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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沖縄)의 옛 마을, 류큐무라(琉球村)에는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 전투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고택들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건축물은 일본의 유형 문화재들로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들이다. 이 고택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류큐 문화와 관련된 테마를 정해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120년 전에 지어진 이 고택에서는 오키나와 전통술인 아와모리를 알리고 있다.
▲ 히가 고택 120년 전에 지어진 이 고택에서는 오키나와 전통술인 아와모리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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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하게 술 취한 '시사'가 만세를

나는 아내와 함께 류큐무라의 다양한 테마를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그 중에서도 히가(比嘉) 고택은 집 앞에 술통이 잔뜩 놓여 있는 것만 보아도 오키나와 전통 술인 아와모리(泡盛)를 알리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오키나와의 특산물인 오리온 맥주를 마시며 만세를 부르고 있는 액막이용 상상의 동물 시사(シ-サ-)의 환영을 받으며 우리는 히가 고택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맥주를 따라 마시는 맥주통 같이 아와모리를 담은 술통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시사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술 취한 시사 거나하게 술에 취한 시사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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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입구, 시사가 술을 마시고 있다. 술을 마시는 시사의 몸통 안에는 익살스럽게도 발기한 성기를 크게 붙여 놓았다. 이 시사들은 모두 술을 거나하게 마신 수놈임을 알 수 있다. 수놈 시사들은 술에 취해 알딸딸한 표정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다. 기분 좋은 절정의 순간이 시사들의 표정에 그려져 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시사들이 어떤 절정의 느낌을 만끽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히가 고택에서 아와모리를 사서 마시면 이런 표정이 된다는 것일까?

역사가 120년인 이 고택은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난죠시(南城市)에서 옮겨 지어졌다. 난죠시는 오키나와 벼농사의 발상지였고, 술도 쌀로 빚으니 이 지역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술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난조 지역에서 옮겨온 이 히가 고택에 오키나와의 술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어로 '아와'란 거품을 말한다. 찻잔에 담은 술의 거품인 아와로 알콜 도수를 확인했다고 해서 이 술 이름이 '아와모리'가 됐다. 류큐 시대의 전통 복장을 입은 직원들이 오키나와 전통술의 원료인 남방미와 함께, 이를 증류하는 방법 등 숙성법을 친절하게 소개한다. 아와모리 도기에 담긴 무색의 아와모리는 오키나와 유리 잔인 류큐가라스(琉球ガラス)에 담아서 마신다고 한다. 우리는 큰 술병을 들고 다닐 엄두가 안 나서 살짝 맛만 봤다. 맛은 우리나라 중국 요리집에서 맛볼 수 있는 고량주 맛과 비슷하다.

웃는 모습이 순박하고 친근하다.
▲ 류큐무라 직원들 웃는 모습이 순박하고 친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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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여행자들에게 아와모리를 직접 팔기도 한다.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에 산재한 모든 섬을 합쳐서 무려 47개나 되는 아와모리 공장이 존재한다. 이곳에서 파는 아와모리의 종류도 다양하다.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친절하기도 하겠지만 이 오키나와 류큐무라 직원들의 친절은 일본 본토의 형식적인 친절과는 무언가 다르다. 여행자들에게 보이는 웃음이 억지 웃음이 아니며 대단히 싹싹하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다른 지역이라는 느낌을 준다.

시사상은 만화영화 캐릭터 같은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된다.
▲ 지붕의 시사상 시사상은 만화영화 캐릭터 같은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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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무라의 언덕에서 약간 경사진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류큐무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설인 도예공방이 나타났다. 도예공방의 지붕에는 오키나와 어디를 가도 건물 지붕에서 만날 수 있는 오키나와의 상징, 시사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시사들이 웅크린 채로 익살스럽게 위협하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지금까지 보아온 시사의 종류만 해도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한 지역의 캐릭터를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재주는 오키나와가 최고가 아닐까 싶다.

직접 시사를 만드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시사 완성품을 사기도 하는 곳이다.
▲ 도예공방 직접 시사를 만드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시사 완성품을 사기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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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공방에는 온통 크고 작으며 다양한 색상의 시사 천지다. 시사를 주제로 하여 만든 여러 생활용품과 판매용 도자기들이 보인다. 이 도예공방에서는 작은 시사 도자기에 자신이 직접 색상을 칠해서 완성하는 시사 만들기와 시사 문양 그리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아! 그러나 나에게는 정해진 버스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나는 다른 여행자들이 시사 도자기 만드는 모습을 한동안 구경했다. 완성된 시사 작품은 판매도 하는데 정교하게 조각된 덩치 큰 시사 한 쌍은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비싸다.

