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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된 변호사
 피고인이 된 변호사
ⓒ 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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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19일 개봉하는 영화 <변호인>에서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최후 변론을 한다.

'당신의 소중한 돈을 지켜드립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명함을 돌릴 정도로 '돈'을 좋아했던 송우석이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최후 변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국민 선택이 아니라 찬탈을 통해 권력을 잡은 것도 모자라 주권인 인민의 인간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사건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 속 인물 송우석이 어떤 변호인의 길을 걸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그를 '인권 변호사 노무현'으로 불렀다.

'반공법사건 전문 변호사', 한승헌

우리나라 변호인 중 영화 <변호인> 속 인물 송우석처럼 살아온 이들은 많다. '승소'보다는 '패소'를 밥 먹듯이 하고, 돈 안 되는 변호를 밥먹듯이 하는 변호인. 그러다 나중에는 '피고인'이 되는 변호인. 이런 변호인에게 누가 변호를 맡길까.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패소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찾았다.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민중교육 사건' '민청학련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에 걸쳐 21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 이런 그를 두고 그의 친구는 '반공법사건 전문 변호사'라고 했단다.

여기서 '그'는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다. 지난 11월 5일, 그의 법조생활 55년을 맞아 '한승헌 변호사 법조55년 기념선집'이 나왔다. 기념선집은 <한일현대사와 평화·민주주의를 생각한다> <피고인이 된 변호사> <권력과 필화>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로 구성됐다.

책 <피고인이 된 변호사>에서는 '변호사' 한승헌뿐만 아니라 '사람' 한승헌도 만날 수 있다. 글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을 지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 공직에서 있으면서 겪었던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돈' 좋아하는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로 삶을 바꿨듯, 한승헌은 '분지사건'과 김지하 <오적>을 맡으면서 '반공법전문 변호사' 길로 들어선다. '분지사건'은 1965년 남정현 소설가가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분지>가 같은 해 5월 8일 치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실리자 중앙정보부가 반공법으로 잡아 넣은 사건이다. 한승헌은 지난 2009년 1월 19일 <한겨레> [길을찾아서] 시국사건 변론 첫발 '분지'에 내딛다라는 글에서 분지사건 변론을 맡게된 이유를 이렇게 회고했다.

"얼마나 긴 대장정의 험난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짐작도 못한 채, 그저 터무니없는 용공 혐의에 짓눌린 한 작가의 수난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검찰에 변호인 선임계를 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터무니없는 용공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씨가 1970년 11월호 <다리>에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을 썼다. 다음 해 3월 중앙정보부는 이를 문제 삼았다.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은연 중 우리 정부의 타도를 암시,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역사는 재판관도 때로는 압제자임을 증명해왔다"

시대가 그랬다.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붙이면 끝이었다. 한승헌은 "책에서 배운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니, 증거재판주의니, 임의성 없는 자백의 배제니 하는 재판상의 정의는 번번이 실종됐다"며 "재판은 오직 처벌을 위한 의식으로 전락한 느낌 마저 주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유신독재 시절 대통령긴급조치사건을 다룬 군법회의에서는 개헌을 주장했다고 해서 15년 징역이 구형되면 바로 그 다음날 틀림없이 15년 징역이 선고되곤 했다. 그러한 재판에 대해서 나는 '자판기 판결' 또는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사법 풍토 속에서 나는 언제나 실패하는 변호사일 수밖에 없었다. 재판관이 검사의 편만 들 때에는 피고인은 하느님을 변호인으로 모실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절실한 명언으로 떠올랐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더글라스 판사가 '역사는 재판관도 때로는 압제자임을 증명해왔다'고 한 말을 되씹어보기도 했다."(본문 36쪽)

"역사는 재판관도 때로는 압제자임을 증명해왔다"는 글귀를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판결이 권력이 바라는 '정찰제 판결'를 내리면 똑같은 압제자가 된다. 박정희 정권 당시 벌어졌던 숱한 시국사건이 그랬다. 판사들은 더글라스 판사 말을 판결을 내릴 때마다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한승헌을 변호인에서 피고인으로 만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헌법상 기본권이 유린 다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박정희와 전두환을 '군사반란자'와 '독재자'로 부르는 이유다.

