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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나가 버린 시간의 둘레에는 담장도 없고 샘울타리도 없다. 따라서 만약 샅샅이 기억할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 리처드 루엘린 <나의 계곡은 푸르렀도다> 중

늦은 밤, 오늘도 어머니는 당신의 방 창문 너머에 굳건히 뿌리박고 살고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바라보고 계신다. 팔순의 나이, 작아진 몸집의 어머니와 달리 나무는 나날이 풍성해지는 풍모를 자랑한다. 그 실루엣은 어둠에 가려져 희미하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잎사귀들은 먼 곳의 불빛을 받아 아련하게 흔들린다.

남편과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른 남해안 3박 4일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어머니는 홀로 주무셔야 했다. 같이 가자고 해도 마다하시던 어머니였다. 2013년의 8월 어느 날, 그렇게 우리 부부와 어머니 세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밤에 혼자 주무시기 무섭지 않으셨어요?"
"네 큰오빠가 그리 간 뒤로는 무서운 것이 별로 없다."

나의 큰오빠는 2003년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던 큰아들은 깡마른 몰골로 혹독하게 시련을 겪은 뒤 황폐한 모습만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났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이제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은 주변에서도 그리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맞닥뜨린 어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응어리진 상처를 드러내는 일, 그것은 본인이나 주변인들에게 간혹 성가신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치유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도 그랬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그 일을 두고 남겨진 우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으신 일이 없었다. 그러셨던 분이 웬일로 오빠에 대해 언급을 하신 걸까.

현재는 없고 오로지 과거... 어머니의 이야기는 길고 길다

2001년(왼쪽)에 시작돼 2007년(오른쪽)에서 멈춰버린 어머니의 일기
 2001년(왼쪽)에 시작돼 2007년(오른쪽)에서 멈춰버린 어머니의 일기
ⓒ 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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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철없는 젊은이들에 대해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왕년'에 '한가락' 하지 않은 사람 없고, '예전'이 좋지 않았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과거를 미화시키기도 하고 그것을 빌미로 현재의 세태를 꾸짖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불합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2차 대전과 한국전쟁 등 두 번의 전쟁과 일제 치하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예전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참 많이들 죽었지. 우리 동네 어떤 아저씨는 공습경보 발령되니까 숨는 게 아니라 동네 개울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단다. 미친 사람처럼…. 무서워서겠지."

맥주 한 잔이 어머니의 말문을 연 것일까. 오늘따라 말씀이 많아지신다.

"네 아버지가 부산에서 군 생활하실 때 네 두 오빠를 낳았지. 그때는 수돗물이 안 나와서 물을 길어 먹었어. 네 큰오빠를 낳고 몸조리할 때 네 이모가 와서 도와줬는데, 이웃집 아줌마가 '기저귀에 똥이 그대로 있더라'고 나한테 몰래 얘기해주더라."

우리는 모두 웃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이모와 삼촌들에게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결혼도 안 한 어린 처녀였던 이모가 해야 했던 몸조리 도우미 노릇이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말씀을 이어가신다.

"네 아버지는 항만사령부 보급계에 계셨는데 5년 정도 살다 춘천으로 발령 났지. 네 이모들은 부산에서, 춘천에서 이모부들을 만나 결혼했던 거란다."

그리고 이야기는 해병대 복무 당시 결혼했던 큰이모 부부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강원도에서 교사생활 중 무장공비를 잡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서울로 발령받게 됐던 것, 두 아들을 얻게된 이야기 등등. 그 후로도 이야기는 어머니 주변인물들을 샅샅이 훑는 것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새로운 것들이 전혀 아니었다. 어머니의 작아질대로 작아진 몸속에는 온전히 예전의 기억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남편과 나의 머릿속에는 이제 어머니의 예전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그림이 그려질 정도가 됐다. 부산·춘천·속초 그리고 서울에서의 모든 기억들은 이제 온전히 어머니만의 것이 아니다.

일제의 핍박, 한국전쟁과 그 후의 몹쓸 고생 등 풍운의 근대사의 충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방어해야 했던 우리의 어머니 세대.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은 역설적이게도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거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글 쓰고 잡다한 것을 만드는 재주밖에는 없었던 그리고 그것을 돈 버는 일과 접목시키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때로는 밤을 새워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거의 일. 오늘은 어머니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0년 전 오빠의 죽음 이후 사라진 현재의 이야기들 말이다. 과거를 뱅뱅 도는 어머니의 기억, 마치 금기처럼 여겨지는 오빠에 관한 이야기들. 슬픔은 마음 속에 담아두면 절대로 완화시킬 수 없다는데, 나는 어머니가 걱정이다.

어머니에게 창밖 단풍나무는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방 창밖 단풍나무의 모습
 어머니방 창밖 단풍나무의 모습
ⓒ 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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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 훌쩍 넘은 아파트를 지키고 서 있는 어머니 방 앞의 단풍나무는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리로 옮겨지기 전에도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을 나무는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도 여러 주인(?)을 맞았었다.

