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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이 지급한 군복을 길에다 벗어던지고 돌아가는 북송 포로들(1953. 8. 21.)
 유엔군이 지급한 군복을 길에다 벗어던지고 돌아가는 북송 포로들(1953. 8. 21.)
ⓒ AP,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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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버려진 군복들

2007년 3월 9일은 아카이브에서 3차 한국전쟁 자료수집을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내가 스캔한 사진은 모두 32장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코믹하면서도 못내 가슴 아픈 사진은 정전협정 조인 뒤 인민군 포로들이 트럭을 타고 북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북행길에 입고 있던 옷을 판문점 어귀에 이르자 하나같이 죄다 벗어 길가에 버리고 팬티만 입은 채로 귀환하고 있었다. 도로 양 편에는 포로들이 버린 옷들이 너절하게 널려있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이 끝났다는 해방감에서 나온 행동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 측간 포로생활 중 그 골이 그만큼 깊었다는 반증으로도 보여 씁쓸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일제강점하 이민족에게 '조센징'으로 핍박받았던 한 겨레, 한 형제간이 아닌가. 그 사이 무슨 사상과 이념에 그렇게 중독이 돼 서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됐다는 말인가. 나는 이 사진들을 스캔하면서 한바탕 통곡하고 싶었다. 이런 상대에 대한 증오심을 극복치 못한 한, 통일의 길은 요원할 것이다. 고동우는 남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밖에 양쪽 다리가 모두 절단된 한 부상병은 의족에 목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장면의 사진도 스캔하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다.

인민군 포로들이 그동안 유엔군에서 지급하여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진 뒤 팬티차림으로 트럭을 타고 북에 돌아가고 있다(판문점, 1953. 8. 11.).
 인민군 포로들이 그동안 유엔군에서 지급하여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진 뒤 팬티차림으로 트럭을 타고 북에 돌아가고 있다(판문점, 1953. 8. 1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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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엔군 측 머레이 대령과 북한 인민군 측 장춘산 군관이 한반도 지도에다 38선 대신 새로운 분단선인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를 긋는 사진도 마음을 저미게 했다. 원한의 38선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두 동강낸 채 겨레의 단장의 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감동적이며 기분 좋았던 사진은 전란 중에도 설날을 맞아 한복으로 예쁘게 설빔을 차려 입은 소녀들이 동네 마당에서 널뛰는 장면이었다. 구김살 없는 소녀들의 표정이 어찌나 맑은지 전란을 겪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 같지 않았다.

또 전란으로 교실이 불타버려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는 한 소녀가 동생을 무릎에 앉힌 채 공부하는 장면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처마 아래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하는 장면의 사진을 찾았을 때도 기분이 짜릿했다. 사진속의 소년 소녀들은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그들의 해맑은 표정과 미소가 우리 겨레의 미래처럼 보였다.

이날 마지막으로 스캔한 사진은 한 남정네가 병중인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난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성스러움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사진을 찾을 때 나는 사진 앞에 묵념을 드렸다. 마지막 날이라 평소보다 30분 이른 오후 4시 반에 일을 끝냈다.

한 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1951. 11. 18.).
 한 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1951. 11. 1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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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서울 은평, 1950. 10.).
 전쟁으로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서울 은평, 1950. 1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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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비스트

이날 자료실에서 대출한 자료 상자를 모두 반납하고 그동안 도와준 4층 사진자료실 담당 아키비스트 제니와 브라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합창하듯 말했다.

"Mr. Park, See you again next year."
(박 선생, 내년에도 또 봐요.)

나도 그동안 익힌 영어로 답했다.

"Thank you, See you again."
(감사합니다. 다시 만납시다.)

나는 그동안 사진설명을 기록한 종이를 한 장도 빠짐없이 가방에 챙겨 넣고 자료실을 떠났다. 우리가 아카이브 정문을 나서자 김준기가 건너편 길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영옥은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오늘이 아카이브 출근 마지막 날이라고 했디오?"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덜레스공항에서 비행기 타는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 이런 날은 마음 편케 바람 좀 쐽세다. 어때요 우리 대서양 바람이라도 좀…."
"좋습니다. 저는 대서양 바람 쐬기가 쉽지 않지요."

나는 준기 아저씨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여기서 가까운 볼티모어 항으로 갑시다. 따님은 바쁠 테니 용문옥으로 돌려 보내고 제 차에 타십시오. 저도 김 회장님 다음 이야기가 매우 궁금합니다."

고동우는 끝까지 나를 책임질 모양이었다.

"고맙습네다, 고 선생님. 왜 '남의 일을 보아 주려거든 삼년 내도록 봐주어라'는 말이 있디요. 언제 가족과 함께 우리 농문옥으로 오십시오. 내레 대접하가시오."
"초대 감사합니다."

나는 2주일 동안 아카이브에서 사진을 들추며 오래 된 먼지를 많이 마신 탓인지 목구멍이 컬컬했다. 마침 1차 방미 때 가본 적이 있는 볼티모어 흑맥주 생각도 간절했던 참이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가 불타버린 곳에서 야외수업을 받고 있다(서울, 1953. 10.).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가 불타버린 곳에서 야외수업을 받고 있다(서울, 1953. 1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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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항구의 밤

우리 일행이 부지런히 볼티모어 항에 이르렀다. 그새 볼티모어 항구 앞 바다에는 달빛이 실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볼티모어 내항은 호수처럼 물결도 잔잔했다. 부두 한 모서리에는 미 해군 최초의 군함 콘스털레이션 호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볼티모어 항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항구였다. 우리 세 사람은 볼티모어 항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한 맥줏집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바닷게 안주에 흑맥주를 마셨다. 안주가 좋았던 탓인지 흑맥주 맛이 일품이었다. 김준기의 다음 이야기가 릴 테이프처럼 돌아갔다.

볼티모어 항(2007. 3.)
 볼티모어 항(2007.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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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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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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