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화자인 박상민은 작가로 2007년 2월 하순, 미국 워싱턴 근교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했다. 어느 날 한 인민군 포로가 미군 포로신문관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그 포로가 매우 어린데 놀란다. 박상민은 그 순간 어린 시절 자기 고향인 구미에 흘러온 인민군 포로 김준기 아저씨를 떠올린다.
남 주인공 김준기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평북 영변군 용산면 용문중학교 학생으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한다. 여 주인공 최순희는 서울 적십자간호학교 학생으로 인민군 서울 입성 후 의용군에 입대한다. 이들은 낙동강 다부동전선에서 위생병 사수 조수로 만난다. 1950년 8월 하순부터 유엔군 총공세로 날마다 다부동 유학산 일대에 쏟아 붓는 미군 B-29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견디지 못해 최순희는 조수 김준기를 꼬드겨 한밤중 두 사람은 전선을 탈출하여 낙동강을 건넌다. 이들은 한 민간 집에서 몸을 피하면서 서로 정을 통한다. 최순희는 탈출 중 이별을 대비하여 김준기에게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이후 탈출 도중 김준기는 유엔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로 가게 된다. 그는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휴전을 앞두고 남이냐 북이냐를 결정 순간을 앞두고 어머니이냐, 순희냐의 선택에 몹시 갈등을 느끼다가 포로송환을 묻는 기표소에서 먼저 떠오른 얼굴에 따라 'S'(South, 남)와 'N(North, 북)'을 택하기로 작정한다. 준기는 마침내 'S' 쓰고 반공포로로 남녘에 남는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김준기는 천만 뜻밖에도 헌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수용소 철조망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준기는 그렇게 그리던 바깥세상에 나왔건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준기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래도 준기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최순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는 포로 석방 일주일 뒤 국군에 입대한다. 군 복무 중에도 약속한 날 대한문에 갔으나 끝내 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준기는 강원도 화천의 한 국군부대 의무실에서 복무한 뒤 제대하고는 곧장 순희를 찾아 나선다. 그는 순희와 첫 정사를 나눈 구미 형곡동을 찾아갔으니 행적은 찾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가축병원 수의사 조수로 근무하다가 대전의 한 대학 부속가축병원에서 일하게 된 뒤 결혼하여 딸까지 두지만 파혼에 이른다.
한편 순희는 탈출에 성공하여 집에 돌아왔지만 그의 아버지는 부역자로 처형되자 순희네는 생계를 위해 의정부 미군부대 곁 판잣집에서 세탁업을 한다. 순희는 미 제2사단 의무실 간호사로 근무 중 거기서 알게 된 데이비드라는 미군과 국제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이후 이들의 사연이 한 신문의 사회면 톱기사로 실린다. 이 기사를 본 순희 동생 순옥이가 미국의 언니에게 연락한다.
#19. 재회데이비드순희는 서울에서 동생의 전화와 편지를 받은 이후 많은 갈등을 겪었다. 당장 순옥이가 가르쳐준 준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전화번호 다이얼을 돌리고 싶기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가 만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다. 하지만 마흔을 넘긴 전쟁미망인이 철부지 소녀처럼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 그즈음 순희는 데이비드에 대한 추모의 정이 매우 깊었다. 정작 순희는 데이비드가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사랑이 더 깊었다. 그의 헌신적인 가족사랑 때문이었다. 솔직히 순희가 데이비드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배경은 데이비드가 곧 미국인이라는, 그 조건이 가장 컸다.
순희가 데이비드와 결혼하고 보니, 그는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교를 졸업하자 곧 군에 입대하였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등 오랜 전투생활로 정상생활에 적응이 매우 힘든, 또 하나의 전쟁 피해자였다. 한국전쟁은 그의 영혼을 더욱 병들게 했다.
그는 한국에서 군대생활을 마치고 본국에 돌아간 뒤 전역을 하자, 곧 전쟁공황장애로 몹시 앓았다. 그는 전쟁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잊고자 알코올에 찌든 무기력한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 미국이 월남전에 깊숙이 개입하여 많은 전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전역자 가운데 희망자를 재소집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큰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게다가 남은 가족을 위해 자원하여 월남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김준기조선인민군이었던 김준기, 그는 전선에서 자기를 살려주고, 사지에서 탈출을 도와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 그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부모가 살고 있는 북의 고향도 버린 채, 남쪽에 남아 20년간 한결같이 자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순희는 그 사실을 알고 마냥 외면하기가 양심상 괴로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 약속 장소는 자기 입으로 말한 덕수궁 '대한문'이 아닌가.