나무의 가지들은 각종 사연을 간직한 듯 비틀리고 옹이가 새겨졌다.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이파리들은 그것들을 털어놓고 싶은 듯 아스라한 움직임이다. 어머니는 밤이고 낮이고 집에 계실 동안에는 하염없이 그 나무를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 이 집에 이사 와서 벌써 14년째인데, 그동안 나무가 참 많이 컸죠?"

나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
"오늘 왜 그러셨어요?"
"…."

넌지시 건네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얼굴도 한껏 굳어지신다.

오늘도 어머니는 경비실에서 한참 승강이를 벌이고 오셨다. 어느 집의 이사가 있었는데, 이삿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도중 단풍나무의 가지가 조금 훼손되고 말았던 것이다. 단풍나무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유별나게 느껴진다. 

"엄마. 도대체 저 나무에 왜 그리 집착을 하시는 거예요? 경비실에서도 그렇고 관리사무소에서도, 이웃들도 이상하다고 말씀하세요. 어디 엄마 무서워서 나무 건드리기라도 하겠냐구요."
"그러게요. 어머니. 저 나무가 우리 집 것이면 괜찮지만 아파트 공동 재산인데 마치 사유재산처럼 다룬다고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남편도 거든다. 나무에 관련된 것이라면 왜 그리 집착을 보이는 것인지 때로는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은 그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 세상이 어머니를 '별난 할머니'라 명명하기 전에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시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저건…, 저건 죽은 네 오빠다. 아침에 일어나 나무에 인사하고, 낮에 한참 이야기 나누고, 밤에 자기 전에 또 작별인사를 한단다. 저 나무가 없었으면 난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

남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머니는 여태 창문 앞 단풍나무를 자신의 죽은 아들이라 여기며 사셨던 것이다. 아들과 딸·사위 그리고 손주들, 우리 모두에게 말 못한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우리 앞에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틈만 나면 노래와 춤을 즐기시던 어머니. 오빠를 잃고 고통과 비탄으로 사위어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 그것이 창문 밖의 단풍나무 때문이었다니. 위로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한평생 고생하며 살았지만 아무 원망도 없다. 세 남매가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줬고, 그중 하나가 없는 게 원통하지만은…. 어쩌겠니.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게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그 연세에 맥주를 연거푸 세 잔이나 드셨으니 일어서시는 게 조금 힘드신가 보다. 비틀거리시는 어머니를 나와 남편이 얼른 부축했다.

"쓰러질 것 같은 순간에도 방에 들어와 나무가 말하는 것들을 듣고 내 맘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면 힘이 나곤 했단다. 죽은 네 오빠가 저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아."

가끔 속으로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돌아가신 게 그리 슬프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왜 눈물이 없었겠으며, 한숨 쉴 일이 왜 없었을까. 몇 십 년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단풍나무는 지난 10년, 그렇게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슬픔의 바람막이가 돼줬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마음 한켠을 나무만은 온전히 알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부축해 방에 들어섰다. 창밖의 어둠 속에는 여전히 단풍나무가 서 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다. 어머니는 피곤하신지 얼른 침대에 누우신다.

한 그루 나무, 누군가에겐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
 창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
ⓒ 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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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그래. 너희들도 잘 자라."

사물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와 남편은 이제부터는 생각을 달리 먹기로 한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큰 삶의 지침이 돼줄 수도 있고, 버팀목이 돼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녕. 오빠. 잘 자요.'

어머니의 방을 나오며 나는 창문 밖의 나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으로 건네는 것이지만 왠지 서먹하지 않다. 나무는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손을 흔드는 품새가 여간 정겨운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9월 2일, 이날은 오빠의 10주기 제사가 있는 날이다. 나와 남편은 저녁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어디 가냐?"
"네.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요. 먼저 주무세요."

제사를 지냄으로써 아픈 기억을 매년 떠올리는 일은 우리에게만 한정하기로 했다. 차에 올라타며 우리는 어머니방 창문 밖 단풍나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어머니의 말동무가 돼줘 고맙다고 말이다. 그러자 어머니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누군가의 친구가 될, 늘 굳건히 그 자리에 있어줄 그 나무는 그냥 조용히 바람에 나뭇잎을 흔드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해줬다.

"내 작은 책상서랍을 열었더니 편지 한 장이 나왔다. 그것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였다. 연필로 쓴 그 편지는 끝을 맺지 않은 것이 은연 중에 어머니의 이 세상 하직을 암시라도 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도 있다. 즉 가장 참담한 비탄의 와중에서도 사람은 눈물을 참고 참으로 잘도 '처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또는 어제까지만 해도 봉오리였던 꽃이 갑자기 피어나 눈에 띌 때가 있다. … 또는 편지 한 장이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된다. … 그리고는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 - 콜레트의 <콜레트의 편지> 중.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가족 인터뷰' 응모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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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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