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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카메라가 김밥집 밥상위에 버려두고 온 카메라입니다. 나름대로 손에 익은 카메라인데 지리산 오를 때 없었습니다. 그나마 왼쪽 작은 카메라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 카메라 오른쪽 카메라가 김밥집 밥상위에 버려두고 온 카메라입니다. 나름대로 손에 익은 카메라인데 지리산 오를 때 없었습니다. 그나마 왼쪽 작은 카메라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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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오후 3시, 지리산 천왕봉입니다.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산에 오른 벅찬 감동 때문이냐고요? 아닙니다. 바닥난 체력 때문은 더욱 아닙니다. 금단현상 때문입니다. 멋진 장면 담아야 하는데 카메라가 없습니다. 그날 아름다운 지리산, 한스럽게 바라만 봤습니다. 카메라 어디에 뒀냐고요?

산 아래 두고 왔습니다.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녀석을 깜빡 잊고 김밥 집 테이블 위에 예쁘게(?) 놔두고 왔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천왕봉 오르던 날, 하늘 참 맑더군요. 단풍도 샘나도록 예뻤고요. 지난 3일 오전 6시, 세 아들이 늘어지게 자고 있습니다. 지리산 가야 하는데 딴 세상에서 놀고 있습니다.

산에 오를 자세가 안됐네요. 답답합니다. 아이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나요? 이번 산행, 한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대피소 예약도 잘 마쳤습니다. 요란 떨며 맞이한 날인데 녀석들은 방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한바탕 소란을 피웠죠. 그제야 세 아들이 꼼지락 거리며 일어납니다.

눈 감고 서성이는 세 아들, 대충 물 묻혀 씻긴 후 지리산으로 달렸습니다.  도중에 아침 끼니도 때우고 산에서 먹을 귀한 점심 마련하기 위해 문제의 김밥집에 들렀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김밥 10줄을 집어 삼킨 뒤 점심으로 먹을 김밥 싸들고 지리산으로 향했습니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오전 8시 30분입니다. 차에서 짐을 내렸습니다. 제 몫의 묵직한 배낭과 퉁명스럽게 큰 손전등 그리고 두 아들이 등에 달고 갈 앙증맞은 가방까지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산을 향해 출발하면 됩니다. 아내는 손 흔들며 산을 내려갑니다.

노고단 고개입니다. 아직까지는 두 아들 상태가 좋군요.
▲ 노고단 고개 노고단 고개입니다. 아직까지는 두 아들 상태가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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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가 산을 내려오며 공부 열심히 하겠답니다. 왜나고 물었더니, 산에 오르는 일보다 공부가 더 쉽다네요. 큰애는 돌탑을 쌓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소원 큰애가 산을 내려오며 공부 열심히 하겠답니다. 왜나고 물었더니, 산에 오르는 일보다 공부가 더 쉽다네요. 큰애는 돌탑을 쌓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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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겹치고 또 겹쳐 있습니다. 첩첩산중입니다.
▲ 첩첩산중 산이 겹치고 또 겹쳐 있습니다. 첩첩산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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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 북도와 경상남도 나누는 경계입니다. 두 아들이 조금 지쳐 보입니다.
▲ 삼도봉 전라남, 북도와 경상남도 나누는 경계입니다. 두 아들이 조금 지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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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곰 나오는 지리산 함께 가겠다고 울고....

세 남자가 힘차게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손이 허전합니다. 제 손에 항상 붙어 있던 카메라가 없습니다. 아내를 급히 불렀습니다. 차 안을 이 잡듯이 훑었죠. 하지만 차 안에도 카메라는 없습니다. 아내에게 물어봐도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답니다. 분신 같은 제 카메라,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노고단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바람을 맞으니 갑자기 김밥집이 떠오릅니다. 제 카메라는 그 집 밥상위에 얌전히 놓여 있을 겁니다. 돌아가 카메라 들고 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도리 없이 카메라는 포기하고 산에 올랐습니다.

두 아들과 산에 오르는데 막내가 큰 소리로 웁니다. 곰 나오는 지리산에 아빠와 함께 가겠답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벽소령과 장터목 대피소 두 곳 모두 예약이 됐더라면 온 가족이 천왕봉 오를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벽소령 대피소만 한 곳만 예약 됐거든요. 때문에 가족 산행은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 턱없는 막내는 몸부림을 칩니다. 나중에 산을 내려와 들어보니 막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답니다. 그렇게 막내와 슬픈 이별을 하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분신 같은 카메라는 없지만 나름 쓸 만한 스마트폰이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담은 사진도 그럭저럭 봐줄만하더군요. 또, 큰애에게 마음껏 찍어보라며 던져준 작은 카메라도 있고요. 필요할 때 도움이 되겠더군요. 하여, 김밥 집에 두고 온 카메라는 깨끗이 잊고 발걸음도 가볍게 곰 나오는 지리산으로 향합니다. 잡스런 고민 접고 시원한 숲길과 돌계단을 열심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노고단 대피소입니다.