"군법회의도 예상을 초월한 촌스런 연극으로 진행되었다. 사선 변호사인 선임도 철저히 봉쇄되었다. 접견·통신권은 간 곳이 없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그러한 불법 조작의 극치였다. 우리들을 가두어놓고 전두환은 그 사이에 국회를 폐쇠하고 국보위(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더니 급기야 '체육관 대통령'이 되어 집권 야욕을 채웠다. 내란은 누가 했는가, 구형량  그대로 선고되는 판결, 창문은 켜녕 바늘구멍 하나 없는 육군교도소의 먹방생활…. 헌법상의 기본권이니 형사소송법의 무슨 권리니 하는 것은 한낱 웃기는 사치품이었다."(본문 110쪽)

없는 용기를 다해서 양심을 지켜야 했다

전두환이 왜 '나쁜 놈'일까? 헌법을 무력화 시켜 인간존엄성을 웃기는 '사치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찬탈한 자가 민주주의를 바라는 인민을 탄압한 것이다. 민주시민은 전두환에게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고 물어야 한다. 한승헌은 최후진술에서 "우리들의 형기의 장단이 아니라 유·무죄를 제대로 판단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한 우리들이 민주화를 약속한 정부에 의해서 체포된 것은 매우 코믹한 일"이라며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했다, 비판을 한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느냐로 그 나라의 민주의의 척도가 결정된다, 최근의 사회적 혼란은 정부를 비판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법부는 김대중에게 사형, 문익환 20년, 이문영과 예춘호 12년 그리고 한승헌은 4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1980년 10월 상고 기각했다. 한승헌은 책에서 대법원 판사 13명(이영섭·주재황·한환진·안병수·이일규·나길조·김용철·유태흥·정태원·김태현·김기홍·김중서·윤운영)의 실명을 그대로 실었다. 더글라스 판사의 "역사는 재판관도 때로는 압제자임을 증명해왔다"는 말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란음모 사건이 33년만에 다시 부활했다. 과연 2013년 대한민국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오로지 헌법과 법에 따라 판결해야지 만약 정치권력이 바라는 대로 판결한다면 "역사는 재판관도 때로는 압제자임을 증명해왔다"는 치욕을 겪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같은 생각을 가졌다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동지들은 배반하는 일이다. 독재권력은 배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때는 협박을, 어떤 때는 회유를 했다. 이 같은 '마수'는 한승헌에게도 있었다.

"사실 '남산' 쪽의 압력이나 공작·협박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마수가 아니었다. 항복이나 훼절 또는 맹세를 강요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나는 특정 사건의 변호에서 손을 떼라는 협박에 맞서다가 단 하루 만에 붙들려가서 구속당한 경험도 있다.  반성한다거나  준법하겠다는 각서 한 장 쓰라는 것을 거부한 탓으로 한낮부터 밤늦도록 싸우기도 하고, 지방 교도소로 이감을 당하기도 했다. '남산'의 사건 조작이나 공작 의도에 순응하지 않고 버티기란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번 영합·굴복하고 나면 파멸이니 마찬가지니까 없는 용기를 다해서 양심을 지켜야 했다."(본문 342쪽)

권력의 독기 앞에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문도 견디기 힘들지만, 약점을 잡고 회유하는 것은 더 이겨내기 힘들다. 아주 작은 약점도 잡히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승헌이 회유와 협박을 당해도 남산(중앙정보부)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 종이 한 장 쓰고, 반공법 전문변호사를 그만두면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승헌은 "없는 용기를 다해서 양심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제자리를 지켰다.

없는 용기를 내어 양심을 지켜야 할 정도로 박정희 정권은 폭압정권이었다. 책 <피고인이 된 변호사>에는 67건의 사건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그는 "크든 작든 이 나라 역사에 영향을 미쳤거나 각인이 된 그분들의 고난의 기록"이라고 평한다. 그러면서 "그분들을 돕는다고 나섰던 저의 안간힘은 벌거벗은 권력의 독기 앞에서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는 법정의 변호인석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고 반추한다.

한승헌이 변호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권력의 독기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변호사.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한민국은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이다. 33년 만에 내란음모죄로 재판받은 국회의원이 생겼고, 전교조를 '노조 아님'이라 부르고, 민주정당을 '북한식 사회주의를 한다'며 해산시키려는 시대다.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내뿜었던, '권력의 독기'가 다시 퍼지고 있다. 한승헌의 글을 가슴에 새기자.

"변호인의 소임은 법정안에서 변호활동을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재판의 실상과 진실을 널리 알리는 일도 저의 사명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재판이 불의와 거짓의 편에 기울어질 경우에는 변호사의 증언자적 소임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본문 387쪽)

덧붙이는 글 | <피고인이 된 변호사>(한승헌 | 범우 | 2013.11. | 2만 원)
이 기사는 오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된 변호사

한승헌 지음, 종합출판범우(2013)


태그:#한승헌, #변호사, #박정희,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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