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금강교 폭파 장면(1950. 7.)
 금강교 폭파 장면(1950. 7.)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금강 현도교 검문소

순희가 헌병에게 붙들려 간 곳은 대전 신탄진과 청원군 현도면을 연결하는 금강 현도교 검문소였다. 전란으로 다리가 폭파되어 그즈음까지는 복구치 못해 나루터로 변해 있었다. 헌병은 순희를 나루터 검문소에서 조금 떨어진 막사로 데리고 갔다. 한 헌병 하사관이 순희를 인계받았다.

"이 쌍년이 뒤지려고 환장을 했지, 어디 총을 쏘는 대도 도망을 가!"
"계집들은 천지도 모른 채 겁대가리가 없다니까."

그들은 순희를 인수인계하면서 한 마디씩 뱉었다. 헌병 하사관은 막사 한쪽 구석에 있는 유치장에 그대로 입감시켰다. 그날 밤 초저녁에 헌병 하사관에게 신문을 받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야?"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집이 어딘데?"
"서울이에요."
"뭐? 서울? 이 전시에 왜 여기까지 왔나?"
"양식을 구하려고요."
"학생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 조서에 인적사항을 모조리 적어."

순희는 조서를 받아 빈 칸을 메웠다. 그런 뒤 신문관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조서를 훑으면서 물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영동 외가에 양식 구하러 갔다가 전쟁이 끝난 것 같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순희는 미리 생각해 둔 거짓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런데 왜 도망갔나?"
"헌병이 무서워서…."
"일단 여기 잡혀온 이상 주소지와 학교에 조회해 본 다음 진술한 사실이 확인되면 풀어줄 거야. 일단 유치장에 들어가 있어!"
"사실 확인이 며칠 걸리나요?"
"글쎄, 전화와 현지 사정에 따라 다르니까 사흘이 걸릴지 닷새가 걸릴지 두고 봐야 알겠어."
"네에?"
"지금은 전시 중인데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북상 중이라 그래."

순희는 그 말에 뜨끔하여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신문이 끝나자 헌병 하사관은 순희를 다시 유치장에 가뒀다.

오늘의 금강 현도교(신탄진, 2013. 7. 30.).
 오늘의 금강 현도교(신탄진, 2013. 7. 30.).
ⓒ 박도

관련사진보기


유치장

유치장에는 세 명이 쭈그려 앉아 있는데 모두 순희보다 나이 많은 부녀자로 보였다. 옆방 남자 유치장에는 여남은 명으로 빼곡했다. 유치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름한 차림으로 눈에는 초점이 흐릿했다. 순희 역시 그런 몰골로 유치장에 들어온 뒤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머리를 벽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최순희!"

유치장 헌병 감시병이 불렀으나 미처 듣지 못했다.

"야! 최순희!"

순희는 그제야 게슴츠레 눈을 떴다.

"보따리 갖고 이리 나오라!"
"네?"

순희는 담담한 마음으로 쌀과 옷을 담은 보따리를 등에 지고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에 신문하던 헌병 하사관이 유치장 문 앞에 서 있었다. 하현달이 동녘하늘에 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밤이 깊은 듯했다.

"우리 대장님께서 특별히 너를 신문하겠다고 하신다."

그는 순희를 포승줄로 묶은 뒤 지프 뒤에 태우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순희는 '왜 헌병대장이 한밤중에 자기를 특별 신문하겠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야, 최순희. 너 우리 대장님 묻는 말에 고분고분 답하면, 현지 조회가 오기 전에도 풀려날 수가 있어. 그렇게 풀려난 여성들이 꽤 많아."

대전 근교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북상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환송하고 있다(1950. 9. 28.).
 대전 근교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북상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환송하고 있다(1950. 9. 28.).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특별 신문

그는 그 말을 끝내고 운전병과 함께 '씩'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지프는 검문소에서 채 5분도 되지 않는 한 민간인 집 앞에 섰다. 아마도 군 당국은 한 민간인 집을 징발하여 헌병대장 사무실 겸 BOQ(독신장교 숙소)로 쓰는 듯했다. 헌병 하사관은 조서와 함께 최순희를 헌병대장에게 인계했다. 헌병대장 조철만은 40대 중반으로 대위 계급장과 헌병임을 상징하는 요란한 장식을 가슴과 어깨에 달고 있었다. 비교적 큰 기와집이었다. 그집 안방을 헌병대장 집무실 겸 침실로 쓰는 듯, 가운데는 책상과 그 옆에는 군용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순희는 집무실로 들어간 뒤 공포감에 질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야, 별명이 없는 한, 이 방에 접근치 말라."
"알겠습니다. 대장님!"

