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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기간병들이 새로 입소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있다(부산, 1950. 8. 18.).
 포로수용소 기간병들이 새로 입소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있다(부산, 195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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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여름이 더우면 그해 겨울은 더 춥다고 한다. 1950년이 그랬다. 그해 여름은 전쟁 때문인지 유난히 무더웠다. 그해 겨울도 예년에 없었던 강추위였다. 게다가 그해 겨울 1·4 후퇴로 피난민들은 강추위 속에 봇짐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피난처를 찾아 헤맸다. 전국이 이래저래 꽁꽁 얼어붙었다.

그해 겨울 부산포로수용소 포로들은 모포 한 장으로 밤새 떨었다. 그들은 아침식사 후면 그 모포를 들고 철조망 곁 양지쪽으로 가 움츠려 앉아 내복을 벗고는 이를 잡거나 햇볕을 쬐면서 그날 하루를 보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더니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여러 날을 지나자 추위와 배고픔에도 차차 익숙해 갔다. 그때부터 정작 더 큰 고통은 포로들 간 이데올로기 대립이었다. 준기는 포로수용소 입소 이후 줄곧 벙어리처럼 입을 떼지 않았다.

'네레 무사히 돌아올래믄 전쟁터에서 아무튼 입이 바우터럼 무거워야 돼. 약속 하갓네?'
'예, 오마니. 내레 오마니 말 꼭 명심하여 반다시 살아서 돌아오가시오.'

준기는 포로가 된 이후, 더욱 더 어머니가 헤어질 때 한 말을 되새겼다. 그는 포로수용소 내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굳게 입을 닫았다. 준기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통해,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로 '자비' '긍휼' '사랑'과 같은 거룩한 말들은 한낱 배부를 때의 이야기였다.

수용 한계를 넘긴 포로수용소는 차츰 포로들 간 서로 반목과 증오심이 이글거리는 원시 야만사회로 변해 갔다. 이런 지옥과 같은 포로수용소에서 그래도 포로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곧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대부분 포로들은 자신이 한두 주일 후면, 늦어도 한두 달 후면, 그리던 가족의 품과 고향에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정전협상은 포로들의 기대와는 달리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기약할 수 없었고, 전선에서는 지루한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들이 나날이 꾸역꾸역 고무풍선처럼 늘어만 갔다.

포로들이 게속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유엔군 측은 하는 수 없이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옆에 철조망을 치고는 제2수용소로부터 제6수용소까지 증설했다. 그런데도 계속 입소하는 포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유엔군 측은 부산 근교 수영에 '제1, 제2, 제3 수용소'와 부산 가야리에 '제1, 제2, 제3 수용소'를 증설했다. 1950년 12월 말 부산 거제리, 수영, 가야리 일대의 부산포로수용소에는 모두 13만5천여 명의 포로가 득시글거렸다. 

포로들이 천막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1950. .8.18.).
 포로들이 천막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1950.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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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자치조직

유엔군 측은 포로수용이 장기화되자 제네바 협정에 따른 수용소 내 포로들의 자치조직을 허용했다. 곧 포로수용소 내에는 새로운 지배 질서, 곧 수용소 내 정치가 시작되었다. 포로수용소 초기에는 친공, 반공으로 가르는 구별도 없었다. 주로 남쪽 인민의용군 출신들 가운데 영어를 잘 하는 포로들이 포로 자치조직을 장악했다.

말이 자치조직이지 사실은 포로수용소 측이 포로 가운데 일방으로 간부들을 임명했다. 그러다 보니 포로수용소 측에 고분고분하거나 협조적인 포로가 자치조직 간부로 임명되기 마련이었다. 그때 포로 자치조직의 최고위 간부는 여단장으로, 그 아래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 경찰대, 감찰대 등이 있었다.

포로 자치조직 간부들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온갖 특권을 누렸다. 일반 포로는 간부의 옷을 다려주는가 하면, 간부는 작업에서도 열외가 되었다. 또 자치조직 간부는 배식도 일반 포로보다 절반을 더 받는데다가 줄을 서서 타먹지 않았고, 취사병들이 내무반으로 가져다주는 밥을 먹었다.

이들은 일반 포로들에게 돌아갈 보급품도 중간에서 가로챈 뒤 철조망 밖으로 빼돌려 대신 술과 담배, 미제 시계, 금반지와 같은 사치품도 수용소로 끌어들였다. 자치조직 간부들이 찬 완장의 위력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그래서 간부들의 완장은 일반 포로의 선망 대상이요, 또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거제포로수용소 부근의 산과 들(1952. 2. 20.).
 거제포로수용소 부근의 산과 들(1952. 2. 2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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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선(LST)

1951년 2월 초, 부산포로수용소 측에서는 포로들에게 갑자기 소지품을 지참케 한 뒤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이들 포로는 곧 부산부두에 정박한 상륙 작전용 수송선(LST)에 실렸다. 그러자 포로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수송선이 부산부두를 떠나 그대로 일본으로 간다고 좋아하는 포로도 있었고, 태평양 깊은 바다에 그대로 쓸어버릴 거라고 공포에 떠는 포로도 있었다.

그 수송선이 부산항을 출항하여 얼마를 항해한 뒤 곧 닻을 내렸다. 포로들은 갑판에서 뭍에 갓을 쓴 노인이 보고, 비로소 거기도 한국 땅인 줄 알고 안도했다. 그곳은 부산에서그리 멀지 않는 거제도였다.

유엔군이 거제도에 새로 포로수용소를 지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첫째는  전장(戰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부산에 14만 명 가까운 포로가 수용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였다. 그 둘째는 유엔군 측의 병력이 적과 싸우기도 모자라는데 막대한 병력을 포로 경비와 관리에 쓰고 있는 사실에 대한 고육책이었다. 그 셋째는 포로들의 폭동이나 탈출에 대한 사전에 예방 조치였다.

그밖에도 거제도는 육지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거제포로수용소는 부산포로수용소보다 경비하기도 쉽고, 포로수용소 관리비도 적게 든다는 이점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거제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중국군 수용소 정문 앞 초소에서 기관총을 겨냥한 채 감시하고 있다(1951. 3. 20.).
 거제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중국군 수용소 정문 앞 초소에서 기관총을 겨냥한 채 감시하고 있다(1951.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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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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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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