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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항에 착륙한 고려항공기(2005. 7.)
 평양공항에 착륙한 고려항공기(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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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평양

뉴욕 이산가족찾기위원회

1988년 3월 뉴욕 이산가족찾기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기구는 뉴욕에 사는 몇 동포들이 순수한 민족애로 북에 고향을 둔 이산 가족들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심재호씨가 주도하는데, 그는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의 막내아들로 '일간 뉴욕' 발행인이었다. 윤성오 목사도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준기는 윤 목사에게 이 위원회의 발족 소식을 듣고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서 북의 가족을 찾는 신청서를 냈다.

<이산가족찾기후원회 발족에 즈음하여>
한반도 분단의 고통은 지난날 일제강점기 36년간의 고통보다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고, 슬퍼도 마음 놓고 울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남과 북의 내 고향과 혈육을 보고 싶고 밟아보고 싶어도 하늘만 쳐다보며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산가족의 아픔과 서러움과 억울함은 바로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이 맺힌 한이며, 이는 우리 겨레의 비극입니다. 이산 가족 재회는 우리 겨레의 한을 푸는 길이며, 민족 화해와 조국통일, 나아가 세계평화로 가는 지름 길입니다. 이를 위한 행동은 우리의 의무이며, 권리이며, 사명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비극과 두려움과 불신의 구속에서 스스로 벗어나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눈을 뜨고 새로운 활동을 할 때입니다. 이러한 취지로 뜻있는 이들이 뉴욕에 본부를 두는 이산가족찾기 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이산가족찾기 후원회는 북한의 이산가족찾기 기구인 해외동포위원회와 베이징에서 회담 후  다음과 같이 합의, 협조키로 하였습니다.,

합의사항

1. 두 기구는 이산가족찾기에 있어서 모든 연락을 직접 한다.
1. 두 기구는 찾은 이산가족 명단을 정기적으로 서로 알린다.
1. 이 사업은 공개적으로 하되, 개인사항은 비공개로 한다.
1. 이산가족의 과거는 불문에 붙인다.
1. 이 사업은 이산가족찾기에 한한다.

우리는 한민족의 재결합이라는 숭고한 이 사업의 앞길에 수많은 가시밭과 험준한 준령이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각계각층의 격려와 후원과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1988년 3월  뉴욕이산가족찾기후원회

평양 만수대학생소년궁전에서 북한의 청소년들이 특기교육을 받고 있다(2005. 7.).
 평양 만수대학생소년궁전에서 북한의 청소년들이 특기교육을 받고 있다(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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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인권

그날 그 자리에서 뉴욕의 한 대학 동포 교수의 발기대회기념 강연이 있었다.

저는 1975년 월남전이 끝난 이태 뒤 한 사석에서 월남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네들은 미국과 우편이 통하고 송금도 하고 있다. 당신네들은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편지도 못하고 있다니 웬일이냐?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누구를 핑계대기 전에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했습니다.

우리는 화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찾고, 형제를 만나고, 두고 온 자식이나 아내를 찾아가는 것은 인간의 기본 인권입니다. 이는 아무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남의 눈치나 보거나 의심하고, 등 뒤에서 색깔이 어떠니 모략이나 하면서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고 살아야합니까? 이거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인간의 기본 인권침해에 정말 화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공장지대(흥남, 1950. 12. 24.).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공장지대(흥남, 1950. 12. 24.).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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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수의 카랑카랑한 강연이 계속되자 별안간 "옳소!" 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박수도 쏟아졌다. 또, 그날 이 자리에는 심재호씨가 북에서 찍어온 가족 상봉 장면과 함께 북의 산천을 찍은 사진을 곁들여 전시했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도 대체로 도둑고양이처럼 조심했다. 자기 고향 사진을 보면서도 누군가가 자기를 보지나 않나 하는 경계하는 태도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눈물을 닦는 노인들도 있었다.

준기는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과거는 불문에 붙인다"라는 뉴욕 이산가족찾기위원회와 북측 해외동포위원회의 합의사항이 그의 마음을 편케 했다. 준기가 이산가족을 찾는 신청서를 접수한 지 1년 만에 고향 옛집에는 어머니가 동생 철기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용문탄광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퇴직 후 1983년 일흔다섯 살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뉴욕 이산가족찾기위원회 실무자들이 계속 북한을 오갔다. 준기는 이들 편에 어머니에게 편지도 보냈고, 또 답장도 받았다. 뉴욕 이산가족찾기위원회 실무자는 준기의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 용산면 구장동은 그새 북한의 행정개편으로 구장군청 소재지로 승격되었다는 반가운 고향소식도 전했다.

지게부대 노무자들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1951. 2. 4.).
 지게부대 노무자들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1951. 2. 4.).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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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여경

1993년 10월, 북녘의 영화 예술인들이 뉴욕에 왔다. 준기는 윤 목사의 소개로 용문옥에 찾아온 그들에게 고향사람을 만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정성껏 만찬을 베풀었다. 그들이 돌아갈 때 약간의 후원금도 기부했다. 그 이듬해 준기 부부가 윤 목사의 권유로 고향방문을 신청하자 1995년 여름 북측에서 비자가 나왔다.

아마도 지난날 영화 예술인들을 후하게 접대하고 후원한 탓이었나 보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적선여경(積善餘慶)'이라는 말은 동서고금, 공산사회에서도 통했다. 곧 준기 부부는 뉴욕에서 베이징으로 날아간 뒤 평양행 고려항공기를 갈아탈 수가 있었다.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행 고려항공기에 오르자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여승무원들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네까?"
"네. 안녕하세요."

승무원 인사말에 순희가 답례를 했다. 그 인사말에 준기 부부는 정말 고향 가는 비행기에 오른 기분에 젖었다. 곧 기내에서는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가 그들 부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준기의 고향가는 길은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가까운 길을 두고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가서 북한행 비행기에 올랐다. 준기는 꿈을 꾼 듯 황홀하기도 하고 멍멍하기도 했으며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오마니, 아무 걱정 마시라요. 내레 어떤 고난에서두 꼭 살아서 돌아오갓시오."
"기럼, 기래야 당한(장한) 내 아들이디. 우리 아들 둔기 만세다!"

준기는 45년 전 고향 구장 역에서 열차를 타고 떠나올 때 어머니 모습과 말씀이 어제 일처럼 다가왔다.

적군 전사자 시신들을 밧줄로 끌어 옮기고 있다(1951. 5. 24.).
 적군 전사자 시신들을 밧줄로 끌어 옮기고 있다(1951. 5. 24.).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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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은 본문 98회, 후기 1회 등 모두 99회로 12월 중에 끝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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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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