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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원산, 1950. 11. 1.).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원산, 1950. 11. 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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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어느 새 준기 부부를 태운 승용차는 평양행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준기는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고향산천을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양 45km'라는 표지판이 지나쳤다.

"김 선생, 하나 물어봅세다."

앞자리 리 선생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말씀 하시라요."
"우리 당 대외연락부 장남철 부위원장 동무를 어드러케 아시오?"
"예? 장남철 부위원장 동무라구요?"

그 말에 순희도 눈이 둥그레졌다.

"와, 기렇게들 놀라시오."

앞자리 리 선생이 다소 놀라며 되물었다.

"장 부위원장 동무 왼쪽 귓바퀴에 상처자국이 있디요?"
"어드러케 기것까지 아시오."
"조국해방전쟁 때 같은 부대에서 항께(함께) 복무했디요."

준기가 대꾸했다.

평양~향산 간 고속도로 도중에 있는 청천강 금성다리(2005. 7. 24.)
 평양~향산 간 고속도로 도중에 있는 청천강 금성다리(2005. 7. 2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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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인연

"제가 그 귓바퀴 상처를 치료해 드렸어요."

순희가 말했다.

"아, 네. 호상간 인연이 대단히 깊구만요. 장 부위원장 동무가 우리한테 특별히 김 선생 내외분 고향방문에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라구 말씀하셨디요."
"아, 네. 그분 만나시믄 덕분에 우리 부부가 고향방문 잘하고 돌아간다구 감사의 말씀 전해 주시라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대동강변의 옥류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대동강변의 옥류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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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기의 말에 리 선생이 대꾸했다.

"기러디오. 이 모든 게 기저 어버이 수령님과 장군님 덕분입네다." 

"오늘 저녁은 우리가 사디요. 평양냉멘 집으로 안내해 주시라요."
"알가시오. 기럼, 옥류관으로 모시겠습네다."
"좋습네다. 평양에 와서 평양냉멘을 먹고 가야디오."
"미터 몰랏구만요."

준기 내외의 4박5일 고향방문이 후딱 지나갔다. 이튿날은 1995년 8월 9일로 준기 내외가 평양공항에서 베이징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도 북쪽 두 선생은 아침 일찍 호텔로 찾아왔다. 네 사람은 고려호텔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같이 먹은 뒤 준기 내외는 곧장 출국준비를 서둘렀다.

오전 11시 비행기라 하여 8시 30분 고려호텔을 출발했다. 호텔에서 평양공항까지는 미처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쪽 홍 선생은 평양공항에 도착하자 공항사무실에서 출국 수속을 해 준 뒤 항공권을 건네주었다. 항공권에는 고려항공 '자리표'라고 우리말이 적혀 있었다. 준기내외는 공항 매점에서 북한산 몇 가지 특산물을 샀다. 들쭉주 두 병과 고사리, 곰취 등 산나물을 말린 것이었다.

탑승 시간이 조금 남아 공항대기실 찻집에서 북쪽 두 선생과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며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북쪽 리 선생의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장남철 부위원장 동무가 여기로 오십니다."

그와 홍 선생은 벌떡 일어나 부동의 자세로 부위원장을 맞았다. 장남철 부위원장은 준기 부부에게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준기 내외도 벌떡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이거 얼마만이야요? 김준기 동무, 반갑수다."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만나고는 처음이니 발쎄 40년이 넘었구만요."
"김 동무가 우리 공훈배우들에게 베푼 동포애는 잘 보고 받았디요."
"별 것 아닙네다."
"아무튼 고맙수다."
.
장 부위원장은 먼저 준기와 포옹했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부산항에 정박 중인 미 해군 Wisconsin 호에서 미 해군 장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1952. 2. 25.).
 한국의 어린이들이 부산항에 정박 중인 미 해군 Wisconsin 호에서 미 해군 장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1952. 2. 2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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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항

"반갑습네다. 장 부위원장 동무!"

장남철은 준기와 포옹을 푼 뒤 옆에 있는 순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반갑습네다. 최순희 동무!"
"반갑습네다. 장 부위원장님!"
"늦었디만 두 분 결혼 축하합네다."
"감사합니다."

장남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최 선생, 내 귀를 보시라요. 내레 이 귀를 볼 때마다 늘 최 선생을 고맙게 생각했디."
"면목 없습니다."

최순희가 몸 둘 곳을 몰라 했다.

"일없습네다. 이미 다 디나간 일이디요. 내레 기때 과수원에서 총 쏘는 솜씨가 서툴러 동무들이 살아난 모양입네다."
"우리 내외는 기때 일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네다."

준기가 대구했다. 장남철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두 분 선생, 고향방문은 잘 하고 가십네까?"
"네. 부위원장님 배려 덕분에 잘 하구 갑네다."

준기가 대답했다.

"오로디 수령님과 장군님 덕분이디요. 이제 길이 트여시니 자주 고향방문하시라요."
"기러디요."

그때 공항 안내방송은 비행기 탑승시간이라고 알렸다.

"기럼, 잘 가시라요."
"안녕히 계시라요, 부위원장님! 두 분 선생님 고맙습네다."
"잘들 가시라요."

준기 내외는 세 사람의 환송 인사를 받으며 공항 활주로 나가 평양 발 베이징 행 고려항공기에 올랐다.

볼티모어 항(2007. 3.)
 볼티모어 항(2007.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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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항의 달빛

볼티모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맥줏집 창가에서 초저녁에 시작한 김준기의 고향방문 이야기는 밤 11시 무렵에야 끝났다. 그새 하현달이 떠올라 푸른 달빛이 실비처럼 볼티모어 내항 위에 쏟아 내렸다.