마침내 순희는 준기를 만나러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미리 준기에게 전화를 하려다 참았다. 동생 순옥에게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약속장소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단 둘이 조용히 극적으로 만나고 싶었다.
순희는 병원에 2주간 휴가를 냈다. 1974년 8월 14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도록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날이 다가오자 순희는 마치 24년 전 야전병원에서 애송이 소년병 김준기를 훔쳐봤을 때 이상으로 설렜다.
어느 날 밤 낙동강에서 멱을 감으러 갈 때 준기한테 동행을 청했던 자신의 당돌함, 그리고 미 폭격기의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유학산 전선에서 그를 꾀어 탈출하던 그날 밤의 박진감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조선호텔1974년 8월 14일 오후 4시 순희는 김포공항 트랩을 내려왔다. 순희가 미국으로 떠난 지 15년 만의 귀국이었지만, 그는 일부러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돌아왔다. 그것은 자기를 20년이 넘게 기다려준 김준기에 대한 조그마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순희는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시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 주세요.""아마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이 거리가 비슷할 겁니다.""그럼, 조선호텔로 가 주세요."택시 차창 밖으로 내다본 김포가도는 그새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택시기사는 김포공항을 출발한 지 40여 분 만에 조선호텔 정문에 내려주었다. 조선호텔은 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빈 객실이 있었다. 순희는 널찍한 디럭스 룸으로 잡았다.
순희는 짐을 푼 뒤 몸을 닦고 저녁식사 겸 산책을 나갔다. 시청 앞, 대한문, 남대문을 돌아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시장 노점에서 수제비를 사먹었다. 전쟁 직후 얼마나 귀하고 맛이 있었던 남대문시장 수제비였던가.
순희는 저녁식사를 마친 뒤 어머니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락거렸던 남대문도깨비시장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곳은 예나 다름이 없이 미제 물건이 흔전만전 넘쳤다. 남대문 지하도 어귀에는 여태 달러아줌마들도 서성거렸다. 신세계백화점을 둘러본 뒤, 미도파 백화점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하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대한문1974년 8월 15일, 서울시내 거리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광복절로 시내 분위기는 한결 차분했다. 순희는 간밤에 늦게 잠들었지만 그날은 일찍 잠에서 깼다. 시차로 몸이 무거울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가뿐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뒤 사우나 실, 미용실을 다녀오자 그새 11시였다.
순희는 이날을 위해 미리 맞춰 둔 크림색 투피스를 입었다. 조금 전 미용실에서 머리도 짧게 잘랐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10년은 더 젊게 보였다. 한국에서 유행한 "여자와 집은 꾸미기 나름이다"이라는 말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순희는 자기의 자존심을 위해 일부러 12시를 넘겨 조금 늦게 대한문에 도착할까 생각하다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11시 40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다시 보는 서울에 정감이 갔다. 순희는 순옥이 보내준 테이프로 익힌 '서울의 찬가'를 흥얼거리며 덕수궁으로 향했다.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 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 / 변함없는 내 사랑아 / 내 곁을 떠나지 마오. / …"
20년째 나들이광복절은 해마다 무더웠다. 그럼에도 준기는 이날 아침도 예년처럼 정장으로 차비를 차린 뒤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11시 30분이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보도로 남대문을 지나 덕수궁으로 걸어가는데 이날따라 왠지 느낌이 야릇했다.
잠깐 새 21년 동안 대한문을 찾았던 추억들이 남대문로를 뒤덮은 태극기 물결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러면서 준기는 남은 인생도 순희를 만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해마다 이날이면 대한문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기는 이 일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여겨졌다.
'그래,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야.' 준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순희 누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할 테고, 그러면 반드시 이날 대한문에 나타날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신념이 준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1시 55분, 준기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대한문을 바라보는 데 갑자기 심장이 멈춘 듯했다. 한 여인이 자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준기는 순간 눈을 깜짝이고는 다시 크림색 투피스의 양장을 한 그 여인을 뚫어지게 살폈다. 분명히 최순희 누이였다. 준기는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꼬집는 감각이 있었다. 다시 눈을 껌뻑거려 보았다. 최순희는 활짝 웃으며 여전히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준기는 순희 누이에게 달려갔다.
"순희 누이!""준기 동생!"두 사람은 부둥켜안았다. 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덕수궁 수위도, 매표원도 불현듯 나타나 박수를 쳤고, 문창배 기자도 사진촬영을 끝낸 뒤 박수를 쳤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