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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해돋이(2005. 7. 23.)
 백두산의 해돋이(2005. 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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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새배빛

김준기의 편지

"고객님, 식사 시간이에요."

나는 여승무원의 상냥한 목소리에 긴 잠에서 깼다. 기내 앞 스크린의 비행항로 표지판을 보자 그새 여객기는 막 베링 해를 지나 캄차카반도 상공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잠든 새 여객기는 항로의 절반 이상을 비행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9시 50분을 가리켰다. 탑승 후 그새 아홉 시간 가까이 단잠을 잤다. 손목시계 시침을 두 시간 앞당겨 11시 50분 서울 시간으로 바꿨다. 나는 무엇보다도 지루하고 긴 비행시간을 절반 이하로 단축했기에 아주 횡재한 기분이었다.

나는 승무원이 제시한 비빔밥과 스테이크 두 메뉴 가운데 비빔밥을 골랐다. 이상하게도 내 나라를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한식이 더 좋았다. 기내식 비빔밥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식사 뒤 승무원에게 커피를 청해 마시면서 그제야 지배인 영옥이 건네 준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스카프 한 장과 흰 봉투가 들어 있었다. 흰 봉투를 뜯자 일백 달러짜리 지폐 열 장과 편지가 나왔다.

여객기에서 내려다 본 미주대륙
 여객기에서 내려다 본 미주대륙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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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외다

박상민 선생 보시오.

이곳에서 뜻밖에 박 선생을 만나 매우 기뻤소. 코흘리개 박상민 소학생이 그새 50년 세월이 흘러 학교 선생에, 작가 선생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고 정말 반가웠소. 나는 이번에 박 선생이 미국 아카이브에서 찾은 한국전쟁 사진들을 통해 지난 세월을 차근차근 되새겨보았소.

나는 애초 한국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포로수용소로, 석방 후 다시 국군으로 복무해야 했던 수난의 세월이었소. 이번에 박 선생을 만나 내 지나온 삶을 모두 다 털어놓으니까 마치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아주 시원하고 가뿐했소. 간밤에 박 선생과 헤어진 후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마 면전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 편지에 담았소.

사실 나는 그때 전선에서 도망친 비겁자요, 죄인이외다. 물론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그동안 자위하며 살았지만, 많은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데 몰래 도망친 것은 어쨌든  부끄러운 일이지요.

나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소만 작가는 사람의 양심이 뭔지를 밝혀주고, 사회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이라고 알고 있소. 지난 세월, 한반도에서는 양심이나 도덕, 정의보다 비양심과 부도덕, 불의가 판쳐 왔소. 한 핏줄을 나눈 동족끼리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를 무참히 죽이는 야만의 세월이었소.

전후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은 겉으로는 많이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고는 그 시절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오. 그리고 한반도 휴전선 철조망은 여태 걷힐 징조가 보이지 않고 있소. 하지만 겨울이 깊으면 봄이 오고, 밤이 깊으면 곧 새벽이 오겠지요. 솔직히 나는 지금 북의 동포를 조금씩 돕고 있소. 이 일은 내가 생전에 지은 잘못을 속죄하는 일로 알고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하오.

박 선생, 평화나 통일은 먼저 자기 잘못에 대한 뼈저린 참회와 상대의 잘못에 대한 관용, 그리고 서로 화해하는 가운데 올 것이오. 아울러 진정한 평화는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억누른데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상대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동포애에서 올 것이오. 부디 박 선생이 남과 북 우리 겨레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시오.

여기 박 선생 부인에게 드릴 스카프 한 장과 약간의 노잣돈 동봉하오. 책을 내거나 자료수집에 보태 쓰시오. 그럼 다시 만날 그날을 학수고대하면서.
2007. 3. 10. 아침 워싱턴 용문옥에서
김준기

한 전우의 죽음 앞에 그의 총에다 철모를 씌우고는 추도의 기도를 드리는 유엔군들(1952. 5. 30.).
 한 전우의 죽음 앞에 그의 총에다 철모를 씌우고는 추도의 기도를 드리는 유엔군들(1952. 5. 3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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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약속

나는 편지를 다 읽은 뒤 기내 창 커버를 내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영롱했다. 그 별들 사이에 문득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아홉 살 소년이었다. 그때 우리 악동들은 미군부대 철조망 부근을 어정거리거나 경부선 철길에서 미군열차가 지날 때 손을 흔들면 코쟁이들이 던져준 씨레이션 깡통을 줍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에게 그런 곳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날마다 당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에 꿇어 앉히고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을 펴고는 대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시며 '공자 왈 맹자 왈'을 강독하셨다.

"군자는 식무구포(食無求飽)요, 거무구안(居無求安)이라"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할아버지가 강독한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웠다. 그런 가운데 할아버지의 폭음은 날로달로 늘어갔다.

"지난 10·1사건과 육이오전쟁으로 같은 피를 나눈 젊은이들끼리 서로 죽이는 걸 보고 상심이 커서 그런 모양이데이."

할머니가 폭음으로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사랑으로 모신 뒤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이었다. 

"상민아."
"예."
"니는 어려 잘 모를 거다마는 이번 전쟁은 김일성이와 이승만 때문에 일어났다. 어째든동(어쨌든), 둘이 손잡고 둘로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합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소련제 미국제 무기 마구 끌어다가 애꿎은 백성들 숱하게 죽였다."
"……"
"너는 지금 일을 단디(야무지게) 봤다가 나중에 이 이야기를 꼭 글로  남겨라.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충절의 선비가 많이 나왔다."

나는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다시 밤하늘을 응시하자 할아버지의 얼굴은 사라지고 동녘 하늘 한편에서는 부옇게 새배빛이 밝아왔다. 

위문 공연을 보고자 산을 뒤덮은 국군장병들(1952. 4. 2.).
 위문 공연을 보고자 산을 뒤덮은 국군장병들(1952. 4. 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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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가 이어집니다.

* 이 작품은 99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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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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