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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은 있다
 다른 길은 있다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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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열이 있으면 '생각'이 열입니다. 백이면 생각이 백입니다. 열과 백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면 생각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모두가 다른 길일 때 그 길은 아름답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 됩니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간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판사라면 행복한 사회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검사라면 그 사회를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선생님이 있어야 하고, 농사짓는 사람, 고기 잡는 어부 그리고 자동차를 고치는 정비사, 우리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노동자 어느 것 하나 고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30명이 있습니다. '다름'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쩌면 이들도 '붉은 물'이 든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른 개의 생각과 서른 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1월부터 2013년 5월까지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되었던 인터뷰 '김두식의 고백' 가운데 서른 명의 이야기를 담은 <다른 길이 있다>(한겨레출판)에서 서른 명의 서른 개의 다른 생각과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박경신 · 고종석 · 유시민 · 윤태호 · 문부식 · 이상호 · 김종배· 등등. "쓰지만 영근 삶을 살아온 서른 명의 인생 이야기"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 어느새 '다른 길'을 가는 것이야 말로 사람냄새 나는  '사람살이'임을 알게 됩니다.

서른 개의 다른 길...사람냄새나는 '사람살이'

김두식이 만난 이들은 어릴 적 부모 없는 삶을 살고, 군사독재가 쏜 독화살이 자신의 삶에 치유하게 힘든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피할 요량으로 미국시민권을 딴 박 교수가 그렇게 걱정하는 '우리나라'는 대체 어느 나라인지 꼭 한번 묻고 싶다."(37쪽)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한 보수신문 기자가 쓴 글입니다. 그 기자가 말한 박 교수는 박경신 고려대 교수입니다. 그는 지난 2011년 7월 자신의 블로그에 남성 성기 사진 5장과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그림을 연달아 올렸습니다. 파문이 컸습니다.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재판까지 갔으니 파문은 컸습니다.

박 교수는 <PD수첩>,언소주,미르네바, 군 불온서적 재판에 나가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에 나가 전문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보수신문 기자가 "박 교수가 그렇게 걱정하는 '우리나라'는 대체 어느 나라인지 꼭 한번 묻고 싶다"고 한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대통령 퇴진하라"는 신부들을 향해 "조국이 어디냐"냐고 분노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과 닮아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박 교수는 방송통신심의위원이었습니다. 즉 '검열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올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검열자'가 발기된 성기사진을 올리다니

"제가 방심위원이 되면서 국민의 정신생활을 통제하는 '검열자'가 된 셈이잖아요. 국가가 국민의 머리에 들어가 직접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 국민이 보고 듣는 것을 통제하는 방식을 취하는 거죠. 법학 지식을 이용해서 불합리한 통제를 막는 게 저의 임무인데, 국민이 검열 때문에 어떤 것을 보지 못하는지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경신 자료실'(blog.naver.com/kyungsinpark)이라는 제 블로그에 '검열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죠. 촌스러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제가 쓴 논문이나 칼럼을 지인들과 나누는 소박한 블로그예요. 제가 양심적으로 판단해도 무리하게 삭제되거나 차단된 경우를 자료실에 남겨놓고 나중에 추가적인 논의나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성기 사진은 '청소년유해물로 접근을 제한하자'고 타협했는데도 음란물로 삭제돼버려서 이건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38쪽)

검열자는 '칼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박경신은 칼질을 거부했습니다. 보수세력이 보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성의 과학>이라고 관련 전문가들이 내놓은 야심작을 보면, 발기된 총천연색 사진을 보여주면서 발기의 진화학적 유래, 즉 삽입의 용이성을 설명한다"며 "저는 그런 사진들이 당연히 허용되어야 하고, 청소년 유해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 박 교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는 생각이 다를 뿐이지, 박 교수 생각이 '틀린'것이 아닙니다.

서른 명 중 가장 가슴 아프게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교 학과 선배인 문부식씨입니다. 문씨는 "광주의 비극을 상기시키고 미국과 전두환의 더러운 결탁을 고발"하려고 지난 1982년 3월18일 부산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는 고신대학 신학생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한 사람이 벙화를 하고, 결국 사람까지 죽입니다. 1986년 학교에 들어갔는 데 4년이 지났지만,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부미방' 문부식, 민주화에 기여하지 않는 '나'를 부끄럽게하다

그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한 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글을 썼습니다. 문부식에게도 그 사건은 '트라우마'인 것같습니다.