어느 산객이 놓고 간 등산용 스틱입니다. 이 분은 금단현상 몰려 오지 않았겠죠? 저는 김밥집에 카메라 두고 오는 바람에 몹시 심한 금단현상에 시달렸죠.
▲ 금단현상 어느 산객이 놓고 간 등산용 스틱입니다. 이 분은 금단현상 몰려 오지 않았겠죠? 저는 김밥집에 카메라 두고 오는 바람에 몹시 심한 금단현상에 시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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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피었습니다. 지리산 정상에 가을이 내리고 있습니다.
▲ 가을 억새가 피었습니다. 지리산 정상에 가을이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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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멋진 옷입니다. 이 장면 찍을 때까지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살아 있었습니다.
▲ 단풍 지리산이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멋진 옷입니다. 이 장면 찍을 때까지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살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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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붓질로는 도저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그릴 수 없습니다. 멋진 산을 눈이 아프도록 봤습니다.
▲ 지리산 인간의 붓질로는 도저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그릴 수 없습니다. 멋진 산을 눈이 아프도록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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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에서 맡은 삼겹살 냄새... 입에 침이 고입니다

대피소에서 물 가득 채운 뒤 노고단 고개를 넘습니다. 산에 오르는 도중 큰애가 작은 카메라로 뭔가를 담더군요. 아차, 싶었죠. 큰애가 작은 카메라로 마음껏 사진을 찍어버리면 정작 필요할 때 제가 카메라를 쓰지 못하잖아요. 재빨리 카메라를 빼앗았죠. 실망한 큰애가 줬다 빼앗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항변합니다.

그 말 무시했습니다. 적어도 천왕봉에서 세 남자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은 들고 산을 내려와야지요. 그렇게 두 아들과 티격태격 하며 예쁜 능선을 넘었습니다. 임걸령과 노루목을 지나 삼도봉도 구경했습니다. 화개재와 토끼봉을 가뿐히 넘으니 연하천 대피소가 보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배낭 풀었는데 등산객들이 구워먹는 삼겹살 냄새 때문에 입에 침이 고이더군요.

하지만 군침 흘리며 마냥 쉴 수는 없습니다. 하룻밤 묵을 벽소령까지 해지기 전에 닿아야 하니까요. 다시 힘을 내 걸었습니다. 가을 지리산, 참 아름답더군요. 아스라이 펼쳐진 산맥들이 한 폭의 산수화였습니다. 인간의 붓질로는 도저히 만들어 내지 못하는 장관을 눈이 아프게 봤습니다.

절경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벽소령 대피소입니다. 지리산 구경하느라 눈은 즐거웠는데 불쌍한 두 다리는 납덩이를 달아놓은 듯 무거웠습니다. 피곤하지만 저녁은 먹어야지요. 식사는 야채라면과 햇반입니다. 취사장으로 걸음을 옮겼죠. 코펠에 물 받으려고요. 헌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리산 종주 중 하룻밤 묵은 벽소령대피소입니다.
▲ 벽소령대피소 지리산 종주 중 하룻밤 묵은 벽소령대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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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장이 산 아래 100미터나 내려가야 한답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벽소령 대피소 매점에는 생수가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깊은 고민과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 청천벽력 식수장이 산 아래 100미터나 내려가야 한답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벽소령 대피소 매점에는 생수가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깊은 고민과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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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100미터 내려왔습니다. 졸졸 물 흐르는 통이 있습니다. 물 받고 나니 캄캄해 졌습니다. 곰 나오는 지리산에서 어두워지면 어떤 기분인지 아세요?
▲ 식수 산을 100미터 내려왔습니다. 졸졸 물 흐르는 통이 있습니다. 물 받고 나니 캄캄해 졌습니다. 곰 나오는 지리산에서 어두워지면 어떤 기분인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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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 대피소에서 식수 받으러 산 내려갈 때 이 생뚱맞게 큰 손전등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 손전등 벽소령 대피소에서 식수 받으러 산 내려갈 때 이 생뚱맞게 큰 손전등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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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서 돈 내고 생수 쉽게 얻자? 이 악물었습니다

취사장에 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죠. 깊은 산속에서 취사장에 물이 없으면 어디 가서 구해야 하나요? 물론, 대피소 매점에는 깨끗한 생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돈만 내면 물은 쉽게 구합니다. 하지만 지리산 올라와서 플라스틱 병에든 물을 마실 수는 없잖아요?

