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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위원인 새누리당 황진하·조명철 의원과 민주당 전해철·박남춘 의원이 회의록 원본을 검색하기 위해 19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도착,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위원인 새누리당 황진하·조명철 의원과 민주당 전해철·박남춘 의원이 회의록 원본을 검색하기 위해 19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도착,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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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며 정치공세를 폈다. 그러나 공개된 회의록 전문에서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NLL 포기 여부에 관한 논쟁이 종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회의록을 국가기록원에 이관하지 않았다"며 새로운 쟁점을 확산시키는 데 치중하고 있다.

회의록의 소재에 관한 의혹은 '국가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국가기록물법)에 따라 법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의 본질은 새누리당이 왜곡된 발췌본을 근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반국가 행위자로 몰아붙였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NLL 논쟁에 관한 정치적·법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새로운 쟁점을 확산시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만 여념이 없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모습은, 515년 전인 1498년에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를 연상케 할 만한 일이다. 당시의 연산군도 사초(실록 원고)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바탕으로 개혁세력에 대한 정치 탄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유치한 '사초 게이트'

신진 선비들에 대한 정치탄압이라고 해서 사화(士禍)라고도 부르고, 사초가 발단이 된 사건이라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부르는 무오년의 사화에서, 집권세력인 훈구파와 연산군은 이미 죽은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인 김종직의 문건을 문제로 삼았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사관인 김일손이 스승의 문건을 사초에 포함시킨 일이 이런 사건으로 연결된 것이다. 

참고로, 사림파는 15세기 후반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16세기 후반에 정권을 장악한 개혁파 선비그룹을 지칭한다. 주로 중소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은 과거시험 합격과 정상적 승진 절차를 걸쳐 세력화에 성공했다. 사회개혁을 모토로 중앙 정계에 진입한 이들은 연산군 시대에 야당 혹은 개혁세력의 입장에 있었다.

반면, 훈구파는 조선 전기의 주요 정변에서 공훈을 세워 대규모 부동산과 정치권력을 획득한 세력이다. 이들도 과거시험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들이 정권을 장악한 결정적 계기는 학문적·행정적 실력이나 정상적 승진 절차가 아니었다.

훈구파의 훈(勳)이란 글자가 풍기는 것처럼, 이들은 주요 정변에서 세운 공훈을 발판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했다. 정변에서 승자의 편에 선 것이 출세의 디딤돌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림파 같은 개혁세력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 시대에 이들은 여당 혹은 구세력의 입장에 있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왼쪽). 오른쪽은 부인 신씨의 무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왼쪽). 오른쪽은 부인 신씨의 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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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에 문제가 된 김종직의 문건은 '의제의 죽음을 슬퍼하는(弔) 글'이란 뜻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이것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던 과도기에 초나라 왕의 타이틀을 갖고 반(反)진나라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의제(회왕)가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이 글을 쓴 시점은 세조 수양대군이 집권한 지 3년 뒤인 1458년이고, 당시 김종직은 스물여덟 살의 과거 수험생이었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40년 전에 과거 수험생 김종직의 손에서 생산된 이 문건을 근거로 김종직과 사림파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의제는 단종을 상징하고 항우는 세조를 상징한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한 뒤,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국가 행위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런데 주군을 배신한 신하를 혐오하는 태도는 거의 모든 선비의 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선비에게 충효를 가르치는 나라에서, 선비가 항우 같은 사람을 혐오하는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는 글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의 김종직은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에 급제한 상태에서 대과를 준비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수험생이 쓴 글에 정치적 의도가 담긴들 얼마나 담길 수 있을까. 그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든지 간에 정치적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연산군과 훈구파가 김종직과 사림파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인 것은 매우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억지나 다름없는 일이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를 감행하고 신진세력인 사림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로 인해 개혁파 선비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고 사림파의 활동은 상당 부분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훈구파에게 당한 연산군의 말로

연산군과 훈구파가 사초에 적힌 김종직의 문장을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한 본질적 의도는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사림파의 정치공세로부터 구체제를 사수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건국 이래 약 100년간 경제적·학술적·사회적 능력을 구축한 지방의 사림파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시대(1470~1494년)에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성종시대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춘추관 같은 기관들을 주로 장악했다.

사법기관 또는 언론기관 혹은 학술기관에 포진한 이들은 이·호·예·병·형·공조 같은 일반 행정기관을 장악한 훈구파를 압박하면서 구체제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원칙과 시스템에 근거한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조선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훈구파가 연산군과 함께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은 경제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낳은 결과였다.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도 비슷한 동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명의 자녀를 낳고 정종이 26명의 자녀를 낳고 태종이 30명의 자녀를 낳고 세종이 24명의 자녀를 낳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의 왕들은 유난히 자녀가 많았다. 딸과 아들의 상속분이 똑같았기 때문에 공주나 왕자가 결혼할 때마다 왕실은 많은 토지를 떼어줘야 했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토지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성종 때는 세금마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성종 때는 거의 모든 농경지가 흉년을 겨우 모면한 정도로만 보고되었다. 세금 납부를 피할 목적으로 지주들이 '종합소득세'를 허위로 신고했던 것이다. 그러니 세수가 줄어들고 왕의 경제적 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의 편전(일상적 집무실)인 선정전으로 연결되는 통로. 사화 게이트의 주역인 연산군은 창덕궁에 있다가 훈구파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창덕궁의 편전(일상적 집무실)인 선정전으로 연결되는 통로. 사화 게이트의 주역인 연산군은 창덕궁에 있다가 훈구파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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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약해지다 보니 연산군이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도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자금이 많을 때는 정치활동도 원활해지고 반대파를 돈으로 매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돈도 부족하고 정치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사림파가 중앙정계로 밀고 들어오니, 연산군은 사화 같은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개혁세력 앞에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연산군과 훈구파의 합작으로 무오사화라는 폭력적이면서도 억지스러운 정변이 초래된 것이다. 만약 연산군과 훈구파가 사림파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사화가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무오사화에 재미를 붙인 연산군 정권은 6년 뒤에 또 다른 사화인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원한을 갚자고 벌인 정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의 본질 역시 무오사화와 마찬가지로 사림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이른바 '사초 게이트' 같은 억지 사건으로 개혁세력을 탄압하고 구체제를 유지하던 연산군 정권은 출범 11년 만인 1506년에 내분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연산군 정권을 파괴한 중종반정 세력은 개혁세력이 아니라 집권세력인 훈구파 가운데 한무리들이다.

무오사화 및 갑자사화로 인해 개혁세력이 철퇴를 맞으면서 구세력의 입지가 강화되자 연산군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이로 인해 연산군은 구세력의 쿠데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연산군은 결국 집권세력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도, 유치하고 억지스러운 사초 게이트는 군주의 권력 유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산군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그때보다 500년이나 더 발전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태그:#정상회담 회의록, #노무현, #서해북방한계선, #NLL, #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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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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