"그 죽음에 대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건 저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자로서 법정에서도 무죄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에 가더라도 미문화원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유리창 깨지는 소리, 연기 속에서 달려 나오던 후배들의 모습, 이들이 짊어져야 했던 부채감들이 떠올라서"(214쪽)

왜 그가 "부채감"을 가져야 할까요? 부미방사건은 그 동안 군사독재만 저항했던 학생운동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문부식은 "눈이 많이 오던 겨울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왔지요. 혼자 자전거 타고 편의점으로 가다가 미끄러져 공중에 떴다가 자빠지고 난 뒤 생각했다"며 "'이런 젠장 내 인생은 뭐지?' 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어울리던 친구들과 저는 다른 인생이었던 거죠. 그동안 지녀온 지적 자존심이 삭풍과 함께 날아가 버린 것 같은 쓸쓸함"이라고 했습니다. 문부식과 인터뷰를 마친 김두식이 쓴 마지막 글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굴곡이 심했던 인생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문부식은 "나는 원래 길 잃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구원받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존 스타인벡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네이팜탄 공장에 폭탄을 설치했다가 예기치 않은 희생자를 내고 평생 도망 다녀야 했던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반전운동가 부부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 속의 그들과 달리, 문부식에게는 그를 끝까지 보호하고 지원하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쓰고 빨리 내다버리는 곳이 우리 사회인 것 같습니다. 문부식처럼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자기 삶과 화해할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주는 것이, 저처럼 민주화 운동에 전혀 기여한 바 없이 과실만 따먹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20쪽)

부끄럽습니다. 부미방 사건 자체(방화)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를 통해 미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민주주의 한 발 더 진보했습니다. 하지만 문부식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조직은 없었습니다. 민주화란 열매는 다 따먹으면서 그들을 한 번 더 돌아보지 않는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가장 완벽하게 누리는 이들이 어쩌면 수구기득권입니다. 민주주의 열매를 따 먹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오마이TV> '이슈털어주는남자'(이털남) 김종배 시사평론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 평론가는 "언론비평지에서 주로 기자생활을 했는데 그 경험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아요. 제도언론 기자들이 부서나 출입처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면, 저는 언론판 전체를 넓게 봤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건 몰라도 언론비평지가 정파적이 되어서는 안 되죠. 데스크 할 때 후배들에게도 팩트만 가지고 가야지 진영논리로 가면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 한겨레라도 잘못하면 비판하라, 조중동이라도 잘했으면 칭찬하라 그랬다"고 합니다. 언론이 '진영논리'에 매몰되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조중동>처럼 수구기득권을 대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오마이뉴스>같은 진보언론 역시 진보세력이 민주주의의 공의에 반하면 날선 비판을 하라는 말입니다. 해겨야 합니다.

"둘째 줄에서, 최소한 비겁하게 살지는 말자"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위치한 이한열기념관에서 과선배 이한열 열사 앞에 선 이상호기자 그는 "둘째 줄에서, 최소한 비겁해지 말자"고 한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위치한 이한열기념관에서 과선배 이한열 열사 앞에 선 이상호기자 그는 "둘째 줄에서, 최소한 비겁해지 말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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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엑스(X)파일'하면 떠오르는 정치인은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입니다. 그리고 언론인은 이상호 기자입니다. 그는 "둘째 줄에서, 최소한 비겁하게는 살지"말자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은 지난 1987년 6월 항쟁 때 이한열 열사 때문입니다.

이 기자에 따르면 이한열씨는 2학년 과대표 자신은 1학년 과대표였습니다. 9일에도 이한열 열사가 "내일부터는 시민들이 나올 테니까, 딱 오늘까지만 홍보전에 같이 나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한열 열사가 제일 앞줄에 서고 자신은 그 뒷줄에 섰다고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줄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상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둘째 줄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가장 비겁한 게 둘째 줄인데, 기자는 직업적으로 둘째 줄에 설 수밖에 없어요. 첫째 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노동 환경과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할 때, 기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전하는 둘째 줄밖에 못 되니까요. 남의 삶을 통해 말하는 거간꾼에 불과하죠. 20대 때부터 한열이 형의 삶을 반추하다가 2003년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배달호 열사를 취재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내가 첫째 줄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둘째 줄에서는 비겁해지지 말자!"(258쪽)

"둘째 줄에서는 비겁한 일"은 하지 말자는 그의 다짐 지금 이상호를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사실 둘째 줄에 서면 편안합니다. 그리고 나도 둘째 줄에는 섰다며 자랑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합니다. 지금 맨 앞에서 공의와 정의를 외치는 이들은 "대통령은 물러나라"고 외치는 사제단입니다. 박근혜정권은 바로 이들을 종북이라고 합니다. 다름 자체를 부정해버립니다. 하지만 박근혜정권은 태생이 기득권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더 비겁한 사람이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최소한 비겁한 삶은 살지 않아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른 길이 있다> 김두식 지음 ㅣ 한겨레출판사 펴냄 ㅣ 16,000원



다른 길이 있다 - 김두식 인터뷰집

김두식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김두식, #다름과 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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