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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던 지도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다시 펼쳐보았다. 나는 아침 일찍 시원한 바람을 쐬러 숙소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 아침의 목적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 지도에서 보면 나하(那覇) 최고의 번화가인 고쿠사이도리(國際通り)를 지나 유이레일(ゆいレール) 마키시역(牧志駅)을 지나면 멀지 않은 북쪽에 소우겐지(崇元寺) 세키몬(石門)이 있다. 어제 많이 걸어본 고쿠사이도리와 비교해 보니 숙소에서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나하 시내를 가로지르는 이 모노레일은 나하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 유이레일 나하 시내를 가로지르는 이 모노레일은 나하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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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아침 바람은 예상 외로 시원하다. 나는 천천히 고쿠사이도리를 걸었다. 이 번화가가 끝나는 곳에서 유이레일 마키시역을 만났다. 유이레일은 나하 시의 도심을 관통하는 모노레일로서 나하 시민들이 애용하는 대중교통이다.

이 모노레일을 이용할 때는 몰랐었는데 아래에서 보니 상당히 높은 곳에서 모노레일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아침 6시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모노레일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다. 더운 나라이다 보니 시원한 아침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시사이다.
▲ 시사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시사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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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시역 뒤편으로는 고쿠사이도리에 온 것을 환영하는 거대한 시사(シ-サ-)가 있다. 사람 키의 3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이 시사는 오키나와의 수많은 시사 중에서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오키나와의 유명한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에서 전통에 충실하게 만든 시사이다.

흙을 구워 만든 이 시사는 마치 토기 항아리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이 시사는 분수의 역할도 하고 있어서 시사가 누르고 있는 공의 작은 구멍에서는 여러 줄기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고쿠사이도리에서만 서로 다른 생김새의 수많은 시사를 보았다. 오키나와만큼 자기 고장의 확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석회암으로 만든 석문이 육중하다.
▲ 석문 오키나와의 석회암으로 만든 석문이 육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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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키시 역에서 나하시의 아침 정경을 감상하며 약 10분 정도 걸었다. 내가 찾는 소우겐지(崇元寺) 세키몬(石門)은 차들이 많이 왕래하는 큰 길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묘한 회색빛 석회암 돌문이 길가에 육중하게 서 있었다. 오키나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세키몬은 나하 시의 시멘트 건물 사이에서 묘한 질감을 자랑하고 있다. 세키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문은 한 가운데에 자리한 3개의 문이었고, 이 문은 왕이 드나들던 문이었다. 아치형의 이 석문을 중앙으로 석벽이 연결되고, 이 석벽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또 다른 석문이 있다.

소우겐지는 류큐(琉球) 왕조 시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찰이었다. 이 사찰은 우리나라 서울의 종묘와 같이 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중요한 사찰이었던 것이다. 소우겐지가 파괴되기 전에는 사찰의 본전에 왕위를 계승한 류큐 왕들의 위패가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성인 슈리성(首里城)과 왕가의 묘지인 타마우둔(玉陵)도 류큐 왕국 시대의 모습 그대로 재건되었으니 이 사찰도 시간이 지나면 복구의 발길이 닿을 것이다.

소우겐지의 정문으로 왕이 출입하던 문이다.
▲ 사찰 내부에서 본 석문 소우겐지의 정문으로 왕이 출입하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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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정문 앞에는 소우겐지가 건립될 당시에 세워진 유명한 하마비(下馬碑) 1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묘나 사찰 앞의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 앞에서 말을 내리라는 것인데 이 사찰 앞에서 존경심을 표시하라는 뜻이다. 원래는 1527년에 석문의 양편에 2개의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왼편의 하마비는 1945년에 파괴되었다. 하마비의 건립연대를 통해 보면 이 사찰은 짐작컨대 제 9대 쇼신왕(尙眞王, 1477~1562)의 재위기간 동안에 건설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찰 건립이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초기이니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었던 것이다.

소우겐지를 세운 쇼신왕의 통치 기간인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50년 동안 류큐 왕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쇼신왕은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류큐 왕국을 정비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조선과의 교역에도 힘을 썼다. 그는 불교와 학문을 장려하여 류큐 왕국을 황금기로 이끌었는데, 불교를 장려하던 쇼신왕이 의욕적으로 세운 사찰이 소우겐지였다.

소우겐지는 왕실 사찰로서 왕들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 사찰터 서쪽 유적 소우겐지는 왕실 사찰로서 왕들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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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을 지나니 꽤 규모가 큰 이중의 석재 기단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기단을 오르는 석재 계단이 있다. 정성 들여 쌓은 석재 기단과 석재 계단만 봐도 이곳이 류큐 왕가의 왕실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재 기단은 동아시아에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 항상 사용되었던 건축양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옛터를 바라보며 쇼신왕이 살았던 류큐 왕국 시대 그들의 문화를 떠올려 보았다.