하여, 옆 사람에게 식수 어디서 구하냐고 물었습니다. 친절한 분이 정확히 알려주더군요. 산 아래로 100미터 내려가면 물 나온답니다. 그 소리 듣고 경악했습니다. 어떻게 올라온 산인데 100미터를 또 내려갑니까. 풀려버린 다리가 불쌍하더군요. 물 뜨러 산을 오르락내리락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매점이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이를 악물었습니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산을 내려갔죠. 좁다랗고 가파르며 어둑한 산길을 내려가 실처럼 가늘게 떨어지는 물을 한참 기다려 받았습니다. 산길 내려가는 동안 큰 도움이 된 물건이 있는데 큼직한 손전등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큰애가 제게 핀잔 들으며 집에서 들고 온 손전등인데 어두운 산길에서 요긴하게 써 먹었죠. 사람일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산에 오르며 큰애에게 통박을 놨는데 애물단지 손전등이 귀한 물건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산길 올라와 큰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심하게 퍼부었습니다.

한 가지 기특한 일은 제가 물 뜨러 산을 내려간 동안 아이들은 곰 나오는 지리산에서 혹시 제게 탈이라도 생길까봐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긷고 올라와 두 아들을 본 순간 가족의 힘을 느꼈죠. 그렇게 벽소령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가을 냄새가 물신 풍깁니다. 세석평전에 핀 꽃입니다.
▲ 가을 향기 가을 냄새가 물신 풍깁니다. 세석평전에 핀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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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오르는 길에 만난 고사목입니다.
▲ 고사목 천왕봉 오르는 길에 만난 고사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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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향해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헬리콥터가 나타나더군요. 정말 부러웠습니다. 어떤 덕을 쌓으면 헬기로 천왕봉에 오를까요?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 본다는데 이 사람들은 분명 오대쯤 덕을 쌓았나 봅니다.
▲ 헬기 정상을 향해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헬리콥터가 나타나더군요. 정말 부러웠습니다. 어떤 덕을 쌓으면 헬기로 천왕봉에 오를까요?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 본다는데 이 사람들은 분명 오대쯤 덕을 쌓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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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고마운 등산객이 촬영해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다시한번 이 글을 통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 천왕봉 '동해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고마운 등산객이 촬영해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다시한번 이 글을 통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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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를 땐 김밥집 절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4일 아침, 상쾌한 공기 마시며 11.4킬로미터를 더 걸어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하늘은 맑아 구름 한 점 없고 멀리 펼쳐진 산들은 울긋불긋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헌데, 저는 눈만 뻐끔뻐끔 거리며 그 절경을 구경만 했습니다. 분신 같은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꺼내면 된다고요? 배터리가 수명을 다했습니다. 또, 큰애에게 줬다 뺏은 작은 카메라도 배터리가 바닥이라 마음 놓고 셔터를 누르지 못했습니다. 천왕봉 표지석 옆에 두 아들을 앉혀놓고 거의 전원이 다해 곧 깊은 잠에 빠질 작은 카메라를 재빨리 켠 다음 셔터를 누르고 다시 전원을 껐습니다.

중산리로 산을 내려갈 텐데 그곳에서도 마지막 인증 샷도 날려야지요. 그렇게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신령한 산꼭대기에서 아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옆에 서 있던 등산객이 묻더군요. 기특한 아들을 두 명이나 데리고 왔는데 가족사진 안 찍냐고요. 속 터지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더 답답하더군요.

가족사진 못 찍는 이유를 대충 설명했더니 등산객은 자신의 카메라로 가족사진 찍어 보내주겠답니다. 그 말 듣고 너무 고마워 눈물 날 뻔 했습니다.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는 두 아들을 또다시 끌어안고 가족사진을 찍었죠. 두 아들과 찍은 귀한 사진 산에서 내려와 고마운 등산객에게서 잘 받았습니다.

등산객에게서 받은 사진을 보고 있자니 천왕봉 꼭대기에서 그 분이 던진 말이 떠오르더군요.

"선생님, 천왕봉 이렇게 맑은 날 드뭅니다. 복 받은 겁니다. 가족사진 한 장 찍으세요.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겨야지요."

그렇습니다. 제 가족은 복 받았습니다.

온 가족이 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두 아들과 천왕봉에 올랐기 때문이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대피소 두 곳을 예약해서 온 가족이 천왕봉에 오르자고 말이죠. 덧붙여 산에 갈 때 절대 김밥집 들어가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태그:#천왕봉, #지리산, #카메라, #벽소령,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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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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