당번병이 크게 복창했다.

"주 하사, 수고했어.  이젠 가도 좋아."
"충성! 돌아가겠습니다."

헌병대장 조 대위는 방문을 닫은 뒤 순희의 포승줄을 풀어주며 능글맞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어리군. 앉으라."
"괜찮습니다."
"어른이 앉으라면 앉아!"

순희는 그 말에 의자에 앉았다.

"저녁 먹었나?"
"네."
"원래 유치장 밥이란 형편없지. 특히 이 전시에는."

헌병대장은 방문을 열고 고함쳤다.

"야, 당번병!"
"네, 대장님!"

작대기 둘 계급장을 단 헌병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저녁 2인분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식사는 이미 준비된 듯 곧 당번병이 밥상을 방안으로 들고 왔다. 밥상에는 닭백숙에 밥 그릇 둘 등 반찬으로 가득했다. 당번병은 별도로 주전자도 들여 놓았는데 술이 가득 들어 있는 듯했다.

한국보육원 원생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기 직전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서울, 1956. 4. 3.).
 한국보육원 원생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기 직전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서울, 1956. 4. 3.).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헌병대장

"야, 이리 오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 일단 먹고 신문을 슬슬 시작하자. 나 혼자 먹기도 그렇잖니?"
"저는 됐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야, 어른이 들라면 드는 거야."
"저는 속이 좋지 않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좋아. 너 검문소 유치장에서 한 열흘간 묵고 싶은가 보지. 이 조철만이 사전에는 품안에 걸려든 계집들은 놓치는 법이 없어. 암. 그렇고 말고. 알겠어?"
"……"
"속이 아파 정히 먹을 수 없다면 여기 와 술이나 한 잔 따르라."

순희는 그 말을 못 들은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래 두고 보자. 곧 내가 아주 너를 실신시켜 줄 테니."

헌병대장 조 대위는 자기 손으로 주전자의 술을 따르고는 한 잔을 벌떡 마신 뒤 닭다리를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는 자기 그릇 닭백숙을 다 들고난 뒤 게트림을 했다.

"이 맛있는 백숙을 마다하니 너 배때지가 부른 모양이지."

그는 다시 술 한잔을 따라 들이키고는 바깥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야! 당번병! 상 내가라."
"네! 대장님!"

당번병이 득달같이 달려와 상을 내갔다.

"야, 다시 주의 주는데 별명이 없는 한 이 방에 접근치 말라."
"알겠습니다. 대장님!"

당번병이 크게 복창하고는 물러났다. 다시 방안에는 두 사람만 마주 보고 앉았다. 석유램프 등불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는 램프의 심지를 올리고는 최순희의 신문조서를 폈다.

"적십자 간호학교라… 서대문 네 거리에 있는 적십자병원 안에 있는 그 학굔가?"
"네, 그렇습니다."

피난민촌에 미군 구호차가 오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경기도 파주, 1953. 1. 29.).
 피난민촌에 미군 구호차가 오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경기도 파주, 1953. 1. 29.).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호랑이굴

"집이 원서동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계동 옆이지."
"맞습니다."
"학교도, 집도 모두 내가 잘 아는 곳이구먼…."

헌병대장 조 대위는 순희가 영문도 모르는 말을 했다. 적십자병원 옆에는 경교장이 있었고, 그 전해 계동 중앙학교 옆에는 백범 암살범 일당의 아지트가 있었다.

"일단 소지품 검사와 신체검사부터 해야겠어."

순희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면서도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난 구미 임은동 야전병원에서, 유학산에서, 낙동강에서, 신평 과수원에서 이미 죽었을 몸이야. 네 번이나 사지에서 살아났으면 됐지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으랴.'

그런 생각이 퍼뜩 스치면서도 어쩐지 이번에도 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구미 신평 과수원에서 살아난 뒤 준기와 나누었던 대화도 생각났다.

"오늘 우리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무엇이 무섭겠어요."

'그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부릅뜨면 저 헌병대장에게도 분명히 허점이 있을 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댔어.'

강추위 속에 피난민들이 나룻배를 타고자 한강 둔치에서 뱃사공을 기다리고 있다(서울, 1951. 1.).
 강추위 속에 피난민들이 나룻배를 타고자 한강 둔치에서 뱃사공을 기다리고 있다(서울, 1951. 1.).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