도예공방 안에는 크고 작은 시사 천지다.
▲ 시사 작품 도예공방 안에는 크고 작은 시사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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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로 설탕 만드는 온순한 오키나와 물소

도예공방 밖, 류큐무라에는 아직도 많은 비가 흩뿌리고 있다. 우리는 하염없이 내리는 오키나와의 빗속으로 다시 들어섰다. 빗속에서도 여행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사타구루마(砂糖車)가 계속 돌고 있다. 이 사타구루마는 오키나와의 작은 흑당(黑糖) 공장에서 사탕수수의 즙을 짜낼 때에 사용되던 시설이다. 이 설탕 만들기에는 성격이 온순하기로 유명한 오키나와의 물소가 동원된다. 20세기 초에 대만 이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의 이시가키지마(石垣島)에 들어온 물소는 길들이기가 쉬워서 원래 농경에 이용되었다. 이후 오키나와에 사탕수수가 도입되면서 오키나와 물소는 사탕수수를 짜는 데 동원되었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데에 물소가 이용된다.
▲ 사타구루마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데에 물소가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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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유명한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드는 이 제당공장은 우리나라에서 한우를 이용하는 연자방아와 비슷하게 생겼다. 태평양 전쟁 전까지 오키나와의 농촌 마을에는 이렇게 물소가 끄는 작은 규모의 흑당공장이 있었다. 제당공장 옆에 복원된 물레방아는 우리나라의 것과 다르지 않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의 동력원은 대부분 가축이거나 자연의 힘이었으니 과거에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어디나 비슷했던 것이다.

물소가 사타구루마를 돌리면 톱니바퀴가 즙을 짜낸다.
▲ 즙짜기 물소가 사타구루마를 돌리면 톱니바퀴가 즙을 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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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원을 그리며 빙빙 돌면서 사타구루마를 돌리면 사타구루마에 연결된 제당공장 중앙의 톱니바퀴 3개가 맞물려 돌아간다. 이 힘에 의해 톱니바퀴 사이의 사탕수수는 으깨어지고,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작업자들이 다른 사탕수수를 갈아 끼운다. 여기에서 나온 즙을 끓여서 류큐무라의 수제 흑설탕이 만들어진다.

사탕수수로 만든 오키나와 명물인 흑설탕을 팔고 있다.
▲ 흑설탕 가게 사탕수수로 만든 오키나와 명물인 흑설탕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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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당공장 바로 옆에는 이 수제 흑설탕을 포장해서 파는 흑설탕 가게가 있다. 이 오키나와 흑설탕은 오키나와만의 특유의 맛이 있어서 요리 전문가들이 오키나와에서 꼭 사가는 특산물이다. 여행자들이 오키나와의 특산물인 흑설탕을 구매하도록 동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나와 아내가 사탕차에 접근하자 류큐무라의 직원이 일부러 이 물소를 우리에게로 끌고 온다. 여행자들이 이 이국적인 물소 사탕차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즈를 취해주는 것이다. 워낙 온순하다는 이 류큐무라 물소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하다. 우리 눈 앞까지 오더니 사진 찍는 시간을 주려는 듯 멈춰서 있다. 이 영리하고 숙달된 소는 자신의 주인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밥을 얻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사타구루마의 이 소는 처음 보는 관광객들에게도 붙임성 있게 다가온다.

검은 몸통과 활처럼 휜 뿔이 인상적인 오키나와 물소는 우리나라 황소와는 매우 다르게 생겼다. 제당공장 옆 작은 외양간에는 관람용 물소가 한가하게 여물을 먹고 있다. 물소는 온순하지만 우리나라 황소와는 표정이 다르고, 눈빛도 익숙하지 않다.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황소처럼 선량하고 착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소는 없는 것 같다. 꿈벅거리는 황소의 눈동자에 비해서 물소의 눈빛은 그리 친근감이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식문화와 너무나 닮아 있다.
▲ 돼지 머리고기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식문화와 너무나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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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류큐무라에서 우리나라와 너무나 닮은 오키나와 문화를 만났다. 특산물을 파는 가게에서 돼지머리 고기를 팔고 있는 것이다. 돼지머리 고기 뿐만 아니라 돼지 족발도 함께 포장해서 팔고 있다. 다른 어느 나라 여행에서는  보지 못했던 돼지머리 고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류큐의 왕궁과 왕릉에서 발견되는 고려의 기와, 홍길동의 전설과 함께 이 돼지 머리고기를 한국문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나는 오키나와 여행을 하면서 이곳이 일본이라는 생각을 잊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전통 옷가게에도 일본의 기모노와는 다른 디자인의 의상이 걸려 있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의식주 문화가 다른 곳이었다.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오키나와, 아니 류큐 왕국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류큐왕국. 작은 섬나라이면서 독창적인 문화를 향유했던 류큐왕국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동아시아의 문화도 훨씬 다양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열대 밀림의 나무들 밑을 걸으면서 오키나와의 비를 맞고 있었다. 빗물은 여행하기에 불편했지만 류큐의 옛 왕국을 홀로 답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었다. 우리가 류큐무라를 나오자 오키나와의 하늘은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류큐무라, #아와모리, #사타구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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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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