과거의 왕실사찰, 지금 황량한 잔디밭과 주초석만 남았다.
▲ 사찰터 동쪽 유적 과거의 왕실사찰, 지금 황량한 잔디밭과 주초석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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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계단을 올라서니 휑한 소우겐지의 유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찰의 본전뿐만 아니라 사찰의 다른 건물들은 1945년 미군과 일본군의 오키나와 전투 때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상륙하여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일본 땅이었기에 민간인들의 피해도 컸고 소우겐지와 같은 류큐 왕국 유적도 그만큼 피해가 컸다. 전쟁의 와중에 소우겐지의 목조 건축물은 그때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황량한 잔디밭 유적지에 남은 장방형 석재는 허망하게도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의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사찰은 류큐 왕실의 종묘와 같은 중요 문화재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도 꼭 들러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소우겐지에는 오키나와의 수도 나하를 여행하고 있다면 꼭 보아야 할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를 보기 위해 나하를 가보라고 하는 다소 과장된 표현도 있을 정도다. 나도 나하 시내 중심의 소오겐지 공원에 큰 나무가 있다고 들었기에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길게 늘어선 가지의 모양이 아주 괴기스럽다.
▲ 가주마루 나무 길게 늘어선 가지의 모양이 아주 괴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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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워낙 커서 이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다. 사찰 안쪽의 계단 위에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멋진 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신비한 나무는 보기에 따라서 괴기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로 큰 이 노거수는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나무이다. 오키나와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보이는 이 나무는 큰 길가의 가로수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무 이름은 가주마루 나무인데 오키나와에서 불리는 가지마루라는 이름이 이 나무 이름의 원래 어원이다. 이 상록나무는 열대지역과 아열대 지역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동남아에서는 반얀트리(Banyan Tree)라고 불리고 반얀트리는 유명 호텔 체인의 이름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소우겐지의 가주마루 나무는 나무둥지 둘레가 무려 20m에 이른다. 이 거대한 나무는 낮 시간에 석문 안쪽에 큰 그늘을 만들어서 인근 주민들이 더위를 쫓는 휴식처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무 뿌리와 줄기를 보고 있으면 덥고 비가 많이 오는 날씨 속에서 참으로 지나치게 잘 자라는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땅으로 이어진 수많은 나무 줄기에 가까이 다가가면 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인 <원령공주>의 숲 속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실제로 이 가주마루 나무는 정령이 깃든 나무로 신성스럽게 여겨지며 우리나라의 정자목같이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많다.

줄기가 땅에 닿아 뿌리가 된다.
▲ 가주마루 줄기 줄기가 땅에 닿아 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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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비하고 감동적인 풍경의 나무는 오키나와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독특하고 괴기스러운 나무 줄기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한국에 살며 보았던 나무와 관련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다. 나무 몸통에서 뻗어나간 줄기가 땅으로 연결되어 줄기인지 뿌리인지 규정이 안 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는 뿌리가 지면을 장악하듯이 넓게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밑으로 늘어진 나무 줄기가 땅에 닿아서 다시 뿌리가 되는 불가사의한 나무이다.

오키나와의 전설에 의하면 이 가주마루 나무는 스스로 걸어다닌다고 말한다. 가주마루 나무는 원래 뿌리를 내린 곳에서 조금씩 다른 쪽으로 이동해 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주마루 나무는 줄기가 땅에 닿으면 마치 뿌리같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서 더욱 더 튼튼해진다. 줄기가 자꾸 뿌리가 되면서 수십 년, 수 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 원래 뿌리가 있던 위치에서 조금 이동한 자리에 나무가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오키나와 나하에 오고 이 소우겐지에 다시 온다면 저 노거수는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주마루 나무의 귀여운 요정이다.
▲ 키지무나 가주마루 나무의 귀여운 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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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이 가주마루 나무에는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가주마루 나무의 요정, '키지무나(キジムナー)'가 살고 있다. 키지무나는 아이 같은 모습이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는 않는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몸통에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키지무나는 상냥하지만 장난을 잘 친다.

오키나와의 대표적 도깨비인 키지무나는 소우겐지의 가주마루 나무 같이 특히 오래된 가주마루 나무에 살고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전설에 따르면 키지무나는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키지무나에게 미움을 받은 집은 망하고 키지무나의 마음에 든 집은 계속 번창한다고 한다.

나는 가주마루 나무 줄기 속에 키지무나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 웃고 있는 키지무나 나는 가주마루 나무 줄기 속에 키지무나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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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키지무나가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 가주마루 나무에 키지무나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키지무나는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함께 놀려고 아이들 앞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내가 오키나와의 아이가 아니어서인지 내 눈에는 이 키지무나가 보이지 않는다.

걸어다니는 나무를 눈 앞에 그려보고 나무의 어린 요정을 만나는 꿈은 진정 허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 어린 시절 소년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소년의 마음 속에 있던 꿈과 상상의 세계, 그 세계는 아직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소우겐지, #가주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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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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