하는 것이 많다.

광고 속 동물들은 항상 웃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깃집이 즐거운 장소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고깃집 간판의 돼지 그림 광고 속 동물들은 항상 웃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깃집이 즐거운 장소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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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과 같이 기존에 없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동물에게 부여하여 그들에 대한 시선을 왜곡시키고 새로운 차별을 조장할 여지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체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예의 없는 지하철 승객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면 고릴라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을까?
▲ 쩍벌남 고릴라? 체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예의 없는 지하철 승객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면 고릴라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을까?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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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저마다 달라도 이런 의인화를 관통하는 핵심은 "동물은 우리 마음대로 왜곡시켜도 되는 저열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다.  

희생양이 동물뿐일까?

"동물의 대한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고 유대인 작가 아이작 싱어는 말했다. 다양한 비인간 동물을 전부 한통속으로 묶어 억압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지적한 것이리라.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차이'와 '다름'을 '차별'과 '배제'의 근거로 사용한 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이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종 때문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인간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동물을 '유해동물'로 규정지어 왔다.

길고양이를 혐오해서 추방을 외치는 압구정동 아파트 일부 주민에 맞서 합리적 절차를 통한 공생을 호소하는 사람들.
▲ 추방이냐 공생이냐 길고양이를 혐오해서 추방을 외치는 압구정동 아파트 일부 주민에 맞서 합리적 절차를 통한 공생을 호소하는 사람들.
ⓒ 고양이를 살려주세요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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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생양이 동물뿐일까?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라는 유해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집단 히스테리가 판치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똘레랑스의 부재다. 억압의 대상이 동물이냐 인간이냐만 다를 뿐, 그 위에 드리운 왜곡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는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하나, 둘씩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몰아낸다 해도 추방을 조장한 이데올로기는 건재할 텐데, 그 다음 희생양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태그:#지하철내셔널그래픽, #동물, #왜곡된, #시선,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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