"마치 제가 북녘을 다녀온 듯했습니다."
"박 선생도 북조선에 다녀오셨다면서요?"
"네, 그래서 준기 아저씨 내외분의 고향방문 이야기가 더 실감이 났습니다."
"두 분이 모두 북한을 다녀오셨다고 하니 물어보겠습니다. 정말 언론보도처럼 북한이 그렇게 어렵던가요?"

고동우가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질문했다.

"내레 잠깐 살펴본 눈에도 모든 게 부족해 보이더만. 밤에는 평양조차도 조명이 밝디 않더라구, 시골은 한 세기 전처럼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야요. 임산부조차도 얼굴이 푸석푸석했구. 북녘동포들이 기러케 굶주리는 원인은 가뭄이나 큰물 같은 자연재해도 있디만 엄청난 국방비 때문이디. 조쿠만 나라가 미국하구 맞짱 뜨니까 기러티."

김준기가 담담히 대답했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저를 안내하던 북측 인사도 당신들이 어렵다는 점을 시인하더군요. 특히 전기와 연료, 식량이 매우 부족해 보였습니다. 취사용이나 난방 연료를 산에서 구하자 산이 벌거숭이라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어 더욱 피폐해지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즈음은 경제가 조금씩 살아난다고 자랑합디다."

나도 잠시 북한을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했다.

미군들이 나눠준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몰려든 피난민들(경기도 파주, 1952. 11. 15.).
 미군들이 나눠준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몰려든 피난민들(경기도 파주, 1952. 11. 1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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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하루 빨리 남북간, 북미간 평화협정을 맺고 양측 모두 군비를 축소해야만 남북의 백성들 삶의 질이 향상될 겁네다. 솔직히 한국도 겉만 번지레하디요. 이 모두가 막대한 군비로 때문이디요. 한국에서 자동차니 신발이니 컨테이너 화물선에 잔뜩 실어 미국에 팔아봐야 전투기 한 대 값에 어림없디. 남북 간 냉전체제로 군사경쟁은 양쪽 백성들의 살림을 더욱 힘들게 하고 기더(그저) 무기업자들만 배불리는 꼴이디."

김준기가 작심을 한 듯 말했다.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이제는 남과 북이 더 이상의 흑백 논리나 선악의 이분법으로 우리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냉전시대의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 남북이 서로 우리만 옳고 상대는 마냥 그르다고 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휴전선 철조망을 허물 수 없을 겁니다."

고용우의 말이었다.

"기럼. 기래야디. 비단 나라끼리가 아닌 개인 간도 기러티. 남북이 화합하구 통일하지면 서루 아픈 곳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도와줘야 해요. 기러면서 서루 차이점은 뒤로 접고 공통점 중심으로 일을 벌려나가야한다구 미국에 사는 한 통일꾼이 기러더만."
"그 분 말씀이 옳습니다. 어느 사회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제도 이념 사상도 마찬가지지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그 사회의 단점을 극복하고, 더 나은 제도나 사상으로 진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엄청난 피해도 있지만 역설로 큰 틀에서 보면 우리나라 곧, 한국은 자본주의와 북한은 사회주의의 두 체제를 함께 체험한 커다란 이점이 있습니다. 이제는 남북이 서로 자기 체제가 더 옳다는 식의 체제 경쟁을 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는 외눈박이의 다툼에서 과감히 벗어나, 상대 체제의 장점은 인정하면서 자기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의 좋은 점은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통일된 우리나라는 그동안 체득한 두 체제의 장점이 결합된 나라가 된다면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비극과 참상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우리를 갈라서게 한 강대국에 선의의 복수도 하는 길이 될 겁니다."
"아주 도와서. 역시 작가의 눈은 다르군."

내 말을 진지하게 듣던 김준기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두 분의 좋은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고동우도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느 시인의 사모곡

북한의 계관시인 오영재(2005. 7. 23.).
 북한의 계관시인 오영재(2005. 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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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랫동안 열심히 들어줘 고맙습네다. 사실 관객이 잘 들어줘야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신명이 나듯, 이야기도 마찬가디야요."
"그 뒤로도 고향방문을 하셨는지요."
"한 번 더 다녀왔습네다. 작년에는 딸 영옥이랑 같이 갔디요. 그새 오마니는 돌아가셋더구만요. 아무튼 내레 오마니 생전에 봬서 다행입니다."

"그럼요, 제가 북녘에서 만난 오영재 시인은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라고 애간장을 태우며 통일을 기다렸건만 끝내 남녘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보내셨다고 눈물을 글썽이시더군요."
"기런 사람은 아직도 남녘 북녘에 수태 많디요."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슬그머니 일어나 재빨리 계산을 하고 돌아왔다. 준기 아저씨도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벌컥 화를 냈다.

"아니 박 선생! 그새 계산하셋더구만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말이 있지요. 그동안 아저씨한테 과분하게 여러 번 대접을 받았는데 이번 한번은 저에게 기회를 주셔야죠."
"기래? 기럼 돟아요. 내레 이번만은 님자에게 접대를 받디. 하디만 내일 떠난다고 하니 섭섭해요. 내레 두 선생을 만나니까 고향사람을 만난 것터럼 반가왔디. 구미는 내레 고향이나 다름 없디. 다음에 올 때도 꼭 나를 찾아주시라요."
"그럼요. 용문옥의 김치 맛을 어찌 잊겠습니까?"
"밤이 늦었습니다."

고동우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내일 오후 비행기이니까 지금 숙소에 가도 푹 잘 수 있습니다."

고동우는 볼티모어 항에서 돌아오면서 준기 아저씨를 먼저 내려주고 다음에 내 숙소로 향했다.

부산, 산동네 고지대에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천막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부산, 산동네 고지대에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천막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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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 이 작품은 99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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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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